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화 〉44화입니다. (44/75)



〈 44화 〉44화입니다.

또  꿈인가. 비올렛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주위는 깜깜했으나 이곳이 어디인지 금방  수 있었다. 이미 몇 번이고 봐 온 광경이었으니. 그것을 생각하기 무섭게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매달려 있던 조명이 켜졌다.

강렬한 불빛이 어둠을 몰아낸다. 비올렛은 눈을 찌푸리며 밝아진 서커스장을 바라봤다. 도대체 이곳은 언제 제 머릿속에서 떠날 건지. 옅게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뚜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속에서 걸어오는 남자는 비올렛보다 키가 조금 컸으며 검을 지니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것이 조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아니, 확실히 좋지 않을 것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밝은 곳으로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후트였다. 두 눈을 감고 입은 무언가를 씹고 있는  오물거렸다. 피부는 창백해서 시체의 것과 다름없었고 그 아래로 피범벅인 가슴팍이 보였다.

비올렛이 만들어낸 상처였다. 후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무대 위로 올라왔다. 서로를 마주 보고 섰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대련을 했을 때처럼 마찬가지로.

마치 거울처럼 두 사람은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먼저 칼을 휘두르는 것은 당연하게도 비올렛이었다. 불안정하게 휘둘러오는 검을 쳐내고 손목을 잘라낸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완벽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뼈와 살을 가르고 빠져나오는 감각이 검을 타고 느껴졌다. 창백한 낯빛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죽고도 남았을 공격에도 머리를 잃은 몸은 움직여 비올렛을 덮쳤다.

비올렛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몸을 깔아뭉개고 꼼짝도 하지 않는 몸뚱아리를 밀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검격에 날아갔던 머리가 데굴거리며 목 위로 안착했다. 몇 번이나 보는 광경이었으나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비올렛은 겁에 질린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목이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감겨 있던 눈이 뜨인다. 그곳에는 텅 빈 암흑뿐이었다. 눈을 파낸 기억은 없을 텐데도 항상 이런 식이었다. 후트의 머리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빈 눈으로 붉은 피가 차올라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얼굴 위로 차가운 피가 쏟아졌다. 얼굴을 적시던피는 그것으로 모자란  넓은 서커스장을 가득 채우려고 하고 있었다. 어느새 몸의 반절이 피웅덩이에 묻혔다. 얼굴 옆까지 차오르는 피웅덩이에 비올렛이 마구 발버둥 쳤다.

그리고 오물거리던 입이 쩌억 벌어진다. 마치 뚜껑 열리듯 크게 벌어진 입으로 보이는 것은 난도질당한 심장이었다. 그것을 본 비올렛의 발버둥이 멈췄다. 눈동자에 그 심장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피웅덩이 속으로 비올렛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

비올렛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눈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두웠고 조용했다. 등 뒤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렛은 제 몸 위로 올라와 있는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으응…”


뒤척거리는 소리에 몸을 굳힌다. 설마 깨어나는 걸까? 다행히도 입술을 작게 오물거리더니 다시 고른 호흡을 내뱉는다. 비올렛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케이프를 어깨에 두르고 소리가 나지 않게 방을 빠져나왔다.

훈기가 감돌던 방과는 다르게 복도는 서늘했다. 사람 한  지나다니지도 않고 깜깜했기에 으스스할 법도 했지만 비올렛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다.

알에리 저택에 온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다르게 말하자면 후트와 대련으로부터 사흘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각지에서 초대를 받은 귀족들의 마차가 속속들이 도착하고 한동안 저택이 시끌시끌했다.

그러나 비올렛은 이릴과 그 시끄러움에서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 알에리 후작은 약속한 대로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게 해주었다. 밥도 방에서 먹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고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도와줄 시녀도 붙여주었다.


사흘 동안 비올렛은 이릴과 시간을 보냈다. 기껏해야 정원을 산책하거나 이야기를 하는 정도였으나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것조차도 소중했다.

파티가 시작된 지 하루. 남은 엿새 동안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이릴과 함께 탈출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릴만이라도 탈출시켜야해.’

