〈 63화 〉63화입니다.
‘...어라?’
이릴은 문득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이미 익숙한 풍경인 알에리 저택의 복도였으나어쩐지 이상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낯설었고 본능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처럼 경종을 울렸다.
무엇보다도 이 복도를 걷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비올렛과 산책을 하던 도중 만난 샬럿에게 불려 어느 방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별 것 아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들어와 몸을 일으켰고… 거기까지 떠올린 이릴은 이마를 짚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 다음이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분명 샬럿과 무슨 이야기를 했었고어떤 차를 마시며 대화를 했었는지도 기억이 나는데 마치 새까만 먹을 칠한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릴?”
걸음을 멈춰서자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아파?”
걱정된다는 듯 올려보는 자주빛 눈동자에 이릴은 혼란스러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그렇게 생각하던 이릴은 다시 한번 머리를 부여잡았다.
비올렛이 이곳에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 역시도 알에리 저택에 묵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첫 날의 그 내기로 항상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그러니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무척이나 당연한 일.
“괜찮아?”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릴은 어쩐지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안해.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서… 어디 아픈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레니에게 부탁해서 약이라도 구해오는게 좋지 않을까?”
“아냐, 정말로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면서도 피하지 않는 모습이 귀여웠다.
“근데 지금 어디 가고 있는 거야?”
“어딜가고 있냐니, 당연히 방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잖아?”
“방으로?”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비올렛의 모습에 이릴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아팠으면 이렇게 멀쩡하게 걷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잠깐 생각이 안났을 뿐이야.”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보는것이 조금 찔려서 이릴은 그 시선을 피했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손을 잡는 온기가 느껴졌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고마워.”
“그래도 일단 말해줄게. 우리는 방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야. 나는 알폰스에게 붙들려 연회에 참가했어. 그리고 연회가 끝나 돌아가던 도중 만나 함께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고.”
“연회가 끝나?”
이릴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회가 끝났다면 적어도 새벽녘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샬럿과 작은 티타임을 가지면서 담소를 나눴던 시간은 아무리 늦었어도 겨우 초저녁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응. 그래서 묻고 싶은게 있는데 도대체 어디 갔었던 거야?”
“어디갔었냐니, 샬럿에게 불려서…”
“샬럿이라니?”
“낮에 산책을 했었잖아? 그때 샬럿이 와서 날 불러서…”
“이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비올렛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샬럿이 누구야?”
“샬럿이 누구냐니 메르씨엘 남작의…”
정말 끈질기네요.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이릴은 말하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어쩐지 복잡하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릴?”
“어, 응. 아무것도 아니야. 갈까?”
의아한 듯 바라보는 비올렛의 손을 이끌고 앞장 섰다.
두 사람은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복도를 거닐었다.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웃음 소리 사이로 질척거리는 음색이 섞여 들었지만 그 누구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걸음이 멈춘 것은 어느 방의 문 앞이었다. 이릴은 자연스럽게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다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올렛은 시간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이릴? 왜 문을 안열고 있는 거야?”
문을 열어서는 안돼. 어디선가 그런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다급했고 익숙했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진, 우리 다른 방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등 뒤로 안겨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좋아해.”
고개를 파묻은 그녀가 웅얼거리듯말했다. 그날 밤처럼.
“나도 좋아해.”
이릴은 허리를 두른 팔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역시 그날 밤처럼. 하지만 그날 밤과 달리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알고 있어. 하지만 나의 좋아함과 너의 좋아함은 달라.”
“...영진.”
“내가 여자라서 그런 거야? 그런 거라면 너는 알고 있잖아, 나는…”
“그런 게 아니야!”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렇게 말하고도 스스로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조금 진정이 된 후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네가 여자라서가 아니야. 전부 내가 나약하기 때문이야."
"나약하기 때문…"
"연회가 끝난다면 우리는 헤어지겠지. 너는 메르씨엘 저택으로, 나는 알에리 저택에 남아서.그리고는 다시 만날 때까지 아주 긴 시간을 서로가 없는 형태로 지내게 될 거야."
"..."
"나는 그걸 견딜 수 있어. 네가 무척이나 그립고,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외로워 할 테지만, 견디지 못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너를 볼 수 없는 이 저택이 무척 갑갑한 감옥으로 느껴지고, 당장 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어질 거야. 그리고 너를 껴안고 이렇게 말하겠지."
무척이나 보고 싶었어. 라고. 이릴은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받아줄 수 없어. 나는 분명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문고리를 놓았다. 그제야 비명 같은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이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속으로만 담아두었던 말을 내뱉어서 마음은 편했으나 비올렛의 얼굴을 쉬이 바라볼 수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이 스륵 풀리며 떨어졌다. 등 뒤에 안겨 있던 온기도 멀어졌다.
"미안해."
아마도 적지 않게 실망했을 테지. 이릴은 침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깨가 붙잡히는 느낌이 들더니 홱 몸이 돌려졌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니 비올렛의 부루퉁한 얼굴이 보였다.
"미안하다니, 바보야?"
"어?"
