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화 〉51화입니다. (51/75)



〈 51화 〉51화입니다.

“잡담은 이쯤하고 슬슬 자리를 옮길까. 언제까지고 이런 곳에 서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

알폰스의 말대로였다. 비올렛 일행이 연회장에들어선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아무리 주변에 관심이 없을 사람이라도 훤히 보이는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 일련의 무리가 있다면 절로 시선이 갈 것이었다.

실제로 입구와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들은 벌써 그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다행히 다가와 말을 걸 정도로 담이 큰 이들은 없었다. 비올렛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동하는 알폰스의 뒤를 따랐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닿지 않도록 그의  뒤에 숨어서 말이다.

비올렛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졌다. 평범하게 누군가와 시선을 맞추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무척이나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자꾸만 낙원에서의 일이 생각나서.

“후우…”

가슴이 다시금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절로 답답한 한숨이 내뱉어졌다. 이런 것을 계속 생각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떠오르는 기억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낙원에서처럼 귀족들이 잔뜩 있는 곳이라서 그런 걸까. 걸음마다 그때의 기억이 플레시백 된다. 샹들리에가 무대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와 겹쳐진다. 남녀가 춤추는 댄스 홀이 비워지며 텅 빈 서커스 무대로 변모한다.

안 돼. 그만 생각해야해. 하지만 떠오르는 기억은 멋대로 세상을 덧씌었다.

앞서나가는 알폰스의 등이 무대에 오르던 그 순간과 겹쳐보인다. 그를 따라가면 다시 한 번 무대 위에서 싸우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걸어가던 다리가 느려지더니 제자리에 멈춰선다.

“흐으, 흐, 흐…”

호흡이 잘게 떨리며 뚝뚝 끊어졌다. 그런건 싫다. 이미 결과가 어떻게 될  뻔히 알면서 무대 위로 올라가고싶지 않아. 팔이 부러지고 파과의 고통을 겪는 일을  번 더 겪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왜 그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 거지? 왜 내가, 이런 일을....

“영진!”

이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푸른 눈이 비올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래. 이릴, 이곳에서 유일하게나를 이해해주는 이 사람을 위해서.

삭막한 서커스장이 다시금 화려한 연회장으로 돌아온다.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물방울이 눈썹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디서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굴이 축축했다. 그런 것을 맞은 기억은 없는데 말이지.

“괜찮아? 얼굴에 땀이…”

땀이었나. 무심코 손으로 얼굴을 훑으려고 했다가 금세 이릴에게 제지당했다. 그리고는 어느센가 꺼낸 손수건으로 툭툭 건들이듯 땀을 닦았다. 한 두번 해본 손놀림이 아닌 게 언젠가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같았다.

상냥한 그녀라면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돕는 게 자연스럽겠지. 나 역시도, 누구에게나 배풀어지는 그 상냥함을 받고 있을 뿐일 것이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이릴도  같이 괴팍한 인간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았을 거다.

이런 상황에 처해진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야할까.

‘역겨워.’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자괴감에 이릴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이릴은 제 눈을 피하는 비올렛의 모습을 보다 굳게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알폰스를 바라봤다.

“메르씨엘 남작님.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해보시지요, 이릴 양.”

“비올렛을 방으로 돌려보내주세요. 몸 상태가 많이 안좋아보여요.”

"그대도 아시지 않습니까? 데뷔탕트를 하는 귀족은 함부로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것을."

물론 그런 법은 없었으나 미신이 존재했다. 데뷔탕트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거나, 중간에 나간다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고.

어디까지나 우연의 산물이었으나 제국의 귀족들은 그것을 마치 진실인냥 떠들었다. 이제 막 데뷔탕트를 하는 귀족들을 놀리기에는 좋은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말로 데뷔탕트를 하는 귀족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비올렛은 정말로 귀족조차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비올렛은 귀족이…"

"말씀을 골라서 하시지요. 듣는 귀가 많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고작 그것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진다. 알폰스는 우아하게 상체를 숙여 이릴에게 속삭였다.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좋을 거다. 반푼아."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짐승의 목소리. 이릴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알폰스를 바라봤다.

"당신… 설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악마였다. 하지만 그녀는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알폰스가 정말로 악마라면, 그런 말을 내뱉는 순간 이곳은 초토화가 될 테니 말이다.

