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8화 〉58화입니다. (58/75)



〈 58화 〉58화입니다.

“내가 왜 또 이런 짓을…”

비올렛은 술잔을 들고 중얼거렸다.

“이전의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만.”

“절대 그럴 생각 없으니까 깨시지.”

짜증나는듯 알폰스를 노려보고는 그대로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는 곧장 속에서 올라오는 단내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달잖아 이거. 술이라고는 소주와 맥주 밖에 모르는 그녀에게는 전혀 취향이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비치된 다과 두어개를 신경질적으로 씹어 넘기고 나서야 입에 감돌던 단내가 사라졌다. 비올렛은 뚱한 얼굴로 턱을 괴며 연회장을 바라봤다.

어제 하루 그것으로 끝일  알았는데 또다시 밤이 되기 무섭게 알폰스에게 불려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어제와는 달리 노란 드레스가 아닌 프릴이 달린 하늘하늘한 하얀 드레스까지 입고서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샬럿도, 이릴도 없이 알폰스와  둘인 상황이었다.

"이릴을 어디로 데려간거야?"

"후작께서 부르신 것을 내가 어찌 알겠나."

확실히  늙은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비올렛은 쉬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설마 안좋은 일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는데…

그걸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알폰스 만큼은 아니라고 하지만 알에리 역시 만만치 않은 또라이임이 분명했다. 비올렛은 여전히 제 손을 잡고 심장을 헤집던  날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그런 녀석에게 불려갔다는데 마음을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불안함에 다리가 달달 떨렸다. 발꿈치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구두를 신은 덕에 그 소리가 좀  크게 들렀다. 연주되는 음악 소리에 묻혔으나 은근히 신경을 쓰면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알폰스는 손을 뻗어 비올렛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갑작스레 닿는 손길을 신경질적으로 쳐내며 비올렛이 말했다.

“뭐하는 짓이야?”

“불안해 하는  같기에.”

“하…"

비올렛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다 고개를 돌리며 눈을 피했다. 말해봤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뭐라고 하던 알폰스는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할 테니까.

애초에 이게 누구 때문인데. 비올렛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알폰스는 제게 등을 돌린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녀가 걱정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해."

의식은 이틀 뒤에 시작될 테니 적어도 내일 밤까지는 멀쩡할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줄 순 없었다.

"알에리 후작은 불능이다."

"불… 뭐?"

"안선다는 말이다."

과거 전쟁 중에 입은 부상으로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는 몸이었다. 물론 환부를 잘라낼 정도로 심각해지기 전에 처치를 한 덕분에 형태는 남아있었지만, 없는 거나 다름 없는 몸상태였다.

“그러니 네가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없어도 여인을 희롱할 방법이야 수없이 많았지만, 알폰스는 제법 단호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적어도 더 이상 불안해 하지 않았으면 해서. 동시에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없었다.

그녀가 불안해하던 말던 제가 알게 뭔가? 하지만 그것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알폰스의 말에 등을 돌리고 있던 비올렛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내뱉었는지 그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정말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알폰스다. 어떻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단 말인가. 그러니 저건 절대로 본심이 아니었다. 약혼자 연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겠지.

가증스럽기 그지 없었다. 자신을 짓밟고 강간하던 것이 얼마 전인데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저런 말을 한다는게.

"...그래."

구역질이 치밀어오른다. 하지만 비올렛은 그것을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답했다. 다리를 떨던 것을 의식적으로 멈추고 더 이상 불안해 하지 않는 것처럼 태연자약한 얼굴로 알폰스를 바라봤다.

"고마워. 꼴에 사람을 위로할 줄은 아는가봐?”

"..."

 말이 의외였을까. 그는 조금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뭐야, 그 얼굴은. 나도 평범하게 고마워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네가 그런 말을 할  몰랐는데."

그러게.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네 놈에게. 하지만 그런 감정을 숨기고 평범한 반응을 내보였다.

"아, 그러셔."

못마땅하다는 듯, 괜히 말했다는 어투로 고개를 돌렸다. 뒤통수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비올렛은 고개를 마주하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참지 못하고 속에  것을 쏟아내고 말아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할 때였다. 비올렛은 허전한 오른쪽 손목을 바라봤다. 묵빛 철로 이뤄진 족쇄는 어젯밤 연회에서 빠진 뒤로는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알폰스가 잊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채우지 않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뭐가 됐건 제게는  기회였다.

이릴과 함께 이곳을 탈출할 유일한 기회. 이미 알에리 저택의 구조 정도는 파악이 끝난지 오래였다. 산책을 빙자해 저택 곳곳을 돌아다녔다. 병사들이 얼마의 간격으로 움직이는지도 대략적으로 알았다. 다만 바깥의 녀석들은  모르는게 문제였지만, 족쇄가 풀려있으니 조금 상대해도 괜찮을 것이었다.

