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8화입니다.
비올렛은 가만히 앉아 분주히 움직이는 샬럿을 바라봤다.
제 팔꿈치에 갈비뼈가 주저앉아 바닥에서데굴데굴 구르던 게 몇십 분 전의 일이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팔팔하게 움직였다.
‘...사람이 맞나?’
솔직히 말해서 제가 때리고도 깜짝 놀랐다.
평소에도 쓸데없는 짓을 하면 간간히 주먹을 날리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힘을 조절해서 때린 것이기에 그리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런 몸이 되고 나서 힘이 비정상적으로 세졌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까딱하면 초상을 치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제어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성을 잃고 그만 진심으로 때려버렸다.
때리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팔꿈치는 갈빗대를 부수고 떨어졌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을 땐 심할 정도로 움푹들어간 명치가 보였다.
그제야 비올렛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가 나 있던 얼굴은 단숨에 창백해졌으며 당황이 머리를 지배했다.
샬럿은 거센 숨을 토해내며 붉은 피를 토해냈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이 후트와 겹쳐 보여서 속이 울렁거렸다.
분명 그녀가 싫기는 했으나 알폰스처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은 건 아니었다.
제 몸을 가지고 음험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러나저러나 그 빌어먹을 저택에서 유일하게 제게 호의를 가지고 대해주는 사람이었다. 비올렛조차도 무의식중에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이게 생겼으니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어떻게든 그녀를 살려보려고 했으나 아무런 의학적 지식이 없는 비올렛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숨을 토해낼 때마다 피가 한 움쿰 씩 섞여 나왔고 마사지실 바닥이 피바다가 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샬럿이 죽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몸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비올렛은 점점 숨을 멎어가듯 몸을 떠는 샬럿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죽지 말라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몇 번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에게 애원하듯 간청하는 것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차오른 눈물로 눈앞이 흐려질 때쯤에 들려온 웃음 어린 기침이 아니었더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펑펑 울며 소리쳤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한 방울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샬럿은 언제 고통스러워했냐는 듯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프라이즈?’
라고.
비올렛은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입가에는 피가 울컥거리며 터져 나오고 있었고 무너진 명치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샬럿은 언제 죽을 것 같이 굴었냐는 듯 장난스럽게팔을 펼치며 그런 말을 해댔다.
‘놀랐어요?’
‘원래 그냥 일어나려고 했는데 비올렛의 반응이 신선해서 좀 놀려봤어요.’
‘이제 좀 저의 소중함을 깨달으셨나요?’
뻔뻔하게도 속였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 말이다. 비올렛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눈물을 닦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까와는 다르게 서늘한 눈으로 샬럿을 내려다봤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얼굴을 굳혔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놀랐냐고?’
‘그래, 엄청. 정말로 네가 죽는 게 아닌가 싶어서 무서웠어. 나와 싸우던 남자, 후트라는 사람처럼.’
‘네가 원하던 게 이런 반응이면, 축하한다. 넌 성공했어. 날 어린애처럼 울게 만들고 애원하게 했으니까.’
그리고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방을 나왔다. 전신이 피범벅이었던 터라 이릴이 비명을 지르고 다시 씻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 세 사람은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릴은 거울 앞에 앉아 있었고 샬럿은 여러 도구를 사용해가며 그녀를 치장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비올렛은 침대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목욕탕을 나온 뒤로 비올렛은 샬럿과 한마디의 말도 섞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샬럿이 사과하며 친근하게 붙어왔으나 비올렛이 밀어낸 것이었다. 이릴이 불편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봤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샬럿조차도 난감한 기색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비올렛은 가슴을 꾹 누르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마구잡이로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묵묵히 얼굴을 굳히고 입을 꾹 다문 채로 있었다. 지금이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정도로 괜찮아졌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그랬다는 것이었다.
비올렛은 한숨을 내쉬며 샬럿을 바라봤다. 옷을 갈아입을 때 봤던 그녀의 명치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새파란 멍이 커다랗게 들어 있었기는 했으나 그래도 부서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경이적인 치유력이었다. 비올렛은 예전에 자신의 팔을 고쳐주었던 부관을 떠올렸다. 어쩌면 샬렷도 부관처럼 부러진 뼈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 지도 몰랐지만, 능력을 사용한 부관이 곧바로 지쳐 곯아떨어졌던 것을 떠올리면 같은 능력은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같다고 할지라도 그만한 부상을 입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저렇게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이라도 아픈 기색은 있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샬럿은 언제 다쳤냐는 듯 열과 성을 다해 이릴을 최대한 꾸미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을 구경하고 있으니 문이 열리며 작은 메이드가 등을 보이며 나타났다.
레니였다. 대욕탕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올 때 자신이 패야 할 장작을 모두 끝내고 쉬고 있던 것을 함께 데려온 것이었다.
그녀는 낑낑거리며 무언가를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 한편을 전부 차지할 정도로 긴 행거였다. 그것에는 온갖 종류의 옷이 걸려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값이 꽤 나갈 정도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들이었다.
레니를 도와 행거를 밀던 메이드는 조용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바깥으로 나갔다.
레니가 땀을 닦는 시늉을 하더니 곧장 샬럿에게 다가가 약하게 옷을 잡아당겼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이렇게 일일이 보고를 해야 했다.
옷이 잡아당겨지는 느낌에 샬럿이 고개를 돌려 레니를 보더니, 방 한편에 배치된 행거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레니는 쑥스러운 듯 앞치마를 만지작거렸다.
“어떤 옷이 좋을 것 같아요?”