악마, 인간이 마에 물들어 타락했을 때 태어나는 마물의 일종이었다. 으레 그렇듯 마물이라 이성이 없는 것이 당연했으나 그는 멀쩡히 말하고 무척이나 인간다웠다.

적어도 외관만은 그랬다.

"알아차렸나? 하지만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고작 하프엘프에 노예인 네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작게 웃는다. 마치 맹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몸이 저릿하고 턱이 달달 떨려왔다.

알폰스는 그런 이릴을 보며 기울였던 상체를 세우고 말했다. 언제 그랬냐는듯 평소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이다.

"...듣고 보니 이릴 양의 말도 맞는 듯 합니다. 비올렛은 몸이 약한 아이니까요."

몸이 약한 아이라. 확실히 지금의 비올렛은 그렇게 보였다. 창백한 안색에 식은땀을 마구 흘려대고 있으니. 만약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극심한 긴장으로 인해 몸상태가 나빠진 것으로 알 것이었다.

알폰스는 이릴을 지나쳐 비올렛에게 다가갔다.

"꼴사나운 모습이군."

"읏…"

조용히 질책하는 목소리에 비올렛이 시선을 피했다.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린 다음인지 그의 눈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알폰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 네게는 이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생각을 숨기지도, 거짓을 꾸미는 것도 못하는 어리석은 네게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얼굴에 피어오른 표정은 몸이 약한 약혼자를 걱정하듯 애틋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다. 귀한 도자기를 만지는듯 조심스럽게 이마에 손을 뻗는 동작하며 말이다.

이마에 닿는 손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몸이 뜨거운 건지, 아니면 알폰스의 손이 유독 차가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그 차가움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미치겠군.’

비올렛은 아무래도 제 몸이 정상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폰스와 신체접촉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비올렛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와 멀어졌다. 고작 한걸음이었으나 이마에서 손이 떨어지는데는 충분한 거리였다. 알폰스는 그런 비올렛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어쨌든 약혼자가 아프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하겠지."

그러더니 곧장 팔을 뻗어 비올렛의 오금과 등을 받쳐들었다.

이른바 공주님 안기라 불리는 자세였다. 비올렛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으나 알폰스는 그녀를 안은 상태에서 말했다.

“아무래도 비올렛의 몸 상태가 안좋은 것 같으니 조금 쉬게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남작님께서는 바쁘실테니 제가 대신해서...”

“마음은 고맙지만 이런 건 약혼자인 제가 챙겨야겠지요. 샬럿, 이릴 양을 알에리 후작님께 모셔다드리고 내가 올 때까지 그녀를 보필하도록 해라.”

끼어들려는 이릴의 말을 가볍게 넘기고 샬럿에게 말했다. 알아서 허튼 짓 못하게 감시하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말을 알아들은 샬럿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릴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자아,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자, 잠깐 샬럿!”

당황하는 목소리가 멀어진다. 알폰스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다. 아까 말했듯이 잠시 쉴 장소를 찾아가는  뿐이니까.”

비올렛은 뭐라 더 말하려다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뺐다. 어차피 뭐라고 말해봤자 알폰스는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기운 빠진 주인처럼 축 늘어진 토끼귀가 걸음마다 팔랑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연회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알폰스가 노리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부러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발코니를 향하고 있는 것도, 걸음걸이를 느릿하게 하며 걷고 있었던 것도. 최대한 많은 이들이 이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비올렛이 알았더라면 경기를 일으키며 거부반응을 보였을 생각이었으나 그녀는 제 품 안에서 축 늘어진 채였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물론 그가 강제로 하고자 했다면 어렵지 않게 했을 것이었지만, 비올렛이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이렇게 얌전히 있는 건 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제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겠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게 거짓말은 아닌가보군. 단순히 체념한 것에 불과하지만 알폰스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발코니의 입구인 유리문 앞에 섰을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할 얼굴이 살짝 굳어 있는 모습이 유리에 비쳐 보였다.

‘이런 표정을 지으려고 했었던가?’

전혀 아니었다. 약혼자를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려고는 했지만, 이런 심각함이 느껴지는 얼굴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알폰스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려 했으나 두 손 모두 비올렛을 안고 있는데 쓰고 있다는 사실에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곧장 자세를 고쳐 한 팔로 그녀를 안아들었다.

“우악?!”

