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화 〉39화입니다 (39/75)



〈 39화 〉39화입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증기 사이로 비올렛이 바들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문고리를 잡고 열려다가 상기된 얼굴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머리에 커다란 혹을 단 샬럿이 욕조 위로 둥실 떠 있었다. 비올렛은 수면 아래로 얼굴을 향하고 있는 그녀를 보다가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죽었냐?”


보글보글. 수면 위로 공기 방울이 올라왔다. 죽지는 않았나. 그것을 확인한 비올렛이 주저 없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별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평소처럼 알폰스와의 정사로 힘이 빠진 그녀를 샬럿이 욕실이 딸린 방으로 데려와 씻는 걸 도와줬을 뿐이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약간의 사심이 들어갔고 비올렛은 참지 않고 응징했다.

욕실을 벗어나는 다리가 부들거리며 떨리는 것은 힘이 없어서도 있었지만 그런 이유도 있었다. 걸음마다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을 물들였다. 몸에서 흐르는 물기를 닦을 생각도 없이 침대로 뛰어들었다.

‘지쳤다…’

비올렛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휴식이 절실했다. 이유와 목적지를 모른 채로 알폰스 손에 이끌려 마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범해졌나. 횟수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적어도 기절하듯 잠에서 깨어나 다시 기절하는 순간까지도 그의 자지를 품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식사 시간에는 건들지 않는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까. 최대한 느릿하게 먹으면서 휴식 아닌 휴식을 취했지만, 시간은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도 쉴 틈 없이 붙들려 자지에 박혔다.

게다가 부끄러움도 없는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범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본 사람이라고는 마부 둘과 부관과 샬럿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심이 들기 충분했다.

심지어 앙앙거리며 몇 번이나절정에 달하지 않았나.

‘젠장!’

다시금 몰려오는 수치심에 주먹으로 연신 침대보를 두드렸다. 팡팡 소리가 들리며 털이 날렸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감정을 소화해낼 수 없었다.

아니 더 좋은 방법이 있기는 했다. 수치심의 원인인 알폰스를 제거하는 것.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꿎은 침대를 반쯤 부숴놓고 나서야 얼굴의 화끈거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


그리고는 뒤늦게 깨달아버렸다. 자신이 누워쉴 침대를 제 손으로 부숴버렸다는 것을. 내려친 주먹의 모양으로  패여 있는 침대를 보며 허망한 눈으로 바라봤다.

비올렛은 한숨을  내쉬며 털투성이가 된 침대 위로 올라갔다. 부서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바닥보다는 푹신했다. 게다가 때린 곳에서 멀어지면 그나마 멀쩡했다. 알폰스의 저택에서 봤던 침대만큼이나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침대 위에서 흩날리던 털이 물기 젖은 피부에 달라붙었다. 간지러웠으나 밀려오는 졸음에 비하면새 발의 피와 마찬가지였다. 베개에 머리를 뉘니 곧바로 눈이 감겨왔다.

침대 위로 조용히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

욕조에서 둥실 떠 있던 샬럿의 몸이 움찔하더니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푸하-! 콜록, 콜록! 아윽…”


연신 물을 토해내며 기침하다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수리 근처를 더듬으니 커다란 혹이 만져졌다. 만질 때마다 몸을 움찔하게 되는 고통이 밀려와서 작게 눈물지었다.

“정말 너무해요!”

샬럿은 억울했다. 알폰스랑은 몇 번이나 몸을 섞었으면서 제게는 가슴 조금 만진 걸로 주먹을 휘두르다니 말이다. 비올렛이 들었으면 어처구니가 없어서 혹을 하나 더 만들어줬을 생각이었다.

혼자 처연하게잉잉거리던 샬럿은 돌아오는 목소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주위를 둘러봤다. 욕실을 가득 채우던 증기가 없었고 몸을 담고 있는 물이 차가웠다.

당연하게도 비올렛은 없었다.

“먼저 나가버렸나요…”

기절한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샬럿은 욕조에서 몸을 빠져나와 가볍게 머리를 털었다.

홀딱 젖었던 메이드복이 방금 세탁한 것처럼 뽀송뽀송하게 변했고 머리 위에 크게 나와 있던 혹은 언제 있었냐는   들어갔다.

바닥에 떨어진 안경의 물기를 털어내 쓰고는 욕실을 나섰다.

“오…”


개판이다. 고급스러운 방이 온통  범벅인 것을  샬럿이 작게 탄식했다.

허울뿐인 메이드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도 사용인의 고충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방을 치우게 될 이름 모를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이 참사를 일으킨 사람을 찾았다.

방을 털로 가득 채운 범인은 부서진 침대 위에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온몸에 하얀 털을 붙이고 잠들고 있는 모습은 그녀의 종족처럼 토끼를 닮아 있었다. 은밀한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는 것을  샬럿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침대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긴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샬럿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손을 뻗어 비올렛의 볼을 쓰다듬었다.  번을 만져도 부드럽고 탄력이 있는 피부였다.

그렇게 만지작거리던 손길이 천천히 입술을 향했다. 혈색이 감도는 붉은 입술. 이 작은 입술로 몇 번이고 제 주인인 알폰스와 키스를 나눴을 것이었다.

가느다란 엄지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샬럿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뭐하냐.”

“엣.”


언제 감겨 있었냐는 듯 자색빛 눈동자가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샬럿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이마로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고개가 확 뒤로 꺾였다. 샬럿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끼야악!”

“쓰읍… 돌머리냐?”