그 뒤로 한참 화장을 하던 샬럿이 말했다. 이릴에게 하는 말인가 싶었으나 빨간 시선이 비올렛을 향하고 있었다.
턱을 괴며 무심하게 보고 있던 비올렛이 움찔거리며 말했다.
“어?”
“어떤 옷이 좋을 것 같냐구요. 이릴에게요.”
“어떤 옷이 좋을 것 같냐니…”
비올렛은 우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화려하고 고급진 옷들이걸려 있는 행거를 한 번, 거울 속의 푸른 눈을 한 번.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제 머리카락을 땋으며 놀고 있는 어린 메이드를 한 번. 레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올렛을 올려다봤다. 필요한 게 있냐는 듯이 하는 시선에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 답했다.
끙, 비올렛은 이마를 짚으며 고민했다. 시궁창 같은 삶을 살던 그녀에게 미적 감각을 원하는 건 부조리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충 싸고 세탁을 하지 않아도 티가 나지 않을 것들을 사이즈만 맞춰서 입고 다녔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들도 적당히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는 맞춰서 입었지만, 본격적으로 꾸며야 하는 상황에서 적당하다는 단어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무조건 최고로 잘 어울리는 것. 그런 것을 선택해야 했다. 비올렛은 다시 한번 앓는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이릴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이 뭐가 있을까. 우선 색으로 구분해볼까. 칙칙한 색은 일단 논외다. 물론 화려한 금발이 돋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어두운색은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강렬한색도 논외. 이건 비올렛의 호불호였다.
물론 이릴이라면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릴 것이었다. 괴상망측한 것을 입지 않는 이상에야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음…’
개나리처럼 연노란 옷이 눈에 띄었다. 확 튀는 색도 아니고 어쩐지 이릴과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이건 어때?”
그렇게 생각하고 추천해줬는데 생각보다 두 사람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거울 속의 이릴은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대놓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샬럿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그 반응들은?”
“아니, 뭐 보통 저런 색은 데뷔탕트하는 어린 영애분들이 입는 거니까요.”
“데뷔탕트? 그게 뭔데?”
생소한 단어에 비올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쉽게 말하자면 귀족 사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행사 같은 거죠. 뭐 굳이 자세히알 필요는 없는 내용이지만, 어쨌든 이릴처럼 혼기가 찬 영애가 입기에는 조금 눈치가 보이는 색이에요.”
“하하…”
혼기가 찼다는 말에 이릴이 어색하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보통 어린 나이에 약혼을 하고 별 탈 없이 성인이 된다면 곧바로 결혼하는 것이 귀족들의 생리였으니 말이다.
그에 반해서 이릴은 성인이 된지 몇 해가 되었으나 약혼도 결혼도 하지 않았다. 사생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비올렛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어쨌든 어른이 입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 옷이라는 뜻이 아닌가. 한참을 고민하다 눈을 뜨고 다른 옷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건?”
붉은 계열의 색을 바탕으로 하얀색으로 꾸며져 있는 옷이었다.
“흐음… 확실히 이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유심히 이릴과 옷을 번갈아보던 샬럿이 유려한 손놀림으로 옷을 가져갔다. 엇 하는 사이에 팔이 가벼워진 그녀의 곁으로 놀고 있던 레니가 쪼르르 샬럿에게 다가갔다. 말하지 않아도 환복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순식간에 옷이 벗겨지고 다시 입혀진다. 물론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눈을 돌릴 새도 없이 드러나는 새하얀 등에 비올렛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있으니 천이 스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샬럿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비올렛? 왜 고개를 돌리고 있어요?”
“신경 꺼…”
“신경 끄라고 말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릴의 치장이끝났다구요?”
보지 않으실 건가요? 뒷말이 들려오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이릴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거울을 보며 제게서 등지고 있던 그녀는 어느새 마주 보는 자리에 서 있었다.
“와…”
비올렛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린 모습은 무척이나 예뻤다. 흔히들 여신 같다고 하는 표현이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자신이 어리숙하게 추천해주었던 드레스는 다행히도 그녀와 잘 어울렸다.
그것에 못내 걸렸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혹시나 이릴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어쩌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에게는 심미안이라는 것이 부족했으니까.
그렇게멍하니 있으니 조심스럽게 이릴이 말했다.
“어때…?”
“어떻긴 뭘 어때요. 딱 표정만 봐도 알겠는데.”
비올렛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놀리듯 샬럿이 말했다.
“너…”
뭐라 말하고 싶었으나 욕탕에서의 일이 떠올라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당장 짜증을 부리며 욕할 것 같은 사람이 입을 꾹 다물자 샬럿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 뭐라 말하는 대신 이릴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정말 예뻐.”
“다행이다…”
조금 어색하게 있던 이릴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그녀의 미소에 비올렛의 얼굴에도 작게 웃음이 지어졌다.
“어휴, 여기에 둘만 있는 줄 아나 봐. 그렇죠?”
소름 돋는다는 듯 몸서리치던 샬럿이 곁에 있던 레니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레니 역시도 반짝이는 눈으로 이릴을 동경한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통이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샬럿은 작게 손뼉을 쳤다. 짝, 소리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넓게 퍼졌다. 그제야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과 어린 메이드 하나가 그녀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자, 자. 아직 준비가 끝난 게 아니니까 서두르자구요.”
“준비라니, 이릴은 이미 끝났잖아?”
“파티에 이릴만 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 말에 비올렛은 무슨 소리냐는 듯 표정을 짓다가 이내 깨달은 듯 작게 입술을 벌렸다.
어깨로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를 화장대앞으로 끌고 왔다. 커다란 거울에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그럼 시작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