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55화입니다.
일렁이는 촛불이 간격을 두고 어두운 복도 위를 밝혔다. 처음 연회장으로 향했을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비올렛 일행이 연회 중간에 들어온 것도 있었지만, 연회의 폐막이 가까워지면서 휴식을 위해 방으로 돌아가는 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도를 걷는 도중에 마주치는 귀족은 없었다. 연회장에 왔을 때처럼 앞장 서 길을 안내하는 샬럿을 따라 걷던 비올렛은 흘끔 고개를 돌려 이릴을 바라봤다. 자신보다 한걸음 앞에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흐릿하게 옆모습만 보였다. 그랬기에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릴,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비올렛은 입술을 작게 열었다가 다물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팔을 잡고 있는 손이 보였다. 연회장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려던 자신을 말리면서 잡던 손. 연회장을 나와 복도를 걷는 순간까지도 놓지 않고 마치 저를 이끌고 가듯 계속해서 잡고 있었다.
세 사람은 대화 없이 복도를 지나 곧 머물고 있던 방에도착했다. 샬럿은 비올렛과 이릴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두 분 편안한 밤 보내시길.”
“고마워요. 샬럿도 좋은 밤 보내세요.”
대답 대신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으로 샬럿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은 삭막하게 느껴지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레니는 연회장으로 가기 전에 쉬어도 좋다고 돌려보냈었기 때문에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끼익,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이로써 완전히 두 사람만이 남았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비올렛은 이릴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이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한참동안 이어지는 적막에 비올렛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우선, 목욕이라도 할까?”
“목욕을?”
“땀도 많이 흘렸고, 화장도 지워야지.”
뜬끔 없는 소리에 비올렛이 의아했으나 그 말에 납득했다. 경황이 없어서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은 여전히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떠올리니 당장이라도 얼굴을 깔끔하게 만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거 잘 안지워지는 거라고 했었는데.”
“괜찮아. 샬럿이 잘 지울 수 있을 거라며 내게 준 게 있거든.”
색이 없는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흔들며 이릴이 말했다. 샬럿이 줬다는 말에 의심이 피어올랐으나 그런 짓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할까 싶었다. 비올렛은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부터 씻어. 난 네가 끝나면 들어갈 테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같이 들어가야지.”
“어? 그게 무슨, 잠깐 이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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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적으로 연결된 수도에서는 따뜻한 물이 쏟아지며 여럿이 들어가도 거뜬할 정도의 욕조를 채우고 있었다.
“하아…”
그리고 그 욕조에 걸터 앉은 비올렛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목욕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그 과정이 문제였다. 설마하니 그 자리에서 문답무용으로 사람을 벗길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이릴이 말이다.
‘심지어 능숙했다.’
비올렛이 입고 있는 옷은 보통 메이드 두 명이 달라 붙어서 입히는 드레스였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샬럿이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 조잘조잘 떠든 내용이었다. 그녀처럼 완벽한 메이드라면 혼자서도 거뜬히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쨌든 입기 어려운 옷은 벗기도 어려운 법이었지만, 이릴은 무슨 상관이냐는듯 아무렇지 않게 휙휙 벗겼다. 안에 겹쳐 입은 속옷까지 완전히 빼앗기고 욕실로 밀어넣어진 게 조금 전의 일이었다.
물론 정말로 싫었으면 힘으로 거부했으면 될 일이었다. 이릴처럼 연약한 사람은 한 손으로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만큼 서로 간의 차이가 명확했지만, 어떻게 자신이 그럴 수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릴에게 말이다.
결국 변변찮은 저항도 못해보고 욕실에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있으니 드르륵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올렛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피부가 여과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자신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절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물이 차오르는 욕조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얼굴을 뜨겁게 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릴. 조금은 가리는게 좋지 않을까…?”
비올렛은 더듬거리며 소심하게 말했다. 이릴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대욕탕에서도 봤으면서 이제와서 그러는 거야?”
“그때는 적어도 수건으로 가렸잖아…”
탈의실에서도 이릴의 몸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왠지 죄를 저지르는 기분이 들어서 수건으로 몸을 가릴 때까지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비올렛이 소심하게 대꾸를 하니 이릴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돌았다.
“알았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미안해.”
“자, 이제 돌아봐도 괜찮아.”
그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돌린다. 대욕탕에서 그랬듯이 긴 수건으로 상체에서 허벅지를 가리고 있는 모습. 그 모습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손을대지도 않았는데 이릴의 몸을 감싸던 수건이 스르륵 풀리더니 다시금 완전한 나신을 보였다.
“어…”
비올렛은 멍청한 소리를 내며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어서 미쳐 시선을 돌리거나 할 수 없었다. 새하얀 피부와 육감적인 신체가 가감 없이 시야를 가득 매웠다.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며 이릴을 바라봤다.
그녀는 악동처럼 웃으며 말했다.
“어머나, 풀려버렸네?”
“이, 이릴 네가 어떻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열이 가라앉았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앞이 핑핑 돌고 솟아오른 열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을 휘청거리며 당황하고 있으니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영진. 네가 그런 반응을 보여주니까 신기해서.”
언제나 사나운 웃음을 짓거나 짜증어린 표정을 짓던 그녀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있으니 장난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자였다는 말이 정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반응을 보면 영락 없이 사춘기의 남자와 다르지 않았다.