샬럿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조금 문지를 뿐인 비올렛과는 다르게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땅바닥을 구르는 샬럿을 대충 걷어차고 몸을 일으킨 비올렛이 작게 기지개를 켰다.

아주 조금이지만 잠을 잔 덕분인지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여전히 피곤하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이, 일어나 계셨네요…?”

“누구 덕분에 말이지.”

머리를 부여잡고 비척거리며 일어난 샬럿이 어색하게 말했다. 비올렛은 몸에 붙어 있는 털을 떼어내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  없이 지긋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샬럿은 몸을 배배 꼬며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그녀를 구원해주는 이가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샬럿은 황급히 달려가 문을 열었다.

“네에, 누구신가요…?”


어라. 눈을 깜빡이며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가 헛것을 들었나 싶을 때였다.

앞치마를 꾸욱꾸욱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린 샬럿은 작게 꺅 소리를 질렀다.

“귀여워라.”

새까만 단발을 한 어린 메이드였다. 손으로 앞치마를 꾹 잡아당기던 그녀는 시선이 맞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샬럿은 어리숙한 종자를 귀엽게 바라보며 몸을 숙였다. 앞머리에 가려진 새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샬럿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메이드는 아무 말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마치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것처럼 꾹꾹 잡아당겼다. 말없이 손을 잡아당기는 모습에 샬럿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렇게 데려가려는 건지.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샬럿은 어린 메이드의 얼굴을 붙잡았다. 갑작스레 붙잡힌 탓인지 눈이 동그랗게 떠졌으나 아무렇지 않게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양 볼을 손으로 눌렀다.

‘아하…’

작게 벌어진 입안으로 보인 광경에 샬럿이 속으로 납득했다.

혀가 없다. 이러니 말을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녀는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다.

‘정말이지, 인간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네요.’

같은 동족에게도 이런 잔혹한 일을 저지르니 말이다. 샬럿은 손을놓고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모시는 분의 준비가 덜 끝났거든요.”

메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샬럿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참.”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작게 손뼉을 치며 내뱉었다. 메이드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것도 뭐 하니,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아니, 들어오는 게 좋겠어요.”

거부를 하기도 전에 손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왔다. 메이드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샬럿은 그 표정에 담긴 의미를읽을  있었다.

“괜찮아요. 제가 모시고 있는 분은 격의를 따지지 않으시거든요.”

고개를 돌려 비올렛을 바라봤다.

“그렇죠?”

“...언제부터 네가 모시는 분이 내가 된 거냐?”

“뭐어, 지금은 알폰스 님도  계시니까?”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샬럿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비올렛이 시선을 돌려 손을 잡고 있는 어린 메이드를 바라봤다.

새까만 머리와 눈동자. 그리운 특징에 저도 모르게 성큼 다가가 샬럿이 그랬던 것처럼 몸을 숙여 눈을 마주쳤다.

메이드는 훅 다가온 비올렛이 부담스러운지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뺐다. 비올렛은 그 모습에 더 다가가는 건 그만두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색 배치는 저가 살던 곳의 사람들과 비슷했지만, 이목구비는 전혀 닮지 않았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었으나 비올렛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


“...”


대답 없이 고개를 꾸벅인다. 비올렛은 샬럿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을  하는 아이예요.”

“이름은?”

“글쎄요, 저도 이곳에서 처음 보는 아이라…”


볼에 손을 올리며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아래에서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니어린 메이드가 품을 뒤지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찾던 것을 잡았는지 움켜쥔 손을 뻗어 비올렛에게 보여줬다.

군번줄처럼 짤랑거리는 목걸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비올렛은 그것을 노려보다 샬럿에게 말했다.

“이거 뭐라고 읽는 거야?”

배운 적도 없는 제국어를 읽을 수 있을  없었다.

“레니, 라고 하네요.”

샬럿이 그것을 읽자 레니라고 불린 메이드가 맞다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 인가. 역시 이름도 저가 살던 곳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비올렛은 못내 아쉬움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데?”

“글쎄요?”

당당하게도 말하는 모습에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샬럿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일단 옷을 입으셔야 하지 않겠어요?”

“옷? ...아.”


비올렛은 그제야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는 작게 탄식을 했다. 물론 상대가 어린 아이여서 다행이었지 만약 알폰스였다면… 몸을 잘게 떤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옷, 옷이라…”

입고 왔던 옷은 검은색 드레스였다. 그마저도 자신과 알폰스의 체액으로 범벅이 돼서 쓰레기나 다름없었으니 다른 옷을 입어야  것이었다.

드레스보단 바지를 입고 싶었다. 아래가 휑한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속옷을 입는 것도 아니니 더욱 그랬다. 물론 알폰스는 검을 배울 때가 아니면 그런 옷을 절대로 못 입게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쯧, 작게 혀를  비올렛이 샬럿에게 말했다.

“입을 옷이-”


“물론, 있지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드레스 하나를 손에 든 샬럿이 말했다. 입고 왔던 것과 비슷한 검은색이었다.

비올렛은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쓸데없이 철저하긴.”

“그 말은 저희 같은 종자들에게는 칭찬이랍니다?”


후후 웃는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레니는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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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에 수정된 장면이 있습니다.

알에리 후작이 레니에 대한 암시를 하는 대화가 삭제되고

이릴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이하 후기입니다.

당초 목적은 이번화에 이릴과 만나는 것이었지만... 쓰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내일은 진짜진짜 감격의 상봉을 시키겠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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