알폰스와의 내기는 어찌 되었건 결국 비올렛이 이길 것이었다.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얕은 상처라도 내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비올렛은 당장이라도 그럴 실력이 되었다. 알폰스가 방심을 해준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릴은 다르다. 세상에 모습을 감춘 지 오래된 엘프와 인간 사이에서 나온 하프 엘프. 비록 순혈은 아니지만 순혈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하프는 그만큼 귀중했다.


그런 이릴을 알에리 후작이 순순히 놓아줄까?


‘절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겠지.’

그렇기에 비올렛은 매일 밤 몰래 빠져나와 저택을 살펴보고 있었다. 만약에 이곳에서 빠져나간다고 한다면 어느 루트로 가야 할지 미리 알아보기 위해서.

물론 잠이 안 온다는 것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던 비올렛의 걸음이 멈췄다. 창밖으로 빛이 반짝거렸다. 본관인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관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저곳에서 알에리 후작이 주최하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각지에서 올라온 귀족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이 내린 복도와는 달리 찬란함을 내뿜는 빛에 문득 전생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구나, 난.”

결국 어디를 가나 저가 있을 곳은 이런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멈췄던 다리를 움직여 다시 복도를 나아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헤쳐 나오면 발코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겨 있던 문을 열고 나오니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스치고 지나갔다.


별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도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세계가 변했어도 하늘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달만 덩그러니 떠 있던 전생의 하늘과는 다르게 달이 외롭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 모습만큼은 전생과 다를  없었다. 제 모습과 모든 것이 바뀐 지금에 와서도 말이다.


비올렛은 전생이 그다지 그립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때나 지금이나 삶이 시궁창으로 박힌 것은 똑같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남자였던 몸은 그리웠다. 적어도 큰 키와 남들에게 얕보이지 않을 근육은 비올렛에게 몹시 절실한 것이었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하지만 작은 아쉬움 정도는 있었다.

이곳에서 이릴을 만나지 않고 전생에서 이릴을 만났더라면, 만약 그녀가 이곳이 아니라 저쪽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었더라면.

만약 그랬더라면 자신과 이릴이 만나는 것이 불가능했겠지만, 꿈을 꾸게 되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해서 만났더라면 자신은 여전히 양아치에 구제불능인 인간이었겠지만, 아마도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하고.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상황이었을 거라고.


망상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비올렛은 미간을 누르며 주위를 살폈다.  관리된 정원이 보였다. 바닥에서 발코니까지는 3층 정도 높이밖에 되지 않아서 뛰어내려도 크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릴은 안고 뛴다고 생각했을 때도 어렵지는 않았다. 담이 좀 높기는 했으나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바깥을 배회하는 경비병들이었다. 지금도 쉬지 않고 정원과 담 너머를 순찰하는 경비병의 횃불이 일렁거리며 지나갔다.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있을까. 조용히 하나씩 처리한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순찰을 하는 이들의 간격이 무척이나 짧았다. 모퉁이를 돌아서 오는 경비병이 다음 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다른 경비병이 그 뒤를 잇듯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경비 병력을 얼마나 심어 놓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가 잠깐 눈으로 본 것만 하더라도 서른이 넘는 모습이었다.


알에리 후작의 파티에 초대된 귀족들만 하더라도 스물이 훌쩍 넘는 수였다. 개중에는 알에리 후작과 같은 후작인 사람도 있었으며 백작위에 있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있었다. 당연히 그들이 데려온 호위 병력 덕분에 경비가 삼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비올렛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탈출할 방법을 모색했다.

똑똑, 등 뒤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렛은 고개를 돌려 소리를  주인을 바라보고는 콱 인상을 찌푸렸다.

“꺼져.”

“이런, 오랜만에 보는 주인에게 너무 쌀쌀맞군.”

날카로운 말에 알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비올렛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정원을 바라봤다.

사흘 동안 저 짜증 나는 얼굴을 안 봐서 기분이 좋았는데 순식간에 잡쳤다. 왜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 옆으로 성큼 알폰스가 다가왔다.


비올렛은 짜증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왜 옆에 오고 지랄이야?”