“난 네가 미안하길 바라고 이런 말을 한 게 아니야. 그냥 내 마음을 내 멋대로 표출한 것 뿐이지. 네가 미안해하고 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그으, 미안해?”
“또 그런 소리.”
하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굴리고 있으니 픽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니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짓고 있던 비올렛이 보였다.
“정말 미안하다면 키스해줘.”
“어?”
“똑같은 말 두번 하는 거 싫어하는 건 알지?”
그렇게 말하고는 뒷짐을 지더니 고개를 살짝 들어올린다. 그리고는 눈을 살포시 감으며 가만히 있었다. 마치 얼른 하라는 것처럼. 비올렛의 행동에 이릴은 당황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하다 곧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깊게 심호흡했다.
잔뜩 요동치던 마음이 겨우 평정을 되찾자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기다란 속눈썹이나 오똑한 콧날, 그리고 살짝 벌어진 앵두 같은 입술.
입술. 그것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이릴은 떨리는 눈으로 비올렛을 바라봤다. 그녀는 요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한 발자국, 다가갔다. 손을 어깨 위로 올리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가 되자 움찔 떠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릴은 그녀를 바라봤다.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얼굴 위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당당한 척을 한 주제에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못내 우스워서 픽 웃어버린 이릴은 새빨간 입술 위로 키스했다.
툭 가져다 댄 듯한 가벼운 키스.
“내가 원한 키스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투덜거리며 비올렛이 말했다. 그리고는 눈을 떠 이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 번 더.”
이릴은 말없이 키스했다. 비올렛은 그녀의 목을 팔로 감으며 살풋 눈을 감았다. 문에 기대 몸을 밀착한 채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쿵쿵 떨리는 심장 소리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들려왔다.
"하아…"
누구의 숨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입술이 떨어지며 얇은 실선이 이어졌다.
이릴은 숨을 고르며 비올렛을 바라봤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보였다. 다시 한번 키스를하고 싶었다. 주저없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목을 두르던 팔이 슬금 내려가며 이릴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문고리 위로 손을 올려놓았다. 잊고 있던 경종이 다시금 울리기 시작하자 키스에 열중하고 있던 이릴의 눈이 뜨였다.
"...영진?"
"이릴. 문을 열어주지 않을래?."
"하지만…"
"부끄러워서 그래.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비올렛은 수줍은 듯 그렇게 말했다. 탁 트인 공간이 아니라 단 둘만의 공간에서 이어나가고 싶다는 듯. 이릴은 그 감정에 십분 공감했으나, 어쩐지 꺼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까치발을 들며 입술을 맞부딪쳐오는 비올렛의 모습에 사라졌다.
"이릴. 문을 열어줘."
노크하듯 입술을 혀로 톡톡 건드리며 말하는 그녀는 마물이라기 보다는 악마처럼 요사스러웠다. 이릴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연다. 끼기긱 하며 열리는 소리가 마치 단말마처럼 들려왔다. 몸을 겹치며 키스하던 두 사람이 방 안으로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야릇한 신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라진 복도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파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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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정말 애를 먹이는 사람이네요.”
샬럿은 푸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래서 귀쟁이들은 싹다 멸족시켜야 하는 종족이에요. 마법조차 배우지 않았을 반푼이조차 정신 마법을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설마하니 한낮에 시작한 작업이 동이 트기 전에 끝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엘프라고는 하지만 혼혈이었으니 하루가 끝나기 전에는 금방 처리할 수 있으리라생각했는데.
“빨리 끝내고 주인님이랑 이별 섹스라도 할랬는데, 이릴 때문에 이게 뭐예요. 에잇, 에잇.”
“아? 앗? 으앗? 흐아?”
샬럿의 손가락에서 이어진 촉수가 이릴의 귀를 타고 뇌를 자극할 때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이 간헐적으로 튀어 올랐다. 단단히 묶여 있던 터라 의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그녀에게 있어서는 다행은 아니었다.
사실 이제는 묶어 놓을 필요도 없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덕분에 이릴의 정신 방벽은활짝 열렸으며 방금 전의 행위로 그녀의 자아가 붕괴되었다.
이제 이것은 이릴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깃덩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샬럿은 마무리 작업으로 재물로서 필요한 마법진을몸에 세기고 의식이 거행되는 장소로 옮겨놓기만 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심통이 난 얼굴로 이릴의 뇌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좋아요? 마지막에 비올렛이랑 알콩달콩 하니까?”
“앗? 흐약?”
흐리멍텅한 눈으로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그녀는 짧게 비명을 내뱉을 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자아라는 게 사라졌으니 당연했으나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배알이 꼴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자기만족이라는 것을 알아서 한숨을 폭 내쉬며 촉수를 거둬들였다. 움찔거리며 침을 줄줄 흘려대는 이릴을 보며 샬럿이 말했다.
“뭐, 어쨌든. 잘가요. 이릴.”
다음 생에서는 귀쟁이로 태어나지 마시고. 상큼한 웃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곧 저택을 떠날 주인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영... 진...”
홀로 남은 이릴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