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6화입니다.
비올렛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니 이릴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기뻐. 그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니까.”
“윽…”
“후후, 또 얼굴이 빨개졌어.”
“굳이 말해주지않아도 알고 있어…”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돌리며 비올렛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말을 내뱉었는지 자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욕실에서 뛰쳐나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보니까 영진은 부끄럼을 많이 타는 구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말야.”
“누가 부끄럼을 많이 탄다는 거야?”
투덜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발만 넣고 있던 욕조에 천천히 몸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식은 몸을 따뜻하게 감싸오는 온기와 별개로 으슬거리는 냉기가 가슴 속에서 피어올라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무리 물에 대한 공포심을 이겨내려 해도 이 감각 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비올렛은 시린 한숨을 내뱉으며 심호흡했다. 반복할 때마다 전신으로 퍼져가던 냉기가 사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이름 모를 강의 차가움을 닮은 냉기는 여전히 가슴 속에 잔재해서 심장을 차갑게 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정도만 하더라도 어딘가 싶었다.
적어도 도중에 못참고 욕실을 뛰쳐나가지는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기대고 있으니 슬쩍 손을잡아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욕실에는 자신과 이릴 뿐이었으니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비올렛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왜?”
“어쩐지 많이 지쳐 보여서.”
“지친 건 모르겠지만, 조금 피곤하긴 하네.”
“그걸 지쳤다고 하는 거야.”
“그런가?”
“그래, 바보야.”
“바보라니, 아까부터 말이 심하네.”
그런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다 어느 순간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조용해졌다. 가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제외한다면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눈까지 감고 있으니 묘한 부유감이 느껴졌다. 잡고 있는 손의 감촉이 아니었다면 꿈 속을 거닐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편안한 기분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을까, 이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
"옛날 생각?"
"예전에 내가 사생아라고 했었지? 난 처음부터 아버지의 집에서 살고 있지 않았어. 원래는 어머니와 함께 숲에서 살고 있었지."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자신이 외도로 태어난 사생아라고만 했었기 때문에 운좋게 거둬져서 자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와 함께 살았었다니. 그렇다면…
"맞아.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알 수 없는 병으로 돌아가셨어."
그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이릴이 말했다.
비올렛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담담히 말하는 소중한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제야 그 마차 안에서 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던 이릴이 이해되었다. 어떤 말로도, 어떤 표정으로도 위로할 수 없기에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
물 속에서 맞잡은 손을 굳게 잡았다. 이릴 역시 부드럽게 손을 잡아왔다.
"이미 지난 일인걸. 가끔 생각나서 슬플 때도 있지만, 지금은 괜찮아."
"…"
"참, 이런 슬픈 분위기를 만들려던게 아니었는데."
실패했네 라며 작게 미소를 짓는 모습이 슬퍼보였다. 비올렛은 그녀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움직여 어깨를 붙였다.
그때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이릴 역시도 깨달았는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위로를 해주는 거야?"
“이번에는 울지 않았으면 하니까.”
울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플 것이었다.
“고마워. 하지만 위로를 해주고 싶다면 이렇게.”
어깨를 맞대고 있던것이 돌려져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뭘 하려는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전신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특히나 가슴 쪽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말캉하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꼭 안아주는게 더 도움이 된다는 걸 기억해줘.”
이릴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비올렛은 어버버거리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안겨오는 것을예상 못한것도 있지만,설마하니 이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포옹을 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알몸으로 누군가와 포옹하는건 처음이라 나도 조금 부끄럽네.”
“해놓고 부끄럽다고 하는 거냐?!”
“그래도 영진의 몸,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꽤 기분 좋은걸?”
당황한 비올렛이 빽 소리를 내질렀지만, 이릴은 후후 웃으며 대답했다. 이쪽도 별 다를 바 없는 감상이기는 했으나 부끄러움에 또다시 얼굴에 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근데 생각보다 가슴이 작… 읍.”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는다.
“몸에 대한 얘기는 금지야.”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이 이내 초승달처럼 휘며 눈웃음 지었다. 왠지 불안했으나 비올렛은 막았던 손을 내렸다.
“영진, 또 얼굴이 빨개졌어.”
“이게 누구 때문인데… 그리고 이번엔 너도 조금 빨갛거든?”
그녀도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자각하고는 있는지 새하얀 얼굴이 붉었다. 하지만 이릴은 도리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싫어?”
“어?”
“나랑 포옹하고 있는게 싫으면, 어쩔 수 없지.”
껴안고 있던 팔이 느릿하게 풀었다. 척 봐도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말이 분명 했지만, 비올렛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아니, 싫은건 아닌데…”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릴과 포옹하는 것이 싫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알폰스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기에는 비올렛이 솔직하지 못했다. 게다가 왠지 부끄러운 말을 하는 것 같아서 꺼려지기도 하고.