‘문제는 알폰스 놈이겠지.’

자신이 탈출을 감행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쫓아올게당연했다. 그리고 아마 머지 않아 잡힐 것도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잠시 무력화 시킬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그런게 있었으면 진작 써먹었겠지.’

비올렛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폰스를 무력화 시킨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같은 것을 사용할  있다면 모를까. 그런데 그런 것을 대체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머릿 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에 비올렛은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욱…”

“괜찮나?”

“괜찮아… 방금 마신 술 기운이 올라와서 그런 거야.”

“그리 독한 술은 아니었던  같은데 말이지…”

그의 말대로 독한 술은 아니었다. 과일 향이 은은히 풍기는 술이 독하면 얼마나 독할까. 그리고 고작 술 한잔에 헛구역질 할 정도로 맹탕인 몸도 아니었다.

하지만 비올렛은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바람 좀 쐬고 와야겠어. 일어나지마. 아무리 약혼자라고 해도 화장실까지 따라오는건 아니겠지?"

"...그래."

대답을 듣자마자 등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얼마나 걸었는지는   없었다. 어두운 복도가 어느새 탁 트인 정원으로 바뀌었고 곧 한 그루의 나무가 보였다. 다른 식물들과 어울리지 않고 외딴 곳에 홀로 서 있는그것은 비올렛과 이릴이 산책을 할 때마다 그늘 아래에 앉아 있던 휴식처였다.

“하아, 하아, 우웩…!”

거센 숨을 토해내던 비올렛은 울컥 토악질을 내뱉었다. 먹었던 것을 모두 뱉고도 그칠  모르던 구역질은 조금 지나서야 잠잠해졌다.

‘내가 미친거지.’

그녀는 나무 기둥에 이마를 박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답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런 생각까지 떠올릴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몸으로 유혹해서 알폰스를 지치게 만든다니 멍청하고 멍청하기 그지 없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먼저 나가떨어지는건 자신이 될 게 뻔한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수도 없이 몸으로 경험해본 일이 아닌가.

“우웩…”

그렇게 생각하니 또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미 내뱉을 것은 모두 내뱉고  뒤어서 나오는 것도 없었다.

이릴, 보고 싶어. 고작 떨어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벌써 그녀가 그리웠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이릴…”

“괜찮으십니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비올렛이 고개를 돌렸다. 구름에 달빛이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가녀린 목소리를 가지셨지만, 남성같으신 분이군요.”

“헛소리를  생각이면 꺼져.”

“어려움에 처한 숙녀분을 모른 채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이건 또 뭐하는 놈이야. 비올렛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으니까 신경 꺼.”

“어떻게 신경 끌 수 있겠습니까?  메르씨엘 남작의 약혼녀를 말입니다.”

발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하니 연회장에서의 모습이 연기였을 줄이야. 외모만 보고 깜빡 속았군요.”

비올렛은 그를 바라봤다.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지상을 비추었고, 그의 모습 역시 천천히 드러났다.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다.그러나 분명 연회장에서 스치듯  적이 있는 남자였다. 입고있는 옷이 시종의 것이라기에는 고급스러웠다.

귀족인가? 낭패군. 물론 알폰스의 거짓말이 들통나는 것은 알 바가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서 제게 불똥이  게 문제였다.

어쩌면 노예의 인장을 다시 차게  지도 몰랐다. 비올렛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돌아가서 모두에게 알리기라도할 건가? 알폰스의 약혼녀가 사실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고?"

"뭐, 성격을 숨기는건 누구나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작 그런 걸로 협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요."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는 그저 우연히 지나가다 힘들어 하는 것을 보게 된 것 뿐입니다."

"우연히?"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비올렛은 그를 노려봤다.

"여긴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외딴 곳이야. 내가 며칠 동안 이 근처를 둘러봤지만 경비를 하는 녀석들 말고는 오지 않았다고. 그런데 하필 지금 우연히 지나가다 날 봤다?"

"그렇게 되는 군요."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지만 당신이 힘들어하고 있던것을도우려던건 사실이었습니다."

"네 놈이 도울  있는 게 아니야."

"아뇨. 저는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는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제 이름은 올리버 볼턴. 볼턴 가문의 장남이자 렘지오르 후작의 후계자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올리버는 잠깐멈칫했다.

“...혹시 렘기오르 후작을 모르시는 겁니까?”

“그게 뭔데?”

“허…”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었으나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설마하니 아버지의 위명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상황에 잠깐 넋을 놓았으나 곧바로 정신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당신이 곤란해 하는 것은 왠만하면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래? 그럼 알폰스 놈을 죽여줘.”

“...예?”

“알폰스, 아니 메르씨엘 남작이라고 해야알아듣나?  녀석을 죽여달라고.”