갑작스러운 자세 변환에 비올렛이 깜짝 놀라 외쳤으나 알폰스는 유리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만질 뿐이었다.

“뭐, 뭐야…”

잠들 생각은 없었지만 왠지 흔들리는 침대에 누워 있는 기분이라 나른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던 비올렛이었다. 갑작스레 느껴진 부유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조금 진정된 다음에야 자신의 자세가 달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알폰스의 목을 팔로 두르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움찔하며 그 손을 풀려던 순간이었다.

‘...이대로 목을 졸라버린다면 어떻게 되지?’

비올렛은 자신의 무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았다. 알폰스와 했던 수많은 대련 덕분이었다. 적어도 평범한 사람의 목 정도는 가볍게 부러뜨릴 수 있는 괴력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 물리력을 행사할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알폰스였다. 그는 대련 중에 자신의 괴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며 압박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의 힘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좋았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그래봤자 그 역시 인간이었다. 목이 부러지면 그런 힘도 제대로 못쓸 것이었다. 노예의 인장이 없으니 중간에 전격을 맞아 멈추게  걱정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기회였다. 다시는 안 올 천재일우의 기회. 느릿하게 껴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금세 목이 부러질 정도의 힘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답답함을 느낄 정도. 하지만 알폰스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울을 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힘을 주며 당기면, 그의 목은 앙상마른 가지가 꺾이듯 꺾일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알폰스를 죽이고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저택에 있던 동안 탈출할 경로를 물색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조용히 몰래 빠져나간다는 가정하에 세워진 것들이었다.

알폰스를 죽이고 나서 조용히 도망친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팔에서 힘이 빠졌다. 그를 죽인다면 한순간 기쁠 수는 있으나 미래는 없었다. 그리고 비올렛은 고작 찰나의 감정에 몸을 맡길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후우…”

비올렛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 않는 건가?”

“뭐?”

무심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무심코 답했다. 어느새 유리문을 보고 있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기회이지 않나. 나를 죽이고 이곳을 탈출할 기회. 마침 행동을 제약할 족쇄도 사라졌고 이 거리라면 내가 반응하는 것보다 네가 빠를 테니.”

하, 아닌 척하면서 다 알고 있었단 말이지. 제가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말하는 알폰스의 모습에 잠시 기가찬 표정을 지은 비올렛이었으나 이내 코웃음치며 말했다.

“죽이려고 하면, 죽어주는 거냐?”

“네 하기 나름이겠지.”

“흥.”

죽어주지 않겠다는 말을 잘도 돌려서 말하고 있어. 비올렛은 까칠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시덥잖은 말은 그만하고 슬슬 내려주시지. 언제까지 날 안고 있을 셈이야?”

“제촉하지 않아도 내려줄 생각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비올렛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람이 불어온 곳을 바라봤다. 발코니를 밝히는 작은 등과 밤하늘이 보였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이런 곳이었나. 알폰스는 문을 닫더니 커튼까지 치며 연회장과 이곳을 분리했다.

“뭐야, 커튼은  쳐?”

애초에 커튼이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있는 이유가 뭔데. 비올렛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니 알폰스가 코웃음치며 말했다.

“여기서 그런 짓을  생각은 없으니 경계할 필요 없다.”

“...누가 경계 같은 걸 했다고.”

웅얼거리듯 말하는 비올렛을 발코니에 비치되 있는 벤치 위로 내려놓고는  역시 곁에 앉았다.

“바깥으로 나오니 조금 살만하군.”

한숨을 내쉬듯 말하는 모습에 비올렛 역시 속으로 공감했다. 고작  연회장에서 나온 것으로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편해진 기분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간혹 바람 소리가 적막을 매꾸고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비올렛은 오랜만에 느껴지는 평온함에고개를 꾸벅거렸다. 긴장이 풀리면서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온 탓이었다.

알폰스는 꾸벅거리며 조는 비올렛을 보며 조금 전 자신의 표정을 떠올렸다. 분명 그건 연기 따위가 아니라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잠깐이지만 정말로 비올렛을 걱정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단순한 노예. 물론 검이나 싸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금방 제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모습이 제법 재미는 있었다만 어디까지나 놀잇감에 불과한 존재다.

그런 그녀를 보며 걱정이라는 감정이 들다니.

“...”

알폰스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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