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8화입니다.(수정)
알에리 저택의 가장 깊숙이 숨겨진 방. 병사 두 명이 문을 지키고 있는 방 안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바깥에서 또각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발걸음은 문에서 멈추더니 병사와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은 느릿하게 눈을 뜨고 방으로 들어온 이를 바라봤다.
발걸음의 주인은 어린 메이드였다.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검은 단발에 아직 젖살이 완전히 빠지지 않아 조금 둥근 얼굴. 나이로 치자면 아직 지학에도 이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메이드는 침대에 몸을 일으켜 앉아 있는 여인을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녀 역시도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땅을 디뎠다. 메이드는 황급히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우물과 이어진 수도관의 꼭지를 틀어 욕조에 물을 채우고 온도를 높이며 유지해주는 돌과 주인인 알에리 후작이 좋아하는 아마란스의 꽃을 수면 위에 가득 채워 넣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마란스 향이 가득 풍겼다. 어린 메이드는 기분을 안정시켜주는 향에 잠시 울적한 얼굴이 되었으나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화들짝 고치며 몸을 일으켰다. 혹여 저가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 봤을까, 노호성이 들려오지 않을까 전전긍긍 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여인은 쓰게 웃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해주었지만, 여전히 메이드는 자신을 어려워했다.
그렇기에 여인은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작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렇게 준비해줘서.”
머리에 손이 올라오자 움찔하던 메이드는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얼굴을 붉히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결을 따라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 욕조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수면 위로 떠 올라있는 아마란스 사이로 여인의 몸이 가려졌다. 따뜻한 온기가 몸을 가득 채웠다.
“같이 들어오시겠어요?”
목 아래까지 깊숙이 빠져든 그녀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메이드는 잠시 이해를 하지 못한 눈을 하더니 이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워서 여인은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후후… 농담이에요.”
놀림 받았다는 걸 깨달은 메이드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몸치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순백의 드레스를 몸에 걸친 여인은 거울 앞에서 가만히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메이드는 그녀가 신경 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빗으로 머리카락을 빗었다.
백금의 실타래가 부드럽게 쓸어 내려졌다. 아마란스 향이 은은히 풍겨와 절로 얼굴을 가까이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린 메이드는 흘긋 거울 너머로 여인을 바라봤다. 어느새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심스레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얼굴 가까이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데도 윤기가 흐르며 색이 밝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새까만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메이드는 여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조심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실눈으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머리를 빗고 있으니 바깥이 부산스러웠다. 병사들이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였고 그것을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받았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무인의 몸을 가진 노인이 들어오자 메이드가 화들짝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여인은 여전히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그것을 보더니 너털 웃으며 말했다.
“아직 준비 중이었나?”
“아뇨, 적절하게 오셨어요. 이제 막 끝난 참이었으니까요.”
여인은 여상한 어투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잘됐네. 마침 소개를 해줄 귀한 손님이 왔으니 말이지.”
“...귀한 손님?”
“메르씨엘 남작, 이리 들어 오게.”
노인의 말에 뚜벅거리며 한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 남자는…?’
여인은 남자의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디선가 만났던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노인이 말했다.
“이릴 양, 이 친구는 알폰스 메르씨엘 남작일세.”
“처음 뵙겠습니다, 메르씨엘 남작님.”
이릴은 손으로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작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는 손등을 내밀어 그를 바라봤다.
그 귀족적인 몸짓에 알폰스의 눈에 호기심이 차올랐다.
그는 새하얀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이릴.”
뜨거움이 손등을 타고 올라왔다. 이릴은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잠시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언젠가의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메르씨엘 남작의 얼굴에 칠흑의 나비 가면이 덧씌어졌다. 서커스장의 강렬한 조명 아래에서 제 여린 친우를 무참히 범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누엘…”
아니, 지금은 알폰스 메르씨엘 남작이라고 칭해야할까.
이릴은 침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영진, 그녀가 괜찮게 지내고 있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아직 살아 있는지. 하지만 그것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뜨거움이 손등에서 멀어졌다.
그녀의 중얼거림은 알폰스 역시 들었으나 아는체 하지 않았다. 다만 후작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꽤 예법에 해박하신 분이군요. 후작님께서 가르치신 겁니까?”
“가르치지는 않았네. 원래 알고 있었지.”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전대 힙킨스 남작의 사생아일세.”
힙킨스 남작.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아마 용사가 머무는 저택의 주인이었던가. 헌데 전대라니. 그 사이에 가주가 바뀌기라도 했다는 건가?
“전대, 라고 하심은?”
“이런 소식은 늦군. 가문을 유지할 돈이 없어서 작위를 팔았다네. 당대 힙킨스 남작은 평민 출생이야.”
그런 이유인가. 알폰스는 그 정도의 정보만으로도대강 사정을 알 수 있었다.
평범한 귀족이라면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쉽게 작위를 팔거나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귀족은 짧게는 몇십년에서 길게는 제국이 건국했을 때부터 이어진 역사를 가진 족속들이었다.