“주인이 노예에게 가까이 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던가?”


능글맞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전격을 뿜는 족쇄만 아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한 대 치는 거였는데.


“눈 밑이 거뭇한 게 밤 중에 재밌는 짓이라도 하나 보지?”


그렇게 말하며 알폰스는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펼치더니 그사이를 맞부딪히는 듯한 손짓을 했다.


“미친 새끼가.”

비올렛은 잠시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깨달은  얼굴을 팍 굳히더니 난간 위를 내리쳤다. 콰직, 난간이 부서지며 파편이 정원으로 떨어졌다. 아래를 순찰하던 경비병이 깜짝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냐?!”

“미안하네, 다치지 않았나?”

“아, 예, 괜찮습니다만… 혹시 신분을 밝혀주실  있으십니까?”

“알폰스 메르씨엘 남작일세. 난간이 오래되어서 약해진 것 같군. 손을 대니 금방 부서져 버렸어.”

“아… 그렇군요. 날이 밝으면 사용인들에게 알리겠습니다. 날이 추운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 수고하게.”


당황했던 경비병은 침착하게 말하는 알폰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다시 순찰을 재개했다.


모퉁이를 돌며 사라지는 경비병의 모습을 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비올렛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화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예민하게 반응하기는, 농담이다.”


“나랑 이릴은 네 놈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그래, 그럼 죽인 사람이 꿈에 나와서 잠이 안 오나?”

그 말에 비올렛이 잠시 몸을 굳혔다. 알폰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사 중에도 그런 놈들이 있지. 사람을 처음 죽이고 몇 날 며칠을 악몽에 시달리는 녀석들이. 동화 속 기사의 모습을 상상하고 들어온 놈들이 으레 그랬지."


품에서 연초를 하나 꺼내 입에 문 알폰스가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어둠속에서 별이 하나 추가되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이 절반, 억지로 붙어 있다가 결국 죄악감에 견디지 못하고 전투를 빙자한 자살을 하는 게 또다시 절반."


"..."


"그 모든 것을 견디고서야 비로소 한 줌의 기사가 완성되지. 주군의 명을 따라 필요한 목숨과 필요 없는 목숨을 나누고 그것을 처리하는 살인마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고작 사람 한 명 죽인 걸로 유난 떨지 말라는 거다."


알폰스는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비올렛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고작 사람 한 명 죽은 걸로 유난 떨지 말라고?”


“그래.”


“네게는, 사람 목숨이 고작이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거냐?”


“네가 죽인 녀석은 그렇게 말해도 되는 가치가 없는 놈이었다.”


애초에 그럴 용도로 알에리 후작이 뽑은 것이었다. 발에 차이고 차이는 견습 기사에 뒷배도 없는 평민. 그를 뽑은 기사조차도 알에리 후작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으니 안성맞춤인 인선이었다.


“가치라니, 그런…”

“사람 목숨이 평등하다는 멍청한 소리는 하지 않길 바라마. 사람의 목숨은 절대로 평등하지 않아. 네 목숨보다 내 목숨의 가치가 높고, 그 견습 기사의 목숨이  목숨보다 가치가 낮다는 것처럼. 그리고.”


알폰스는 비올렛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뒷걸음질 쳤으나 좁은 발코니에서 따라 잡히는 것은 금방이었다. 알폰스의 두꺼운 팔이 비올렛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머리카락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비올렛의 턱이 하늘을 향했다.

“윽!”

“그 가치 덕분에 네 무례를 눈감아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으면 좋겠군, 비올렛.”


“우붑?!”

곧바로 키스해오는 모습에 비올렛이 놀라 발버둥 쳤으나 힘으로 알폰스를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로 오랫동안 이어지는 입맞춤에 비올렛의 눈가에 눈물이 맺힐 때쯤에서야 겨우 알폰스는 떨어지며 말했다.

“더는 날 실망하게 만들지 마라.”


그리고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얇은 잠옷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가 무슨 짓을  생각인지 깨달은 비올렛이 사색이 되었으나 이미 스위치가 들어간 알폰스를 막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발코니에서 달콤한 신음이 울려 퍼지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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