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7화입니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옷가지와 곳곳에 남은 정사의 흔적이 지난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연초를 입에 물자 끄트머리에 작게 불씨가 피어올랐다. 알폰스는 익숙한듯 느릿하게 연초를 피우며 숨을 내뱉었다. 몽실거리는 하얀 연기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고민이 있으신 얼굴이네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침대에 엎드려 있던 샬럿이 말했다.
“그런 거 없어.”
“거짓말. 저와 몸을 섞는 중에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으셨잖아요.”
그러면서 몸을 일으켜 알폰스의 등을 껴안으며 말했다.
“말해줘요. 무엇이 주인님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죠?”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실제로도 악마였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폰스는 가만히 연초를 태우며 허공을 응시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게도 비올렛이었다.
건방지고, 주제도 모르는 마물 노예.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 사들였다. 재능이 있어서 검을 가르쳤고, 먹음직하게 생겼기에 몸을 취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일부러 치욕을 주면서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그렇게 당하고도 언제 그랬냐는듯 제게 반항을 하며 죽이려 들었다. 그랬기에 질리지 않았다. 일부러 꺾으려고 해도 꺾이지 않는 녀석은 썩 재밌는 장난감이었다. 내구성도 튼튼했기에 험하게 해도 쉽게 죽지 않았으니 더욱 그랬다.
재밌는 녀석. 그래, 딱 그정도였다. 제 안에서 비올렛은 잠시 지루함을 달래줄 장난감에 불과한 녀석이었다. 이 저택에 와서 하프 엘프와 재회한 뒤로는 조금 무뎌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하프 엘프는 마지막 날에 죽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무뎌졌던 비올렛도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올 테지.
‘정말 그러한가?’
하프 엘프가 죽는다면 비올렛은 이전처럼 제게 반항을 하며 죽이려고 할지 의문이 들었다. 소중한 것을 잃고 자포자기로 불가능한 것에 몸을 던지는 놈들은 숱하게 보아왔다. 특히나 감정적인 그녀가 그러지 않을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 하프 엘프를 비올렛과 함께 취하지 못한 건 아쉬웠으나,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그것은 제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서 비올렛이 망가지게 된다면 조금 고민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의식을 막을 수는 없다.’
늙어죽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특히나 알에리 후작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인간이라면 더욱이. 곰곰히 방법을 생각하던 알폰스는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주인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깟 노예가 무엇이 중요하다고 제국에서 황태자 다음으로 세력이 강대한 알에리에게 반기를 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망가지면 버리고 새로운 것을 사면 되는 일이지 않은가.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러면 될 것이었다. 짧아진 연초 끝에서 재가 흩날린다. 알폰스는 손 끝으로 불을 끄고는 손가락으로 연초를 허공으로 튕겼다. 잔뜩 구겨진 그것은 불꽃으로 화하며 사라졌다.
“살럿.”
“네?”
“의식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지?”
“완성 단계예요. 저택에 왔을 때부터 준비했으니까요.”
재물만 있으면 언제든지 거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알폰스는 연초를 하나 더 꺼내들어 입에 물었다. 익숙한 장면이 반복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던 알폰스가말했다.
“네가 없으면의식은 발동되지 않는 건가?”
“그렇죠. 의식을 주관하는게 제가 할 일이니까요. 애초에 제가 아니면 발동시킬 수도 없는 의식이기도 하지만요.”
“그러면 너는 저택에 남아서 의식을 거행하고 돌아와라.”
“...그게무슨 소리에요?”
“나와 비올렛, 그리고 부관은 영지로 돌아간다.”
그 말에 샬럿은 벌떡 일어나며 알폰스를 잡고 흔들었다.
“왜요? 왜요왜요왜요왜요왜요?!”
“놔라. 머리 흔들린다.”
“왜 저만 두고 가시는 건데요!”
“네가 있어야 의식을 진행할 수 있다며.”
“그거랑 저를 놓고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켁!”
“어지럽다고 했지.”
알폰스는 한숨을 내쉬며 샬럿의 목을 잡아채고는 말했다.
