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54화입니다.
적막 속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이릴이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알폰스의 품 안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비올렛을 확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뭐하냐니, 사랑하는 약혼자에게 입을 맞추는게 이상합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어쩜 그렇게 뻔뻔하신건지…!”
이릴은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비올렛을 바라봤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얼굴이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보다도 빨갛게 변해있었다.
“괜찮아?”
“으, 응…”
“정말 믿을 수 없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이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분통을 토해냈다. 아무리 약혼자 사이를 연기하고 있다지만이건 명백히 무례하고 파렴치한 행위였다. 설사 정말로 약혼자 사이라고 하더라도 방금 전 행위는 틀림 없이 선을 넘은 것이었다.
상대의 기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하다니! 한 번 쏘아붙인 다음인데도 여전히 분이 가라앉지 않은 이릴이 쌍심지를 켜며 알폰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내뱉기 전에 몸을들이민 사람이 있었다.
“레아 와이즈! 네년이 기어코 나를 망신시키는구나!”
“배, 백부님… 아!”
“따라와라! 더 이상 여기에 있을 낯이 없구나!”
헤비어트 백작이 얼굴을 붉히며 성큼성큼 다가와 굳어 있던 레아의 팔을 잡아챘다. 알 수 없는 힘에 붙들려 있었던 그녀였으나 백작의 손길에 언제 그랬냐는듯 몸이휘청거렸다.
그대로 레아를 끌고 군중 속으로 사라지려던 그는 잊고 있었다는 듯 몸을 돌려 알폰스를 바라봤다.
“메르씨엘 남작, 미안하네. 내 질녀의 무례를 용서하라고는 하지 않겠네. 하지만 내 분명 이번 일에 대한 사과는 확실히 함세.”
“괜찮습니다. 헤비어트 백작님. 누구나 한 번은 실수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어느새 다가온 알에리 후작에게도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송구합니다. 후작 각하.”
“괜찮네. 와이즈 내외에게도 너무 나무라하지 말게. 자식 키우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작게 목례를 한 백작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레아 역시도 창백한 낯으로 고개를 숙이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한 차례 소동이 있었던 탓일까, 악단 역시도 눈치를 살피며 연주를멈춘 상태였다. 음악이 멈추자 활기가 가득했던 연회장 위로 무거운 공기가 눌러 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들 역시도 서로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눌 뿐 누구 하나 먼저 나서지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연회는 물론이고 앞으로 남은 일정 역시도 파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파벌의 중진 중 한 명인 헤비어트 백작이 불미스러운 일로 자택으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알에리 후작은 두어번 짧게 박수를 치고는 악단을 향해 말했다.
“자, 연회에 음악이 끊기면 쓰나. 이번엔 조금 경쾌한 곡으로 연주해주게.”
명령을 받은 지휘자가 눈치껏 지휘하기 시작했다. 연회장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날려버리듯 통통 튀는 음색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후작은 음악이연주되는 것을 들으며 사람들을 바라봤다.
“잠깐 소란이 있었지만, 연회는 멈추지 않으니 모두 마지막까지 즐기다 가시오.”
그렇게 말했으나 곧바로 분위기가 살아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삼삼오오 흩어져 소란이 일어나기 전처럼 행동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파벌의 중심인 알에리 후작의 말이다. 설령 그런 분위기가 되지는 않더라도 따라야하는법이었다.
전처럼 활기찬 연회가 아니게 되었으나 알에리는 그것으로 족했다. 말이 새어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흩어지는 군중을 보던 그는 몸을 돌려 알폰스를 바라봤다.
“남작, 이번에는 지나쳤어.”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자네가 아니었다면 연회에서 퇴출되는 것은 와이즈 양 뿐만이 아니었을 걸세.”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확실히레아가 소란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제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소란을 키운 셈이었으니.
“면목이없습니다.”
“됐네. 다음에는 조심하도록 하게.”