“하지만… 그는 당신의 약혼자가 아닙니까?”

올리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말한 대로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연회장에서 창백한 안색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따라나온 것이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비올렛에게 첫 눈에 반했다.

연회를 즐기는 성격이 아닌지라 첫날을 제외하고 계속 방에만 있었던 그에게 교재하던 친우 몇이 굉장히 아름다운 영애가 나타났다고 말을 해댔다. 사람이 생겨봤자 얼마나 생겼다고 생각했으나 호기심에 연회를 나갔고 비올렛을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틀림없이 이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메르씨엘 남작이라는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절망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음만이라도 전해보자고 생각해서 따라나온 것이었는데…

약혼자를 죽여달라니, 이건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못하겠으면 꺼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비올렛은 올리버를 노려보며 말했다.

“도와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묻지마.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자신이 노예라는 것도, 약혼녀를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어느  하나 쉬이 말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하나 잘못 말하기라도 했다가 알폰스의 계획이 어그러진다면, 그 감정을 누구에게 풀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뭘 믿고 그런걸 알려줘야 하는 걸까. 비올렛은 퉤, 침을 뱉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도 기억에 묻어. 그게 나를 돕는 길이야."

그리고는 올리버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손목이 잡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이거 놔.”

“도와드리겠습니다.”

"뭐?"

"직접적으로는 도와줄 수 없겠지만, 간접적이게나마 도와드리겠습니다."

제 아버지인 렘지오르 후작의 위세가 여느 귀족보다 강대하다고 하나 감히 알에리 후작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그런 그가 친애하는 메르씨엘 남작을 건드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정도의 도움이라면 상관 없겠지. 그것이 직접적으로 메르씨엘 남작을 죽이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애써 무시하며 올리버는 주머니를 뒤져 작은 종이 봉지를 꺼내 비올렛의 손에 쥐어주었다.

부스럭거리는 봉지의 감촉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건…?"

"수면을 돕는 물건입니다. 극미량을 물에 타서 마시면 기분 좋게 잠들  있게 하는 효과가 있죠."

원체 밤을 뒤척이는 그에게 효과가 있을 거라며 시종장이 구해준 것이었다. 확실히 그 효과는 뛰어났다. 마시는 순간 언제 뒤척였었냐는듯 곧바로 졸음이 쏟아졌다.

"이 봉지에 든 양을 전부 마시게 할 수 있다면 제아무리 메르씨엘 남작이라도 쉽게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봉지 안에 든 것은 약 30회분의 분량. 한달을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극미량을 섭취해도 졸음이 쏟아지는 물건이다. 그 한달치를 한 번에 섭취하게 된다면 제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난 기사라고 할지라도 힘을 못쓸 것이었다.

올리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비올렛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해가 안되네.   도우려고 하는 거야?"

"말했잖습니까. 어려움에 처한 숙녀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거짓말 하지마. 고작 그딴 이유로 살인을 돕는다고?"

이것 참. 올리버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친 용병이나 할 법한 어투를 사용하면서도  어느면에서는 고지식한 아가씨였다.

"그럼 메르씨엘 남작을 죽여달라고 했던건 거짓말이셨습니까?"

"그건…"

"사용하든 하지 않든 당신의 선택입니다. 저는 선택의 폭을 넓혀드릴 뿐이지요."

"...왜 나한테 이렇게 해주는 거야."

"정말로 듣고 싶으십니까?"

올리버는   무릎을 꿇으며 비올렛을 올려다봤다. 흠칫 놀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주빛 눈동자가 이름처럼 아름다웠다.

"첫 눈에 반했습니다.  부인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부…?! 내가 미쳤냐! 남자랑 결혼 같은걸 하게?!"

얼굴이 붉어진 채로 그렇게 소리치는 모습도 퍽 귀여웠다. 올리버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단박에 거절당했으나 그다지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그가 싫은 것이 아니라 남자와 결혼하는게 싫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친우는 어떻습니까?"

"하?"

"부인이 싫다면 친우가 되자는 뜻입니다. 설마 그것도 안된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그정도야."

단순히 친구 먹는 정도라면. 비올렛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버는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그럼 하시는 일이 성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유는 묻지는 않는 거냐?"

“물어 봐도 되는 거였습니까?"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약속이라고 생각해주는 건가. 올리버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성공하시고 난 다음에 알려주시지요.”

"마치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는군."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족을 살해하는 것은 중죄다. 만일 실패한다면 그녀를 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올리버는 비올렛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만 두실 생각은 없겠지요?"

침묵은  긍정이었다. 올리버는 소리 없는 대답을 듣고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등을 보며 비올렛은 손에 들린 봉지를 굳게 쥐었다.

만월에 가까워진 달이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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