“곧바로 간다는 게 아니다. 이틀 뒤, 후작에게는 적당히 둘러대고 돌아갈생각이다.”
“의식은 고작 그 하루 뒤인데요?”
“그러니까 돌아간다는 거다. 재물이 누군지 까먹은 거냐?”
“하프 엘프인 이릴이잖아요. 당연히 알고 있죠.”
“그리고 비올렛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이기도 하지.”
“...아하?”
그제야 무슨 소리인지 알았다는 듯 샬럿이 빙긋 웃었다.
"주인님, 그렇게 안봤는데 비올렛을 꽤 아끼시나 봐요?"
"부정하지는 않으마."
알폰스는 담담히 말했다. 그제야 가슴 한구석에 얹혀 있던 감정 한 조각이 씻긴듯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올렛은 다른 것들처럼 가볍게 쓰고 버릴 정도로 하찮게 생각되지 않았다.
건방진 그 눈빛도, 저를 죽이려 달려드는 몸짓도. 그러면서도 제 가르침에 집중하던 모습도.
침대 위에서 쾌락에 허덕여 눈물 짓던 그 얼굴도.
아직은 놓아줄 수 없었다. 고작 늙은이들의 의식에 휘말려 그 얼굴이 깨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흐응…”
샬럿은 지긋이 알폰스를 바라봤다.
잠깐의 변덕인가, 아니면 본심인가. 그와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으나 지나치게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알폰스의 마음을 곧잘 알기란 어려웠다.
변덕이라면 여지껏 해왔던 것처럼 해오면 될뿐이지만, 만일 저 마음이 계속되는 본심이라면…
‘조금, 질투가 나는 걸요.’
저 역시도 비올렛이 좋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재밌는 존재 라는 의미로 좋다는 것이지 진정 친애하는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 몸과 마음은 오로지 주인인 알폰스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역시도 그러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말했듯 알폰스는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인간이었으니까.
샬럿은 목을 잡힌 그대로 알폰스의 옆으로 다가가 붙었다.
“뭐냐.”
“주인님, 한 번 더 할래요?”
“얼마나 해야 만족을 하는 거냐, 넌…”
연회를 파하고 돌아와서 조금 전까지 쉬지 않고 몸을 섞었다. 창 밖으로는 동이 슬금 터오고 있었고 하루를 시작하는 날짐승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남녀였다면 이미 체력이 다해 골아 떨어지고도남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샬럿은 히죽 웃으며 축 처진 양물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곧 분기탱천하며 꼿꼿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래서, 싫어요?”
짐짓 도발하는 말에 알폰스는 피식 웃었다. 대답 대신 그녀를 침대 위로 쓰러뜨리며 다시 한 번 몸을 겹쳤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쾌락에 찬 신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
“와…”
파렐은 작게 입을 벌리며 드높은 성벽을 바라봤다. 이곳이 비젠의 중심이자 황제가 기거하는 도시.
황도 라우니안. 마침내 긴 마차 여행 끝에 도착했다.
"드디어도착했나?"
성벽을 보며 놀라는 파렐의 옆으로 말코가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황도에는 처음이냐?"
"평생을 고향에서 살았으니까요."
파렐의 고향은 힙킨스령 외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근처에 작은 호수와 숲을 끼고 있었고 사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50명이 안되는, 마을이라고도 말하기 부끄러운 곳이었다.
"이렇게 멋진 곳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뭐, 라우니안을 처음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표정을 지을테지."
"아저씨는 성문을 넘으면 어디로 갈 생각이세요?"
이레 동안의 마차여행에서 두 사람은 썩 친해졌다. 파렐은 순박한 시골청년이었고 말코는 재주 있는 이야기꾼이었다.
온갖 소문이나 전설 같은 것들을 재치있게 설명하며 이야기하는 말코에게 파렐은 금세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곧 서로 편하게 여기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나? 나는 지금 내릴 생각인데."
"네? 지금요?"
두 사람이 탄 마차는 검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줄은 길었으나 빠르게 줄어들었기에 머지 않아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말코는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잠깐 근처에서 볼 일이 있거든.”