알폰스는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알에리 후작은 털어내듯 손짓하며 등을 돌려 떠나갔다. 한동안 고개를숙이고 있던 알폰스는 인기척이 멀어졌을 때서야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 한 점 없는 표정으로 멀어지는 등을 바라봤다.
면목이 없어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후작이 말한 것은 알폰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샬럿과 계약한 인간이 아니었더라면마찬가지로 연회에서 쫓겨나는 입장이 되었을 것이었다.
‘딱히 상관 없는 일이지만.’
알에리의 눈에서 멀어진다고 한들 그의 작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공들인 시간이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 뿐.
“혼나셨네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언제 다가온 것인지 샬럿이 소곤거리며 말했다. 재미있는 구경을 했다는 것처럼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알폰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히죽거리며 웃는 샬럿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악! 왜 때려욧!”
“주인이 질책당하는데 웃고 있는 종자가 어딨냐.”
“아으으…”
쭈구려앉아 이마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는 샬럿을 두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알폰스가 알에리 후작과 이야기 하는 사이 이릴과 비올렛은 빈 테이블을 하나 차지해서 앉아 있었다.소동이 있었던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주위를 살폈다. 알에리 후작의 명령대로 연회를 즐기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어디 그런다고 있었던 소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내용 역시도 보통의 것이 아니었으니 몰려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흘끔거리며 시선을 줄 뿐 다가와서 묻는 이들은 없었다. 물론 조금 시간이 지나고 다시 연회의 분위기가 살아나면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몰려와 물음을 던질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적막을 즐기는 것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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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로 다가온 인기척에 대화가 끊겼다. 대화를 방해한 당사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던 이야기들 마저나누시지요.”
이릴은 뚱한 얼굴로 알폰스를 바라봤다.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앉는 순간부터 알폰스가 다가오기 전까지 했던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의 험담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비올렛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하니 그 이릴이 알폰스를 헐뜯는 말을 할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마냥 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나보다. 물론 그렇다고 갑자기 그녀가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좀 더 좋아졌다고 해야할까. 다르게 생각하면 자신에게 상냥한 것이 천부적인 성격 때문은 아니라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이릴이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던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었다.
비올렛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이릴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할 이야기는 모두 끝났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거 잘됐군요. 저도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니 말입니다.”
“그다지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릴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한들 알폰스가 들을 리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착석하는 알폰스를 보며 이릴이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죠?”
알폰스에게 공개적으로 치욕을 당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을 겪은 비올렛이다. 그런 일을 겪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 하라는 것은 숫제 고문과 다를 게 없었다.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면 차라리 자신이 하는 게 나았다 이릴의 말에 잠시 말없이 두 사람을 보던 알폰스는 턱을 괴며 나른하게 말했다.
“일리시아 양은 비올렛을 무척이나 아끼는 것 같군요. 마치 가족처럼 말입니다.”
“그야 당연하죠. 그녀는 저의…”
거기까지 말하던 이릴의 목소리가 멈췄다.
“이릴?”
비올렛의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으나 이릴은 가만히 생각했다.
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이기심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비올렛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투영해서 대리만족을 한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더 이상 자신은 집으로 돌아가지도, 동생을 만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비올렛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으나 이릴도갑작스럽게 시작된 노예 생활에 심적으로 몰린 상태였다. 당연한 말인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한 귀족가의 여식으로 살던 몸이었다. 단숨에 밑바닥으로처박혔는데 멀쩡한 것이 이상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비올렛에게 의지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이릴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렇다면 이 관계를 나는 뭐라고 불러야하는 걸까.’
고민이 길어질수록, 대답이 늦어질수록 비올렛은 미약한 불안을 느꼈다.
‘왜..?’
자신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곳에서 얻은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사람. 그 대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릴은 꽤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있었다.조금 전까지 그녀와대화하며 풀어졌던 기분이 다시금 안좋아지는 것 같았다.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비올렛의 표정을 보며 알폰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답이 곤란한 질문이었습니까?"
