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52화입니다. (52/75)



〈 52화 〉52화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연회장에 홀로 남겨진 이릴은 고개를 돌려 알폰스와 비올렛이 들어간 발코니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문에 처져 있는 커텐은 걷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가가 몰래 엿듣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커튼이 처져 있는 발코니 근처에서 서성이는 인간을 못 볼 정도로 연회장에 장애물이 많지 않았다. 당연히 다른 누군가에게 들킬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귀족적이지 못한 행동이었다. 발코니에 커튼이 처져 있다는 것은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 그렇기에 필치 못한 사정이 아닌 이상 그곳을 지나치는 사람조차 없다.

그것이 귀족의 예법이었다. 물론 이릴은 더 이상 귀족도 뭣도 아니었으나 이곳에 있는 이상 귀족을 연기해야만 했다. 당장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누다 떠나간 알에리 후작 역시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나.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가문의 이름을 써도 좋네, 일리시아 영애.’

설마하니 제 가문을 알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이릴은 쓰게 웃으며 생각했다. 일리시아는 역사가 오래된 가문이다. 그러나  한 번도 중앙 귀족으로 진출한 적이 없으며 탄생부터 자신의 아버지까지도 변방 토지를 다스릴 뿐인 남작에 불과했다.

애초에 일리시아란 가문은 권력에 대한 야망이 적었다. 애초에 가문을 세운 시조부터가 모험가였으니 권력보다는 자유분방을 추구하는 성향이었다. 당장 그녀의 아버지조차도 젊은 시절 가출해 대륙을 떠돌다 엘프인 어머니와 만나 자신을 잉태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상해.’

알에리 후작은 황제의 동생. 중앙 귀족의 거두이자 계승권 서열도 높은 대귀족이다. 그런 사람이 변방의 작은 가문을 알고 있다는건 말이 안됐다.

자신이 팔려온 뒤 일부러 찾아봤다거나, 아니면…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의미겠지.’

이릴은 아마 후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가문으로 돌려보내줄 것도 아닌데 찾아보는건 이상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편이   설득력이 높았다. 그리고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는건,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아버지, 힙킨스 남작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것은 딱히 숨겨진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프 엘프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알에리 후작은 순혈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었고.'

그때는 순혈 엘프와 착각했던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가문을 알고 있던걸 생각해보면 착각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아쉬운대로 자신을 노린 것이었다. 엘프는 더 이상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반쪽짜리 엘프도 엘프였으니.

그제야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째서 소탈한 자신의 아버지가 그런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상인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도.

결국 모든 것이 알에리 후작의 짓이었던 것이다.

"하하…"

이릴은 힘없이 웃었다. 늦어도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물론 알았더라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거액의 빚을 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겠지. 여동생, 메이도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그  일리시아 가문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아냐, 더 생각하지말자.’

이릴은 마른 세수를 하며 테이블 위에 올려둔 술잔을 집어들었다. 반투명한 유리잔에 핏빛 와인이 반쯤 넘실거렸다. 그것을 한 번에 털어 넘기자 불덩이가 목구멍을 넘어 속을 태우는 느낌이 들었다. 독하디 독한 술이었으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놨다.

“실례지만, 합석해도 될까요?”

가녀린 목소리. 이릴은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이를 바라봤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갈색 머리카락과 보라 계열의 프릴이 적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소녀였다. 여전히 옛된 소녀티가 나지만 옷이나 치장으로 청조한 여인을 꾸미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소녀는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저는 레아 와이즈라고 해요.”

“이릴 일리시아에요.”

“일리시아 양,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게요. 메르씨엘 남작님이 안고 계시던 분은 누구시죠?”

청조하다고 생각했건만, 꽤나 저돌적이다. 이릴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와이즈 양은 남작님과 어떤 관계이신가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상관 없는  아닌가요?”

“상관 없지 않아요! 저는 남작님을 사모하고 있어요.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영애들도 말이죠.”

“아.”

고작 그 말로 알폰스가 어째서 비올렛에게 약혼자 행세를 요구한 건지 깨달을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이렇게 저돌적으로 물어오는데 당사자에게는 어떨까.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렇게 사랑에눈이 멀어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어린 귀족들은 성가시기 그지 없는 것들이었다.

이릴 역시도 비슷한 일을 당해봤기에 어느정도 알폰스의 상황에 공감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어째서 그런 걸 자신에게 물어온단 말인가? 그 의문을 읽어낸 것인지 레아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남작님이  분을 안으실 때 함께 계신걸 봤어요.”

“그런가요.”

“다른 영애들도 무척이나 오고 싶어했지만, 단체로 몰려와서 묻는  귀족적이지 못하니까요. 제가 대표로 이곳에 와 있는 거에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이렇게 저돌적으로 묻는 것도 귀족적이지 못하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걸까. 이래서 사랑에 빠진 인간이란 귀찮기 그지 없었다.

이릴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와이즈 양께서는 그녀와 남작님이 어떤 관계로 보였나요?”

“...무척이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정해보였어요.”

다정해보였다라. 비올렛이 들었다면 끔찍히 몸서리를 쳤을 이야기였다.

“아마, 가족이나거나 연인일 것인데 남작님께서는 누이가 없으시죠. 그렇다면 생각할  있는 건 한 가지뿐… 맞나요?”

“예, 생각하시는게 맞을 거예요.”

“하지만, 그분은 수인족이시죠?”

수인족이라. 확실히, 그녀를 처음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죠.”