“널 믿었는데…”
숫제 배신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으나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은 귀엽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이릴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며 비올렛의 머리를 작게 쓰다듬었다.
“후후, 미안해.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이니까 어쩐지 참을 수 없어져서 말야.”
“하아…”
비올렛은 당황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마냥 착하고 상냥하기만 하지는 않다고 연회장에서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장난기가 넘칠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얼굴에 오른 열이 가라앉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욕조를 가득 채운 수도가 멋대로 닫혔다. 똑,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욕실 가득 울려퍼졌다.
머금고 있던 웃음도 얼굴을 붉게 만들던 부끄러움도 잠시 사그라들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욕조, 가득 찼네.”
“먼저 들어가. 나는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 테니까.”
“아냐, 들어가기 전에 할게 있거든.”
“할 거라니, 아.”
“맞아. 화장부터 지워야지?”
언제부터 들고 있었던 건지 예의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흔들었다. 비올렛은 손을 뻗어 그것을 가져가려 했지만, 금새 훅 멀어졌다.
비올렛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이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해줄게.”
“...마음대로 해.”
“후후.”
어차피 자신이 한다고 해도 넘겨주지 않을게 분명했다. 괜히 실랑이를 벌이는 것보다 그 편이 빠르기도 했고 말이다.
비올렛은 손을 내리고 이릴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화장을 지우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리병 속의 액체를 손에 묻히고 얼굴을 쓰다듬듯 훑어내니 금방 화장 하기 전의 모습이 드러났다. 물로 한 번 얼굴을 닦으니 화장의 잔재가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잠깐만.”
하지만 이릴은 계속해서 비올렛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말캉한 몰을 한 번 꼬집듯 해보기도 하고 입술 위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눈가를 쓸어내리니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퍽 가녀린 모습으로 보였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자신의 여동생과는 하나 닮은 곳이 없는 얼굴이었다. 이릴은 몇 번을 그렇게 하다 다시 한 번 물로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이제 됐어.”
“고마워.”
내친김에 자신의 화장도 말끔하게 지웠다. 확실히 보통 화장을 지우는데 쓰는 것보다 효과가 좋았다. 평소대로 하는 바람에 비올렛의 화장을 지울 때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해서 조금 의심 받았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들어갈까?”
비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릴은 몸을 돌려 욕조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벗은 채로 오래 바깥에 있었던 탓인지 식었던 몸에 온기가 감돌자 절로 들뜬 한숨이 터져나왔다. 가슴께까지 차오른 물에 눈을 감을며 잠시 온도를 즐겼다.
그러는 사이 작은 파동이 일며 욕조 안으로 들어오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릴은 깊게 감았던 눈을 뜨며 욕조 안으로 들어왔을 비올렛을 바라봤다.
“응?”
다 들어오지 않고 뚱한 얼굴로 발목 정도만을 담군 비올렛의 모습에 절로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다 안들어오고 그러고 있어?”
“뜨거워서.”
“뜨겁다니?”
이릴은 손으로 물을 퍼올리며 말했다. 아주 뜨겁지도 않고 너무 미지근하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였다. 하지만 비올렛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한테는 조금 뜨거워. 그러니까 익숙해지면 들어갈게.”
“온도를 조금 낮출까?”
“됐어. 괜히 나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어.”
손사례를 치며 사양했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물 온도는 적당한 수준이었다. 기분 좋게 목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놈의 물 공포증이 문제였다. 물을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전신을 물 속에 넣는 행위는 조금 각오를 한 다음에 들어가야 했다.
턱을 괸 채로 그러고 있으니 한 쪽에서 기대고 있던 이릴이 슬금슬금 근처에 다가와 앉았다. 비올렛은 그녀를 흘끔 바라보고는 다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할 얘기란게 뭐야?”
“응? 아, 그거…”
이릴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회장에서 남작과 이야기 했을 때 말야.”
“...응.”
비올렛은 곧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알폰스가 자신과 이릴을 보고 사이가 각별해 보인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때를 다시 떠올리니 절로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어쩐지 이릴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겁게 했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건 너를 소중히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어."
"그정도는 알고 있어."
이릴이 정말로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주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도 그녀에게 집착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애초에 그 모든 행동이 위선이었더라면 그녀를 데리고 탈출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 혼자 몸을 뺄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수고스러운 짓을 왜 한단 말인가.
그러나 여태까지의 이릴이 제게 해준 것들은 틀림없이 진심에서 우러 나온 것이었다. 어줍잖은 연기가 아니라.
하지만.
"...확신이 없었을 뿐이야."
"확신…"
"너를 생각하는 내 감정과 나를 생각하는 네 감정이 같은지 알 수 없어서."
이런 말조차도 여태껏 이릴에게 받아온 호의를 부정하는 것만 같아 내뱉고 싶지 않았으나, 어쩐지 지금은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두려웠어. 이릴, 네가… 언젠가 날 떠날 것 같아서."
잠시동안 이별하는 것은 상관 없었다. 결국 자신이 다시 만나러가면 될 뿐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떠나간다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플 것이었다.
비올렛이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볼을 약하게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이릴을 바라보니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바보.”
“바버라니…”
볼을 잡아당겨지는 탓에 어눌한 발음이 흘러나왔으나 그녀는 여전히 볼을 잡은 상태로 말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덜컥 겁부터 먹는게 바보지 뭐야 그럼.”
“끙…”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