그 말에 생각에 빠져 있던 이릴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전혀요. 비올렛은 저와 절친한 사이인걸요. 그저, 생각할 것이 있어서…"
말끝을 흐리다 비올렛과 시선이 마주쳤다. 불안을 품은 자주빛 눈동자가 아래로 내리깔더니 슬그머니 피한다. 테이블 아래로 꽉 깍지낀 손이 그녀의 심정이 어떤지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이릴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건지 깨달았다. 비올렛이 바로 옆에 있는데 이런 질문을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영진, 그런 게 아냐. 난…"
"괜찮아. 이릴."
비올렛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정말로 괜찮으니까.”
‘전혀 괜찮지 않아!’
이릴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비올렛은 크게 상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울적한 기운을 마구잡이로 뿌리고 있었다.
쩔쩔매며 비올렛을 바라보다 홱 고개를 돌려 알폰스를 노려봤다.
‘왜 쓸데없는 걸 물어선!’
“왜 저를 노려보시는 겁니까?”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말하지만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솔직히, 이런 것을 노리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호기심 어린 질문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종족도 다르고 출신도 달라 보이는데도 꽤나 각별해 보였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혹시나 뭔가 특별한게 있을까 싶어서.
‘곧바로 내뱉지 못한 걸 보면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있어도 분명 제게는 알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절친한 사이라고 하니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군요.”
“또 뭔가요.”
이릴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어서 오해를 풀어야했는데 그러기에는 방해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물론 제일 방해되는 것은 두말 없이 알폰스였다.
“일리시아 양은 비올렛을 영진이라고 부르는데 어째서 그렇게 부르는 겁니까?”
내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 있는데 말이지.
같은 테이블에 있는 사람 정도가 들을 수 있을 법한 작은 목소리에 이릴이 비올렛을 바라봤다. 그녀의 원래 이름이 영진인것은 현재로서는 이릴 밖에 없었다. 알폰스도 모른다고 하면 아마도 확실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릴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비올렛이 자신을 영진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을 때부터 이미 이런 상황은 예견된 것이었지만, 그것을 자신이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건 오직 비올렛이 말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비올렛은 그 말에 입꼬리를올리며 말했다.
“네 녀석이 그런걸 궁금해 할 줄은 생각도못했는데 말야.”
“약혼자라면 응당 가질 의문이니 말입니다.”
여전히 약혼자 역할을 계속해야한다는 의미였다. 귀족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다. 연회장을 누비며 귀족을보필하는 시종들이 그것들이었다. 즉 조심해서 이야기 하더라도 발코니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다.
소란을 피우면서까지 제게 달라붙는 것들을 차단했는데 그것이 거짓이라는게 밝혀진다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게 될 것이었다.
물론 알폰스에게나 그럴 것이었고 비올렛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였다. 그녀의 머리속에는 어째서 이릴이 곧바로 말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질문이나 받는 것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그 질문을 한 당사자가 제 이름을 멋대로 바꿔버린 놈이라니.
비올렛은 미소를 띈 얼굴로 말했다.
“내 이름이야. 누가 억지로 붙인 비올렛 따위가 아니라 우리 부모님이 직접 지어주신 이름.”
꽃 영에 나아갈 진을 써서 영진. 아마도 부모님께서는 자식이 순탄한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며 지었을 것이었다. 비록 이름처럼 되지는 못했지만. 비올렛은 그렇게 생각하며 실실 웃었다.
오래 전, 알폰스가 제 이름을 멋대로 바꾸려고 했을 때 했었어야 했던 말이었다. 이제라도 한 게 어딜까. 답답한 속이 조금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비올렛.”
“귀먹었어? 내 이름은 영진이라고. 그딴 듣도 보도 못한 꽃의 이름이 아니라.”
알폰스가 경고의 의미로 그녀를 불렀으나 이미 감정에 몸을 맡긴 비올렛에게는 소용 없는 것이었다.