“그럼 나도 안아줘.나만 안아주는건 불공평하니까.”
“아, 안아달라고?”
비올렛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릴을 바라봤다. 하지만 푸름을 머금은 두 눈동자에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처럼 확고한 의지가 엿보였다.
하는 수 없이 비올렛은 조심스럽게 팔을 올려 그녀의 허리쯤을 안았다.
“이렇게?”
“좀 더 강하게.”
가슴팍에서 뭉개지는 신체 부위의 감각에 절로 귀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녀의 말대로 좀 더 강하게 껴안았다.
한참을 말없이 그러고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쿵쿵 울려퍼졌고 부끄러움은 언제 있었냐는듯 가라앉아 고요했다.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포옹하고 있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아주 먼 옛날에는 그랬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직 부모님이 살아있었을 적에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느릿하지만 애정이 섞인 쓰다듬이었다. 비올렛은 이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치유되는 기분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하지만 도리어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위로를 해준답시고 했던 거였는데 정작 자신이 위로를 받고 있는 꼴이라니.
"바보 같아."
"뭐가?"
"분명 내가 위로를 해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받고만 있잖아."
"괜찮아. 충분히 위로가 되고 있는 중이니까."
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나는 이릴이 없으면 안될 것 같아. 비올렛은 그렇게 생각하며 좀 더 강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물 속에 들어오며 몸을 잠식하던 냉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곧 다른 것이 차올랐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뜨거운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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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쉬운 얼굴로 떨어지자 이릴이 작게 웃으며 코를 손가락으로 툭 건들였다.
“부끄러워할 땐 언제고 떨어지려니 아쉬워?”
“...내가 언제 그랬다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가슴이 절로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비올렛이 미인이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평소에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거나 사나운 미소를 짓는 통에 그것이 조금 가려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풀어진 얼굴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서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껴안고 싶어지는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새하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역시, 동생과는 달라.’
당연한 말이었으나 무척이나 낯선 기분이었다. 여지껏 그녀를 자신의 동생처럼 여겼는데, 이 감정은 분명 동생에게 향하는 것과 같지 않았다.
친애를 넘어선 그 이상의 것. 하지만 이릴은 그 감정의 이름을 되뇌이지 않았다.
앞으로 비올렛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사흘 남짓한 시간 뿐이었다. 그 사흘의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알에리 저택에서 떠나고 자신 홀로 이곳에 남겨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언제 또다시 비올렛과 만날 수 있을지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될 것이었다.
이릴은 그것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비올렛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게 된다면, 그 시간을 참을 수 없을 것이었다. 때로는 슬퍼서 눈물을 지을 것이고, 때로는 그리움에 사무쳐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도 있었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이릴은 자신이 꽤나 애정을 갈구하는 면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감정은 묻어두도록하자.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하자.
지금 이 순간을 웃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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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끝내고 나오니 창밖으로 어스름한 하늘이 비쳤다.금방이라도 동이 트며 새벽이 밝아올 것만 같았다.
얇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비올렛은 쓰러지듯 침대 위로 엎어졌다. 목욕을 끝낸 탓일까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잠들어 버릴 것처럼 졸음이 몰려왔다.
“벌써 자려구?”
침대가 작게 출렁이며 이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당연히 금방 잠들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연회장에서 쌓인 피로가 눈꺼풀을 짓눌렀다.
비올렛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키다 다시금 풀썩 쓰러졌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부스럭거리며곁에 눕는 기척이 느껴졌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니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려 누운 이릴의 모습이 보였다.
“많이 피곤했나봐.”
“응…”
졸음 섞인 대답을 하다 문득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피로에 일조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찌릿 노려봤다.
“이릴 때문이잖아.”
“즐거웠지?”
“즐거웠기는 무슨.”
투덜거리며 대답하는 말에 이릴은 작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씻겨준다면서 몸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리는 통에 난리도 아니었다. 특히나 가슴 부분은 어찌나 만지작거리던지 하마터면 비명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올 뻔 했다.
음험한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노려보자사과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릴 앞에서 그런 목소리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귀는 싫다고 했는데…”
“미안해. 정말 한 번 만져보고 싶었거든.”
뚱한 얼굴로 이릴을 바라보자 사과해온다. 전혀 사과하는 사람의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이라고 할까, 내귀 만져볼래?”
“응?”
그 말에 절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를 바라봤다. 평범한 인간의 것과 비슷하지만 길쭉하고 뾰족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이릴은 비올렛의 손을 잡고는 제 귀가 있는 쪽으로 가져왔다.
“어때?”