“볼 일이라니…”
파렐은 주위를 둘러봤다. 검문을 기다리는 줄을 제외하고 허허벌판이었다. 잘 닦인 도로가 있었기는 했지만 딱히 뭔가 할 수 있어 보이는 건 없었다. 가감 없이 그런 시선을 보내니 말코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뭐, 자세히는 알려고 하지말고. 그보다 꼬맹이, 넌 어디가냐?”
“저요? 저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고민했다. 말코는 아직 자신이 용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부러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보니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었다.
파렐은 생각 끝에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저 사실은 용사에요.”
“욘석, 어른을 놀리면 못써.”
“아야!”
꿀밤을 맞은 파렐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너처럼 호리호리한 녀석이 어떻게 용사냐?
말코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진짠데…”
“꼬맹아.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다고 용사가 될 순 없어. 적어도 성검을가지고 있어야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이 성검인데요… 파렐이 중얼거렸으나 말코에게는 씨알도 안먹힐 소리였다.
“그리고 보아하니 모험가나 기사가 되고 싶은가 본데. 아서라, 그러다 죽는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나요 뭐.”
“짜식이 어른이 말하는데.”
또다시 꿀밤을 때리려는 제스쳐에 파렐이 화들짝 놀라며 이마를 가렸다.
“으휴, 이 귀여운 녀석.”
“아야야…”
말코는 이마를 때리는 대신 코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나도 당분간은 라우니안에 머무를 예정이니까 혹시나 날 만나 싶으면 천사의 관이라는 술집을 찾아와라.”
“으으…”
“대답.”
“알았어요…”
파렐은 시큰거리는 코를 매만지며 맹맹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코는 빙긋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헤집었다.
“또 만나자.”
그리고는 등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파렐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줄은 착실하게 줄어들었다. 어느새 파렐이 탄 마차를 검문할 때가 되자 병사들이 다가와 말했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을 보여주십시오.”
“아, 네!”
파렐은 배낭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들었다. 하나는 편지였고 하나는 나무패였다. 나무패는 모험가들이 쓰는 신분패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편지는 왜? 병사들 사이에 그런 의문이 퍼질 때 검문을 하는 병사가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잠시 뒤.
“이, 이건…!”
받아든 병사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나무패는 예상대로 평범했다. 힙킨스 남작이 신분을 증명하는 자 라는 내용의 문구가 적혀 있는 신분패였다. 하지만 편지가 문제였다. 정확히는 편지를 밀봉하는데 쓰인 증표가 그랬다.
두 쌍의 날개가 검을 감싸는 문양. 제국에서 오직 황가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양이었다. 이것이 가짜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국에서 감히 황가를 사칭한다는 것은 일가친척이 아니라 그 도시가 지워지는 지독하게 무거운 죄였으니까.
"길을 열어드려라!"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단숨에 황가의 귀빈이라는 것을 깨달은 문지기들이 파렐을 곧바로 황궁 인근의 경비대로 인계했다. 거기서 또다시 확인을 마치고 난리를 피우고 나니 어느새 황궁 안이었다.
파렐은 얼떨떨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성문 쪽에 있었는데 정신 차리니 알현실이었다.
알현실에는 화려한 정복을 입고 있는 남자와 사제복을 입은 여인이 있었다. 파렐이 멍청하게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사제복을 입은 여인, 신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어전입니다. 예를 갖춰주십시오."
"됐네. 용사는 평민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에게 귀족의 예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겠지."
"허나."
"이 문제는 더 이상 꺼내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신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파렐을 찌릿 노려봤다. 이상한 짓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것을 읽지는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파렐은 저절로 몸가짐을 바로했다. 그제야 노려보는 눈빛이 조금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대가 용사로군."
"네, 넷! 파렐이라고 합니다!"
긴장한 탓에 절로 높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파렐의 얼굴이 붉어지자 황태자는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긴장할 필요 없네. 딱히 그대를 위협할 생각은 없으니 말이지."
"..."
"우선 내 소개를 하도록 할까. 내 이름은 다르키안 라움 비젠. 편하게 다르키안 전하 라고 불러도 좋다네."
"전하!"