“네가 그 이름으로 날 부를 때마다 떠올라. 그 날, 강이 흐르는초원 위에서 내 목을 조르며 강… 읍!”
등 뒤에서 나타난 손이 그녀의 입을 부드럽게 막았다. 비올렛이 그것을 뿌리치려 손을 들어올렸으나 하려던 것을 하지 못하고 허공을 방황했다.
몰려오는 졸음에 이기지 못한 사람처럼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릴은 작게 입을 벌리며 뒤에서 나타난 샬럿을 바라봤다.
“...어떻게 한 거죠?”
“유능한 메이드에게는 작은 비밀이 있는 법이죠.”
요컨대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장난스럽게 쉿하고 검지로 입술을 가리는 모습은 메이드가 아니라 악동같았지만 말이다. 이릴은 잠든 비올렛을 살폈다.
다행히 특별히 이상이 있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정말로 잠에 든 것 뿐이었다.
“샬럿, 이게 무슨 짓이냐?”
“제가 괜한 짓을 한 건가요? 왠지 제 도움이 필요해 보였는데 말이죠.”
“쓸데없는 참견이다. 메이드라고 자청하길 바란다면 주인인 내 말을 따라.”
“네~”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쪼르르 다가와 알폰스의 뒤에 시립한다. 그 모습을 보며 알폰스는 답지 않게 한숨을 내뱉었다.
알에리 후작이 연회의 계속을 말했지만, 전일보다 일찍 파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경쾌한 댄스곡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홀에서 춤을 추고 있는 커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다른 이들 역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적당히 폐막까지 비올렛을 건들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연회장에 있는 동안에는 연기를 멈출 수 없으니 과격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콱 인상을 찌푸리며 캉캉거리는 꼴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비올렛은 모르겠지만 그상태의 그녀는 꽤나 놀리기 좋은 놀잇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름, 이름인가.’
영진. 입 속으로 비올렛의 원래 이름이라는 단어를 굴려본다. 발음하기 어색한 것을 보니 제국에서 쓸 법한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올렛은 마물이다.’
그런 그녀에게 원래 이름이라는 것이 있다는게 말이 되지 않았다.
알폰스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애초에 내가 왜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지?’
어차피 비올렛은 제 것이었다. 그녀를 뭐라고 부르던 제 마음이었다. 아무리 격렬하게 그 이름을 거부하더라도 말이다. 이전에 이름이 어쨌던, 비올렛은 비올렛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정했으니까.
어쩐지 답답한 가슴에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깨워.”
샬럿은 되묻는 대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으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비올렛이 움찔 몸을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륵 고개를 들어 멍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막 잠에서 깨어난 탓인지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연회장과 이릴, 그리고 알폰스와 샬럿을 한 번 훑어본 비올렛은 그제야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멍하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알폰스를 노려봤다. 이곳에서 제게 허튼짓을 할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재웠을 뿐이다. 다른 짓은 하지 않았어.”
알폰스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째서 이런 변명 같은 말을 자신이 내뱉고 있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라. 샬럿이 안내해 줄거다.”
“너…!”
또다시 흥분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를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비올렛은고개를 돌려 이릴을 바라봤다.
“영진, 오늘은 돌아가자.”
“이릴…”
비올렛은 작게 입술을 깨물더니 시선을 피했다. 하기사 잠깐 잠들었어도 이전의 기억까지 없어지는건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오해는 빠르게 푸는 것이 좋았다.
이릴은 다른 손으로 비올렛의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
“영진, 날 봐.”
“...”
“너와 이야기할 것이 있어. 단 둘이서.”
비올렛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 그녀와 있고 싶지는 않았다. 이릴에게 실망하거나 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만약 단 둘이 있게 된다면 어째서 머뭇거렸는지 따지듯 묻게 될 것 같아서 그런 것이었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추할 것이 분명해서 이릴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볼에 닿는 온기와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참동안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을 하지 않던 비올렛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