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53화입니다. (53/75)



〈 53화 〉53화입니다.

약간의 말다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공기가 차가워졌던 몸을 감싸왔다.

그리고 수많은 시선들 역시도. 비올렛은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다들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착각이 아니다. 확실히 우리를 보고 있는 거겠지.”

다들 몸이 이곳을 향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흘긋거리며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느껴졌다.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몸짓들도 그랬다. 틀림없이 저희를 화제 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해할  없는 행동들이었다. 딱히 눈에 띄는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말했잖나. 발코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라고.”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간단하게 생각해라. 남자와 여자가  둘이서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이게 뭐를 뜻하는 거겠나?”

“...”

비올렛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없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연회장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알폰스를 두고 발코니에서 섹스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란 말을 어떻게 입으로 내뱉을 수 있겠냐 말이다.

가슴 속에서 수치심이 솟꾸치며 머리를 강타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마음 같아서는 헛소리들 그만하라고 난동을 피우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이미 알폰스와 연회장 내에서 만큼은 약혼자 연기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물론 죽을 만큼 하기 싫지만, 이미 하겠다고 한 이상 무를  없는 법이다. 만약 자신이 그렇게 한다면 훗날 알폰스 역시도 자신과 한 내기를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러나 저러나 자신은 알폰스에게 목숨줄이 잡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뭘 그리 부끄러워 하고 있는 건가, 어차피 틀린 말도 아닌데.”

“닥쳐…”

비올렛은  손으로 눈을 덮으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알폰스의 옷을 잡아당겨 앞장 세우고는 말했다.

“저것들이 날 보지 못하게 해.”

“이것 참, 노예가주인에게 명령하는 모습이라니. 사람들이 보면 놀라겠어.”

“지금은 노예가 아니라 약혼자니까 상관 없겠네.”

그리고는 젭싸게 그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알폰스는 그 모습이 오히려 사람들을 더 자극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숨어서 걷고 있는 비올렛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앞장 서서 걷고 있는 그에게는 많은 것들이 보였다.

가령 친교를 나눈 어느 귀부인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쏘아보내는 것이나 한 무리의 소녀들이 큰 눈망울을 울망울망하며 손수건을 물어 뜯고 있는 모습, 그리고 알에리 후작과 함께 있는 늙은 귀족들이 또 무슨 기행을 벌이고 있냐는 듯한 시선들이 말이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제 뒤에 숨어 있는 소녀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의문어린 시선이었으나 알폰스는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고 미소를 띄우며 이릴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는 누군가와 합석해 있었는데알폰스도 아는 얼굴이었다. 연회장에서 불과 몇 시간 전에 통성명을 나눴던 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 역시도 충격을 받은 표정인것은 다른 어린 영애들과도 다르지 않았다. 당장 테이블 가까이 다가왔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영진!"

성가시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이릴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녀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빠르게 걸어 알폰스의 뒤로 향했다.

고개를 숙여 알폰스의 발을 쫓고 있었던 비올렛이었기에 갑작스레 들려온 이릴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릴?"

"괜찮아? 이상한 짓은 당하지 않았고?"

"이상한 짓이라니. 말씀이 너무 심하시군요, 이릴 양."

"일리시아라고 불러주시겠어요, 메르씨엘 남작님?"

비올렛과는 상반되게 차가운 목소리로 답하는 이릴의 모습에 알폰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리시아 양. 저는 단지 제 약혼자의 상태를 염려한 것 뿐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장시간…"

"메, 메르씨엘 남작님!"

갑작스레 난입하는 목소리에 이릴의 얼굴이찌푸려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합석하고 있던 레아 와이즈였다.

"이게 무슨 행동이죠, 와이즈 양? 대화 도중에 끼어드는 행동은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로 급한 일이 아니면 이유가  수 없어요. 하지만 제 눈에 와이즈 양의 용건이 급하다고 볼 수 없는데,  생각이 맞나요?"

이릴의 날선 질책과 매서운 눈빛에 레아는 몸을 흠칫 떨었다. 유순한 인상 탓에 저도 모르게 낮잡아 보고 있던 그녀로서는 이릴의 말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일리시아 양.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저보다는 남작님께 사과를 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괜찮습니다. 저 역시 사과를 받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알폰스의 온화한 말씨에 레아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말을 건게 아니었는데 저 일리시아라는 듣도 보도 못한 가문의 영애 때문에 수치를 당하다니 억울하기 그지 없었다.

레아는 이릴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흘겨봤다. 그녀는 언제 제게 질책을 미소를 띄운 얼굴로 알폰스의 뒤를 따라오던 수인족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게는 차갑기만 하던 얼굴이 자애를 가득 품은 모습이 퍽 귀족 같았다.

“그래서 무슨 용무이신지요, 와이즈 양.”

