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5화 〉45화입니다. (45/75)



〈 45화 〉45화입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릴의 눈이 작게 뜨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하프 엘프의 귀는 그것을 쉽게 감지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들어오는 움직임에서 배려가 느껴졌다. 이릴은 미소를 지으며 잠꼬대를 하듯 몸을 누이는 비올렛을 껴안았다.

몸이 굳으며 긴장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으나 억지로 참아냈다. 여기서 웃어버리면 깨어 있다는  들통날 것이 뻔했다.


품에 안긴 비올렛은 한참이나움직이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편한 자세를 찾으려 꼼지락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자꾸만 얼굴을 간지럽혔다.


차갑게 식은 체온이 느껴졌다.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바깥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릴은 자신의 따뜻함을 나눠주기 위해서 껴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올렛은 편한 자세를 찾고는 곧바로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이릴은 새하얀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가 매일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깥을 배회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항상 피로에 찬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였으니  충격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는 게 당연하리라.


비올렛은 분명 성격이 거칠고 사나운 사람이었으나 천성이 잔인하거나 사악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격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형성된 가면에 불과한 것이었다.


 가면이 사람을 죽임으로써 금이 간 상태였다. 지금의 그녀는 이전처럼 난폭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조금 기가 죽은 느낌이 강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 있어 하던 모습이 사라지는 건 아쉬웠으나 오히려 이런 태도가 비올렛을 지켜줄 것이었다.


귀족이라는 족속들은 기본적으로자신에게 대드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인간이 아닌 노예가 그렇다면 더욱이.

운이 좋다면 단번에 목이 쳐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끝없는 고통의 굴레에서 혀를 깨물고 자살할 때까지 이어질 것이었다.

이릴은, 차라리 그녀가 소극적으로 되더라도 살기를 바랬다.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이  이상 남지 않게 되더라도 비올렛이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랬다.

그렇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하프 엘프는 평범한 인간에비해서 몇 배나 오래 살 수 있었고 마물인 비올렛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만남은 이별로 이어지고 이별은 만남으로 이어진다. 곧 다가올 이별의 순간이 영영 서로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리라.


언젠가,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있을 것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말이다.

창문으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파티에 참석하라고?”


“네에, 주인님의 명령이에요.”

나긋한 목소리로 샬럿이 말했다.


가볍게 아침을 먹고 이릴과 산책을 하며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금 나락으로 처박히는 것 같았다.

비올렛은 안그래도 피곤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거부권은…”

“당연히 없죠?”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옆에 있던 이릴이 비올렛을 다독이듯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는 샬럿을 향해 말했다.


"그건 저도 포함이 되는 건가요?"

"...뭐어 그쪽은 후작께서 결정하실 일이지만 상관없지 않을까요."

샬럿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는 이릴이 그리 곱게 보이지 않았다.


대련이 있던 날 자신을 제치고 환복을 도와줬던 점이나 그날 이후로 며칠째 비올렛을 독차지하고 있는 점이 더욱 그랬다.


주인님과 후작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샬럿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함께 가겠어요.”

“괜찮아. 알폰스가 부른 건 나뿐이니까 굳이…”

“아냐, 내가 같이 가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이릴…”


‘아으 짜증 나!’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샬럿은 손수건을 물어뜯고 싶은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금방 저들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도 잔뜩 훼방 놓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으나 그랬다가는  비올렛에게 맞을 것만 같았다. 자신과 비교하면 쥐방울만 한 주제에 손은 더럽게 매웠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샬럿이 입을 열었다.

"오늘 파티는 해가 지는 저녁에 열릴 예정이니  분은 그전까지 준비를 하셔야 해요."

"그럼 아직 한참 남은 거 아냐?"

지금은 이제 막 해가 하늘에  있는시간이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라면 못해도 몇 시간은 남아있었다.


"비올렛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뭐."


"평소와 파티를 준비할 때는 달라요. 단순히 몸에 향유를 바르고 옷을입는 게 아니라 파티의 성향까지 고려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구요?"

물론 지금 연회장에서 열리는 파티는 그런 격식은 필요 없었다. 다들 제 성격에 맞게 입고 춤추고 떠들었다. 애초에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었으니.

하지만 샬럿은 부러 그렇게 으름장 놓으며 말했다.

"맞아. 어느 파티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물론, 후작께서 어떤 파티를 주최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전직 귀족인 이릴까지 그렇게 말하니 비올렛도 그런가? 하고 생각이 기울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딱히 비올렛이 할 건 없었다.

어차피 옷이나 씻는  레니가 도와주니까. 샬럿이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어린애가 시중을 드는 것은 어색했으나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졌다.

물론 그녀는 조금 어수룩해서 실수할 때도 많았지만 짓궂은 장난을 치는 샬럿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레니는 순수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샬럿을 바라봤다.

"그럼 뭐… 지금부터 준비하자고?"


"이르기는 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한다면 나쁜 것도 없죠. 우선 몸을 씻으러 가볼까요?"

-

"어디로 가는 거야?"


몸을 씻는다기에 방으로 돌아갈  알았더니 저택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알에리 저택 부지 내였으나 목적지를 알 수 없었다.

"알에리 후작께서 애용하시는 대욕탕으로 가고 있어요."


"후작님이 애용하시는 거라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 아닌가요?"


"괜찮아요~ 어차피  쓰지도 않는 곳이기도 하고 저는 이미 허락을 받았으니까요."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걸음을 빨리한다.


멀리서 무언가 쩍 하고 쪼개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정체 모를 소리에 샬럿을 바라보자 익숙하다는 듯 말했다.


“원래 물을 데울 때는 열석(熱石)이라는 물건을 써요.”