"여기 깐깐한 신관은 페이. 대모신 라움을 섬기는 대지교의 주교이자, 이번 대의 성녀로 선출된 사람이지. 그리고 자네와 함께 움직일 동료이기도 하고.”
“그렇군요… 네?”
처음 듣는 이야기에 파렐이 의문을 표할 때 두 사람은 또다시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어찌 황태자되신 몸으로 자신을 낮추려 하십니까!”
“용사잖나. 시조께서도 여신님이 선택하신 용사였는데 그와 내가 다를게 뭐가 있나?”
“다릅니다. 전혀 다릅니다. 전하께서는 다음 대 황제로서 제국을 이끌어나갈 태양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그 얘기는 귀에 박히도록 들은거니 듣고 싶지 않아.”
"또 그렇게 피하시고…"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홱 하고 시선이 모여들었다. 파렐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신관님께서…"
"신관이 아니라 성녀라네."
"...예, 성녀님께서 제 동료라고 하셨는데 맞습니까?"
"예, 불행히도 그렇군요."
"부, 불행…"
과격하기까지한 단어선택에 파렐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페이, 불행이라니 심하지 않은가."
"심하지 않습니다. 당초 제가 어째서 성녀로 뽑혔는지 모를 일입니다. 저보다 나은 이들이 많은데 어찌."
"아, 그건 내가 그리하라 했네. 자네가 자꾸 잔소리를 하니 통 마음대로 할 수가 없…"
"전하!"
"농담일세 농담. 귀 안먹었으니 소리지르지 말고. 애초에 주교 회의에 내가 어찌 관여할 수있겠나?"
아무리 황제라고 할지라도 대지교의 방침을 건들 수 없었다. 최초의 용사이자 초대 황제가 여신을 존경하는 의미로 세운 법칙이었다.
다르키안은 귀를 막은 손을 내리며 페이에게 말했다.
"이참에 세상 구경도 하고 그러게. 평생을 라우니안과 수녀원에서 살아왔잖나."
"주교가 되기 위한 과정 중에는 순례 과정 역시 있습니다 전하."
정말 한마디를 안지려고 하는군. 다르키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더 이상 토달지 말아. 페이, 정녕 자네가 날 위한다면 이미 결정된 사안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아야겠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파렐, 용사여."
"네, 넵!"
갑작스러운 호명에 파렐이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답했다. 페이라는 성녀와 말다툼을 할 때 가벼운 목소리는 사라지고 황태자 다운 진중하고 기품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용사가 나타났다는 건, 먼 옛날에도 그랬듯 마왕이 나타났다는 뜻이지. 비록 지금 당장은 이렇다할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지만, 머지 않아 위협이 다가올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허나. 다르키안은 파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대는 약하다. 그 몸은 분명 검을 잡아본 적도, 몬스터를 죽여본 적도 없을 테지."
"...맞습니다."
"이대로 마왕이 나타난다면 반드시 패배하고 말것이다."
확신하듯 단호한 목소리. 하지만 파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한 대로 자신은 몬스터를 사냥하기는 커녕 그 흔한 싸움도 해본적이 없었다.
검을모르는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파렐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던 다르키안은 곧 옅게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제국은 먼 옛날, 최초의 용사이자 초대 황제께서 그러셨듯 마왕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을테니."
그것이 용사의 후손으로써 후대의 용사에게 해야할 당연한 도리일터.
다르키안의 말에 파렐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한 쪽 무릎을 꿇으며 부복했다. 누군가 시켜서가 아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존경과 경외심으로 행한 일이었다.
"반드시 마왕을 처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딱딱하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대도."
쯧. 다르키안은 짧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언제 근엄하게 이야기 했냐는듯 가벼운 어투였다.
"하여간 무슨 말만 하면 다들 무릎을 꿇는군."
페이는 입이 간지러웠으나 곧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황태자 전하의 인품에 감명을 받아 그런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게 분명했다.
다르키안은 두어번 박수를 치며 말했다.
"뭐, 어쨌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내 그대를 위해 연회라도열어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평민인 그대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겠지."
"그러니 모두를 대신하여 말하겠네."
"용사 파렐. 제국의 심장, 라우니안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