“레아라고 불러주셔도 괜찮은데…”

이릴을 흘겨보고 있던 레아지만 알폰스가 말을 걸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흐렸다. 하지만 알폰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야 없지요.”

참으로 기사다운 강직함이었다. 다시 한  반할  같았으나 이내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차마 직접 물어볼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앞에 당사자가 있으니 묻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없었다.

“메르씨엘 남작님, 실례가 안된다면 뒤에 계신 분에 대해여쭤봐도 될까요?”

“실례입니다.”

“...네?”

방금 뭐라고  거지? 레아는 미소를 지은 얼굴 그대로 되물었다. 혹여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실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그녀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알폰스는 웃는 낯으로, 그러나 단호한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와이즈 양, 당신이 제게 어째서 다가오는 건지 압니다.”

“그렇다면…”

“하지만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는 손을 뻗어 뒤에 있던 소녀의 팔을 붙잡는다.

“뭐, 뭐야. 갑자기. 우왓!”

당황스러운 비명과 함께 가녀린 소녀가 알폰스의 품에 안긴다. 그것만으로도 레아는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것보다 더한 것이 있었다.

샹들리에의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반지. 레아는 소녀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알폰스의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와 똑같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는 어린 아이조차 알  있을 것이었다. 알폰스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지요. 이것이 답이 되었길 바라겠습니다."

"그, 그런…"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표정을 짓고 있던 레아의 눈빛이 한순간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거짓말, 거짓말이에요."

"와이즈 양!"

알폰스의 품에 안긴 비올렛을 걱정스럽게 보던 이릴이 깜짝 놀라 레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소녀는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알폰스는 흥미롭다는  레아를내려다보며 물었다.

"거짓말이라?"

"제 백부이신 헤비어트 백작님은 남작님께 약혼자나 그것과 비슷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죠. 이곳의 다른 분들 역시 비슷한 말씀을 하셨구요. 게다가 저분은 분명 수인족이시죠? 수인족은 제국민과 혼인을 할 수 없어요. 당연히 약혼도 불가능하죠."

"그렇군요."

"제국법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일. 그러니까 메르씨엘 남작님은  거부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계신거예요. 그렇죠?"

레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이릴은 그 모습을 보며 차마 못볼꼴을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귀족들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레아는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알폰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폰스는 진정 감탄했다는 듯 짧게 박수를 두어번 치며 말했다.

"과연  헤비어트 백작님의 질녀가 이리도 어리석은 사람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뭐라고요?"

느닷없이 모욕을 당한 레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지금 저희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잊으신 겁니까?"

"말 돌리시는 건가요? 당연히 알고 있죠…?!"

새빨갛던 얼굴이 단숨에 흙빛으로 변했다. 레아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가 이곳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운데 울그락 불그락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비어트 백작도 보였다.

큰일났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레아가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다리를  잡고 놔주지 않는 것처럼 옴싹달싹 할  없었다.

한참 다리와 씨름을 하던 레아의 시선이 누군가와 마주쳤다. 붉은 머리에 안경을 쓴 미모의 메이드. 익숙한 얼굴이었다. 알폰스의 전담 메이드였으니 당연했다.

그녀는 제게 윙크를 날리며 상쾌한 미소를 보였다. 직감적으로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  메이드의 짓이라는 것을 알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와이즈 영애께서는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레아가 끙끙거리며 떨어지지 않는 다리와 씨름하고 있을 때 알폰스가 말했다. 그것과 동시에 고개가 팍 솟구치며 억지로 알폰스를 향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괴로운 목소리가 나오려했으나 입은 꾹 다물어진 채였다.

"약혼식을 치르지 않아서,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

"약혼식은 제 약혼자가 몸이 약해서 약식으로 조촐하게 진행했을 뿐이고, 법적으로 불가능한것은… 황제폐하께 진심을 담아 선처를 구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알폰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어물쩍 넘어간다면 와이즈 양께서 만족하시지 못할 테니 이런 건 어떻습니까?"

멀뚱히 상황을 보고 있던 비올렛의 턱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녀가 뭐라  새도 없이 빠르게 입을 맞췄다.

"읍?!"

깜짝 놀란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알폰스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혀를 집어 넣으며 그녀의 입 안을 농락했다. 비올렛이 손으로 가슴팍을 두드렸으나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키스를 이어나갔다.

질척이면서도 농밀한 키스가 몇 분이고 이어졌다. 분명 잔잔한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 연회장이었으나 두 사람이 혀를 섞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려퍼졌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조차도 없었다. 모두가 홀린 듯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하…!"

 사람이 떨어진 것은  하나가 끝날 때 쯤이었다. 호흡 부족으로 몽롱한 눈을  비올렛이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그에 반해 입술이 번들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멀쩡한 알폰스가 레아를 보며 말했다.

"이정도면 그녀가 제 약혼자라는 것을 믿으실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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