“수인족은 제국민과 혼인하지 못하는게 아닌가요?”

“혼인을 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사제에게 축복을 받지 못할 뿐이랍니다.”

이릴은 잘못된 생각을 정정해주었다. 물론 두 가지가 다른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제국에서 혼인을 한 뒤 사제의 축복을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알렸으니 말이다. 즉, 사제에게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부부가 될 수 없음을 뜻했다.

“그게 그거 아닌가요?”

“엄연히 다른 이야기죠. 정식으로 부부가 될 수는 없지만 혼인은   있다는 뜻이니까요

“어쨌든, 그렇잖아요. 그녀는 수인족이고 남작님은 제국민이시죠.”

“하지만 남작님께서는 그녀와 약혼을 하셨어요.”

“야, 약혼이라고요?!”

귀족 사회에서 약혼은 사실상 결혼과 다를 바 없었다. 어지간히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결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시피 했다. 아무리 상대가 외도를 하건 뭘 하던 야반도주를 하지 않는 이상은 그랬다.

하지만 그 메르씨엘 남작이 약혼이라니? 분명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에게 약혼자나 연인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애초에 남작이 여자를 가까이 한다는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 항상 연회에 나오면 적당히 안면이 있는 귀족들과 이야기하다 빠져나온다고 했으니.

그런데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니. 날벼락 같은 말에 레아의 표정에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그, 그럴수가…”

“정 믿기지 않는다면 메르씨엘 남작님께 직접 여쭤 보시는 게 어떤가요?”

“무리에요. 그런걸 물어보라니…”

성가신 사람이야. 이릴은 한숨을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상대에게 큰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으나 그러지 않고 베길 수 없었다.

'어서  사람이 나와줬으면 좋겠네.'

비올렛이 걱정되기도 했고, 이 귀찮은 소녀에게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

이릴이 한탄하고 있을 때 비올렛은 짧은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분명 잠들기 전에는 자신이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누워져 있었다. 그것도 머리에는 무언가를 베고 있었다.

짐작하건데, 분명 베개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부드러움이라고는 하나 없는 딱딱한 느낌 밖에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따뜻했다. 이게 문제였다.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은 분명 벤치였고 바깥이었다.

밤공기는 춥지는 않았으나 어느정도 서늘했고 그렇기에 따뜻한 베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아니, 솔직히 말해서 비올렛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쓸데 없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놈이 내게 무릎 베개를 해주고 있다고?’

이릴에게 받았던 것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으나 그것 말고는 설명할  없었다. 슬금 눈을 떴을 때 알폰스의 턱이 보였으니 뺴도 박도 못할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잠들어 있는 자신을 희롱했더라면 욕을 하더라도 알폰스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비올렛이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언제까지 자고 있는 척을 할 거냐?”

무심한 목소리에 번쩍 눈이 뜨였다.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본 비올렛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빼어 일으켰다. 그리고는 벤치 가장 끝자리로 이동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이뤄져서 알폰스조차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불 켜진 지하실의 벌레처럼 움직이는군.”

“내가 안자고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호흡이 달라졌으니 모르는게 이상한거지.”

고작 그런 걸로  수 있다고? 비올렛은 아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 정도로 놀란 표정을 짓기는. 이것보다  한 짓을 할 수 있는 녀석이 말야.”

알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일으켰다. 꽤 오랫동안 자신이 머리를 베고 있었을 텐데도 다리가 저리지 않은지 멀쩡히 걸었다.

“적당히 잠에서 깨면 다시 들어가도록 하지. 꽤 오랫동안이곳에 있었으니 더 이상 추근덕거리지도 않을테니.”

그렇게 말하고는 난간에 기대 밤하늘을 바라봤다. 비올렛 역시 그를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맑은 밤하늘에는 커다란 달과 수많은 별이 장식되어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보던 하늘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이라고는 별이 좀 더 잘보인다고 할까.

별을 보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비올렛은 목을 돌리다 문득 생각난 것을 입에 담았다.

“어째서 내게 무릎 베개 같은 걸 해준 거지?”

평소였다면 절대로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깨어난 상태에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며 감성에 젖어 있던 탓에 저도 모르게 나간 것이었다. 내뱉고는 곧바로 후회했으나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과연 알폰스에게도 의외였는지 밤하늘을 보던 눈이 비올렛에게 향했다.

“의외군. 너라면 없던 일처럼 넘길  알았는데.”

“내뱉고 후회하고 있는중이니 대답이나 해.”

“단순한 변덕이다. 어쩌면 약혼자 역할에 충실했던 걸지도 모르지.”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비올렛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으나 알폰스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면 다른 걸 기대하기라도 했나?”

“다른 거라니, 무슨…”

거기까지 말하고는 곧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 단숨에 혐오하는 표정으로 바뀐 비올렛을 보며 알폰스가 큭큭 웃었다.

“그런  원했다면 미리 말하지 그래. 아니면 지금부터도 괜찮다고 보는데.”

“헛소리하는 혀가 쓸모 없어 보이는데 내가 뽑아줄까?”

“혀 말고 다른걸 뽑아줬으면 좋겠군. 네 혀로 말이야.”

지지 않고 받아치는 음담패설에 기어코 비올렛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도대체 자신이 뭐가 좋다고 말을 걸었단 말인가. 차라리 말을 걸지 않았으면 조용히 쉬다가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을. 자조적인 한숨을 내뱉으며 속으로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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