“어떠냐니…”
비올렛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귀를 만졌다. 딱히 평범한 인간과 다른 느낌은 아니었다. 모양이 조금 다를 뿐 촉감은 비슷했다. 하지만 말랑거리는 느낌이 어쩐지 중독성이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쓰담으니 이릴이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응, 뭔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네. 예전에 그 아이가 만졌을 때랑은 다른 느낌이야.”
“그 아이라면, 네 동생?”
“응. 어릴적에는 신기하다면서 자주 만지고는 했었어.”
꽤 곤란했었지. 이릴은 아련한 눈빛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착한 아이였어. 갑자기 언니라고 나타난 사람을낯설어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겨주었지. 아마 그 애마저 날 배척했더라면 나는 그 집에서 오래 있지 못했을 거야.”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줄 아버지조차도 새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멀리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생마저 새어머니를 따라 자신을 미워했더라면 아마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숲으로 돌아갔을 것이었다.
그리고는 평생을 그곳에서 살고 있지 않았을까.
이릴은 멍하니 생각했다. 만약 그랬더라면 자신이 노예로 팔리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큰 빚을 지게 될 일도. 어쩌면 그랬어야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볼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릴은 눈을 깜빡이며 비올렛을 바라봤다.
“영진?”
“표정을 보니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아서."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걱정된다는 뜻이었다. 비올렛은 멍하니 자신을 보는 이릴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지난 일이야. 그때 그랬더라면, 하고 상상해봤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다. 비올렛 역시도 수도 없이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 날, 자신이 부모님께 억지를 부리며 출근을 하지 못하게 막았더라면. 체육관 관장이 그렇게 죽지 않게 막을 수만 있었더라면.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만약을 가정하는 것은 오히려 후회와 절망 속에서 자신을 죽이는 행위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는 잘못한게 없으니까.
“...맞아. 이미 지난 일을 되세겨봐야 의미 없는 일이겠지.”
이릴은 손을 겹치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 중요한 거니까. 그렇지?”
"과거에만 머물러 있으면, 분명 소중한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테니까."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부모님도, 관장도 자신이 주먹패 같은 삶을 살기 원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슬픔과 분노를 못이겨 제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했다. 결국 이런 몸이 되어 고통을 받았던걸 생각하면 더 이상 그런 짓은 하지 말라며 벌을 준 걸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사람…"
이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비올렛을 바라봤다. 비올렛은 그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원래도 가까이 붙어 있었지만,이제는 서로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놀라 크게 떠진 푸른 눈이 보였다. 볼 위에 겹친 손은 여전히 이어져 있었고 그 손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이 울려퍼졌다.
비올렛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에 날 보며 동생 같다고 했었지?"
오래 전, 마차에서 했었던 이야기다. 이릴은 자신을 보며 헤어진 동생을 연상된다고 했었다. 그 덕분이라고 할 지 비올렛은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패닉에 빠졌을 때도, 알지도 모르는 세계에 자신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낙원에서 간수들에게 험한 꼴을 당했을 때도. 모두 이릴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서 새로운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릴을 곁에 두고 싶다. 그녀가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싶다는 감정이 말이다.
알폰스 때문에 잠시 헤어졌었지만, 그렇기에 그 감정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제는 헤어지지 않겠노라고.
그러나 비올렛은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들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물었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해? 날 동생 같다고?"
태연한 척 말하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이릴은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럼?"
"영진은, 영진일 뿐이야."
누군가의 대신도, 누군가를 대신할 수도 없는 세상에서 단 한 명 뿐인 사람.
"그렇다면, 난 네게 어떤 존재야?"
"내…"
욱씬. 가슴 속에서 눌러두었던 감정이 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이릴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그것을 억눌렀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친구야."
친구, 인가. 비올렛은 어쩐지 괴로워보이는 이릴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쿵쿵 뛰며 절로 긴장이 되었다. 이런 말을 내뱉어도 되는 걸까. 어쩌면 그녀가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었다. 이릴은 자신을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니까.
분명. 그럴 것이었다.
"좋아해."
그 말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울려퍼졌다. 그러나 바로 코앞에 있는 이릴이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곧 그 말이 단순한 친애의 표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수하고 올곧은 고백. 하지만 받아줄 수 없어서 더없이 슬픈 말이었다.
이릴은 고개를 숙여 조용히 숨을 내쉬는 비올렛의 머리를 팔로 껴안았다.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들려고 하는 것을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
그녀의 좋아해와 다른 좋아해 였으나 그것만은 진심이었다. 이릴은 비올렛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정말로 좋아하고 있어."
비올렛은 그 말에 작게 미소지었다. 같은 단어였으나 그 의미는 서로 달랐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들 그녀가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비록 서로가 같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것만으로도 만족감이 차올랐다.
"응, 고마워."
나를 거부하지 않아주어서 고마워. 비올렛은 좀 더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감돌기 시작하는 와중에도 마음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