새빨간 돌이 그녀의 손에 올라왔다. 비올렛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름처럼 따뜻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그냥 돌 같은데 물과 만나면 부글부글 끓으면서 물을 뜨겁게 만들어주죠. 대신 커다란 양은 못 하고  번에  개만 쓸 수 있어요. 만약에 두 개를 동시에 쓰거나 한다면.”


펑, 하고. 뒷말은 내뱉지 않았으나 몸짓으로 알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으니 가느다란 손가락이 열석을 빼앗아갔다.

“뭐 그런 짓을 하는 머저리는 없겠지만요. 어쨌든 대욕탕은 열석으로 물을 데우기에는 엄청나게  곳이라서 장작 같은 땔감으로 온도를 높이죠.”


“그럼 그냥 저택의 방에 딸린욕실에서 씻으면 되는 거 아냐?”


“저택에 딸린 욕실이랑은 차원이 다른 곳이니까요. 거기서 씻으면 피부도 반짝반짝 빛나고 어떤 병자라도 말끔히 치유되서 나오는 곳이라고요?”

무슨 노천탕이냐. 턱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비올렛이 고개를 저었다.


장작을 패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건물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익숙한 얼굴의 어린 메이드 하나가 제 몸만 한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고 있었다. 메이드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지 익숙하게 도끼를 들어 올려 나무통을 찍었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얼굴 위로 구슬땀이 맺혀 턱선을 따라 흘러 땅으로 떨어져내렸다.


“레니…?”

반쯤 확신 없는 목소리에 메이드의 고개가 올라왔다. 아직 젖살이 남아 있는 어린 메이드, 레니가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도끼를 놓으며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해왔다.


비올렛은 어이가 없었다. 아침저녁을 제외한다면 굳이 레니를 부를 필요가 없었기에 하고 싶은  하고 있어도 상관없다고 말해두기는 했지만, 여기서 장작을 패고 있을 줄은 몰랐다.


“여기서 뭘…”

“후작님의 명령이겠죠. 그렇죠?”

뒤에서 말하는 샬럿의 말에레니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비올렛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았다. 당황하며 빼려고 하는 모습이었으나 부러 꾹 잡아 놓치지 않았다.


억지로 손을 펼치니 아니나 다를까 잔뜩 쓸려 손바닥이 까져 있었다. 따끔한 것이 장난 아닐 텐데도 레니는 소리 하나 내뱉지 않고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다.

비올렛은 고개를 돌려 샬럿에게 말했다.


“바르는  같은 거 없어?”


“없진 않지만요. 설마 발라주시게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깜빡인다. 비올렛은 왠지 불쾌해져서 그녀를 노려봤다.


“뭐야  눈은.”

“아니, 뭔가 비올렛이라면 그런  신경 안 쓸 줄 알았, 끼약!”


“잔말 말고 내놔.”

“절 이렇게 대하는  비올렛 뿐일 거예요…”


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꿍얼거리듯 말한다. 비올렛은 대꾸도 하지 않고 꺼내든 약병을 빼앗듯 가져갔다. 병을 여니 안에는 녹색을 띄는 크림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본능적으로 냄새를 맡은 비올렛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뭔 냄새야 이건.”


“당연히 약초 냄새죠. 상처를 치료하는데 쓰는 건데 당연한 것, 악! 또 때렸어!”


비명을 지르는 샬럿을무시하고 레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약을 작게 손가락으로 떠 쓸린 상처가 많은 손바닥에 얇게 펴 발랐다. 그제야 조금 따끔거리는지 얼굴을 찌푸린다.

“많이 아파?”


비올렛의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주제에 상처에 약이 닿을 때마다 울상을 짓고 있어서 괜스레 마음이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 어린 메이드에 마음을 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모습이 전생에 살던 곳과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었고, 아직 어린아이가 이런 궂은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어린 날을 투영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릴이 자신에게 동생을 투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양손 모두 꼼꼼하게 약을 발라준 그녀는 다시 샬럿을 바라봤다.

“무, 뭐요.”

부어오른 이마를 샥 가리며 말을 더듬는다. 비올렛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약까지 받았는데 더 부탁하기에는 아무리 그녀라고 하더라도 조금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다.

대신 입고 있던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찢었다. 부욱- 소리를 내며 단숨에 무릎 위까지 짧아졌다.

“끼약! 옷이!”


“네 것도 아닌데 유난은."

절규하는 샬럿을 뒤로하고 찢은 천 조각을 붕대 삼아 레니의 손에 감겨주었다. 찢어진 원피스를 본 레니의 표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어리숙하기는 했으나그녀 역시도 메이드. 비올렛이 입고 있는 옷의 가치쯤은 눈대중으로   있었다.

못해도 금화 수십 장짜리의 옷이 붕대가 되어 제 손에 감기고 있다는것은 정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메이드가 속으로 경악을 하는 사이에도 비올렛은 복싱을 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꼼꼼히 붕대를 감았다. 너무 꽉 조이지도, 손을 움직이기 불편하지도 않을 정도로 감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됐다.”

레니는 눈을 깜빡이며 손과 비올렛을 번갈아보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있어 최대한의 감사 표시였다. 마음 같아서는 장작을 패는 것도 그만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주인의 명령까지는 자신이 간섭할  없는 영역이었다.

단지 이릴이 했던 것처럼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니의 머리를 작게 쓰다듬어주며 몸을 돌렸다.

“가자.”


“그 옷이 얼마나 비싼 건데…”


꿍얼거리는 샬럿을 무시하며 앞으로 걸었다. 걸음 옆으로 이릴이 슬금슬금 다가와 어깨로  건들였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올렛은 괜히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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