작위를 산다고 해서 귀족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었다. 그렇기에 가문을 통째로 사는, 데릴사위의 개념으로 들어와 후계자를 낳고 작위를 세습하는 방식을 사용하지만 이 역시도 귀족들의 눈에는 인정되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보통 작위를 사고판다고 하면 제국 변두리의 가난한 지방 귀족의 것을 이야기했다. 중앙 귀족의 것은 당연히 꿈도 못꾸는 것이었다.
물론 지방 귀족이라고 해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도 귀족의 일부분이었기에 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중앙 귀족과 얽혀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다만 힙킨스 남작이 그렇게 쉽게 작위를 팔아넘겼다면 이유는 간단했다.
‘보나 마나 알에리 후작이 무슨 수작질을 한 것이겠지.’
그가 가진 권력이라면 사람 하나 빼 오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인데 신중해도 너무 신중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었다.
생각을 끝낸 알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야기는 알겠습니다.”
이릴은 불안한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바라봤다. 귀가 좋은 그녀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낮춰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못내 가슴을 떨리게 했다.
그녀는 알에리 후작을 처음 봤을 때, 아버지가 연줄을 통해서 자신을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연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테 라움 알에리가 누구인가. 기사 중의 기사라 칭송받으며 제국을 구한 위대한 전쟁 영웅이자 여신 라움의 화신, 용사를 시조로 두고 있는 제국 비젠 황실의 적합한 자손. 황제와 황태자를 다음으로 만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이가 아닌가.
그런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었기에 분명 불의에 분노하리라 생각했다.
‘순혈이었으면 더욱 좋았으련만.’
그러나 알에리 후작은 그렇게 말했다. 하프가 아닌 순혈을 원했노라고.
동화에서 봤던 것처럼 정의롭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순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부패한 귀족 중 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릴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그가 무슨 요구를 하더라도 순종하며 받아들일 생각이었고 죽으라고 한다면, 죽을 생각이었다.
체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녀는 삶을 체념했다.
하지만 알에리 후작은 이릴을 건들지 않았다. 간단한 말동무나 밤시중 정도로만 사용했고 밤시중조차도 잠들기 전까지 곁에 있어 주는 정도였다.
단 한 순간도 알에리 후작은 이릴을 정욕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묻지 않았다.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누엘, 메르씨엘 남작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그는 난폭하고 정력적인 남자였다. 정욕을 숨기지 않았고 숨길 필요도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알에리 후작이 메르씨엘 남작을 제게 소개해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릴의 머릿속에서는 끔찍한 상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날만을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안도하고 있는 자신을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파멸시키기 위해서…
“그러고 보니 제가 데리고 왔던 녀석도 소개해 드렸어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군요.”
“그 백토 공주 말인가? 보아하니 성처리용인 것 같은데 소개를 한다는 걸 보면 단순히 그런 용도는 아닌가 보군.”
‘백토 공주라고?’
그 말에 상념에 빠져 있던 이릴이 반응했다. 알폰스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는 합니다만 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검을 가르친다고? 전에 그런 노예가 있었지 않았나?”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아쉽군. 그 친구도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지.”
알폰스는 가끔 전투 노예를 사와 검을 가르치고는 했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 그러는지는 몰랐으나 대부분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후작은 몇 달 전에 보았던 건장한 체구의 청년을 떠올렸다. 검을 쓰는 것이 나쁘지 않아서 꽤 기대를 했는데 죽어버렸다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는 마차 안에서 널브러져 있던 여인의 몸을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선호하는 체형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외관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생각보다 쓸만한 녀석이더군요.”
“흐음…”
후작은 콧수염을 만지며 작게 숨을 토해냈다.
“후작님.”
이릴은 두 사람의 대화를 안절부절못하며 듣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지?”
“저도 두 분과 동행해도 될까요…?”
알폰스가 데리고 왔다던 백토 공주를 눈으로 꼭 보고 싶었다. 아닐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영진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간절한 시선에 후작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제게 부탁하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흠, 부탁이라고 할 필요도 없지. 원래 데리고 갈 생각이었으니.”
그 말에 이릴의 얼굴이 환해졌다. 후작은 고개를 돌려 알폰스에게 물었다.
“남작도 함께 가지. 귀한 손님이 온다고 일러두어서 요리사가 꽤 솜씨를 발휘했을 게야.”
“저야 영광이지요.”
“그럼… 아, 그렇지 깜빡 잊고 있었군.”
몸을 돌려 바깥으로 향하던 후작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다시금 몸을 돌렸다.
“레니, 일어나거라.”
후작이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무릎을 꿇고 있던 어린 메이드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으나 악착 같이버텼다. 희멀건 얼굴 위로 식은땀이 한가득이었다.
“가서 남작의 일행을 찾아, 그리고 식당으로 모셔오거라.”
레니라 불린 메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깥으로 향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군요.”
“필요해서 구했네. 의식에는 단 한 점의 실수도 없어야 할테니까.”
후작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알폰스는 이릴을 바라봤다.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마주친 그녀가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뭔가요?”
“아니, 아무것도.”
비올렛이 떠올랐다. 분명 저 둘은 각별한 사이였지.
“즐거운 연회가 되겠군요.”
“기대되는가?”
“예, 무척이나.”
알폰스는 얼굴에 미소를 담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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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