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32화입니다.
알폰스는 사람을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었다. 그는 가르치는내내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임했다.
비올렛은 그것을 꽤 잘 따랐다. 자세를 지적받을 때마다 짜증으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군소리를 내뱉지 않고 곧장 고쳤다.
어쨌든 배우는 입장이 된 몸이었다. 그녀는 심호흡하며 화를 다스렸다. 그리고 자세를 교정하는 척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주저 없이 칼을 휘둘렀다.
“어이쿠, 위험해라.”
당연하게도 검은 허공을 갈랐다.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으로 검을 피한 알폰스가 과장된 몸짓으로 놀라며 말했다.
그 모습에 결국 비올렛은 짜증 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그냥 한 판 떠 씹새야.”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기는 당연히 승낙했다. 어차피 자신에게 선택지라는 건 없었다. 내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알폰스가 자신을 건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정력적이었고 한참 때의 남자였다.
샬럿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고작 한 여자와 섹스를 할 인간은 아니었다. 분명히 언제라도 제게 손을 뻗칠 게 분명했다.
비올렛은 자신이 여자로 변했지만, 여전히 남자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남자와 성행위를 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굳이 저가 남자여서가 아니더라도 알폰스와는 절대로 그런 짓을하기 싫었다. 차라리 목숨을 걸고 그를 죽여버리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가? 비올렛은 아직 여력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게 온전히 마음을 놓고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이미 지났다. 알폰스는 자신이 완전히 굴복하기 전까지 방심하지 않을 것이었다. 목숨을 건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이야기였다. 혹시 몰랐다. 대련에서 운 좋게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유가 될 수 있을지도.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비올렛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알폰스에게 검을 겨눴다.
“검 들어. 그 쓸모없는 손을 잘라주지.”
“성급하긴, 아직 시간은 많은데 말이지.”
알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목검을 잡았다.
수련을 시작한 지 두 시간도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
대련.
복싱을 배울 적에 했던 스파링과 비슷한 것이었다. 사실상 말이 연습이지 실제 대회와 다름없던 것처럼 했던 것이 기억났다.
처음에는 근처에 다니던 관원들끼리 붙다가, 조금 지나서는 근처 체육관에서 대회에 출전한다는 사람들과 했었다.
그러다 관장 아들과만 했었다. 그가 아니면 주먹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다들 자신과 한 번 주먹을 섞고 나면 질겁하며 피해 다녔다.
너무 난폭하다던가 그런 소리를 했던 것 같다. 이래서 링 안에서만 싸우는 놈들이란.
떠오른 기억을 갈무리하고 비올렛은 검을 두 손으로 잡아 대각선으로 향했다. 다리를 앞으로 내딛고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언제든지 튀어 나갈 수 있는 자세였다.
알폰스는 그 자세를 1번 자세라고 불렀다. 스트레이트니 라이트 훅이니 하는 것보다 간단한 이름이었다. 그것만은 마음에 들었다.
“검을 들고 전투를 할 때 항상 비슷한체급의 녀석과 싸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세를 잡고 있으니 알폰스가 말했다.
“너보다 큰 놈과 싸울 수도, 어쩌면 작은놈보다 싸울 수도 있겠지. 후자는 그리 많지 않겠지만 말이야.”
주절주절 시끄럽구만. 빨리 덤비라는 눈으로 비올렛이 바라봤다. 그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련은 다르지. 어디까지나 감각을 키우기 위한 연습의 연장선. 굳이 실제 전장처럼 싸울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한 손으로 상대해 주마.”
“하!”
비올렛은 기가 찬다는 듯 짧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말했다.
“그래, 한 손 밖에 없는 장애인으로 만들어 주지.”
알폰스는 대답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반대 손을 허리 뒤로한 것을 제외하면 그녀와 같은 1번 자세였다.
비올렛은 어쩐지 기시감이 떠오르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이것과 비슷한일을 경험했던 것 같았다.
아, 하고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서커스장에서의 모습과 유사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복싱 자세를 잡던 자신과 그것을 비웃듯 같은 자세를 취하는 알폰스의모습과 말이다. 일부러 제약을 걸던 것도 말이다.
비틀린 미소가 입에 걸린다. 분노로 일렁거리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래, 이런 식으로 상대를 우롱해 왔다는 거 겠지.
숨을 길게 내쉬며 몸을 이완시켰다. 손에 쥔 검의 무게가 어쩐지 미약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알폰스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생각했다. 그녀라면 분명 이런 모욕을 참지 않고 곧바로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올렛은 단순하게 말해서 다혈질적이었고 충동적이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그것을 교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조금 전까지는 그럴 기미가 있었지만, 순식간에 사라졌다.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줏빛 눈동자 너머로 조용히 타오르는 열기가 보였다.
분노란 감정은 전사를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표출하는 것은 오히려 이성을 잃고 약점을 노출해대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아군을 잃고, 가족을 잃은 놈들이 흔히 하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 놈들은 머지않아 시체로 전장을 뒹군다.
그러나 제어할 수 있는 분노라면 이야기가다르다. 냉철한 이성으로 주위를 살피고 검로에 감정을 새긴다. 오롯이 눈앞의 적을 배제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차가운 머리와 반대로 뜨거운 가슴. 그것을 비올렛은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손을 잘라가겠다고 말하던 것 치고는 행동이 굼뜨군.아니면 평생 이대로 대치하고 있을 건가?”
알폰스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런 도발에도 비올렛은 숨을 고르듯 길게 호흡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일시적인 건 아닌가.’
미소가 가라앉는다. 알폰스는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간격은순식간에 좁혀들어갔다. 종으로 내려 찍히는 검이 비올렛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무와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세를 낮춰 검을 들어 올린 비올렛과 알폰스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본래라면 이뤄질 수 없는 구도였다. 1번 자세는 내려베기에 특화된 자세였고 두 사람의 체격 차이가 크게 나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건 알폰스가 그녀를 상대로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차이로 패배시킨다면 그것으로 얻어가는 것은 없다. 건방진 신입을 상대로 기량 차이를 인지시켜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비올렛에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알폰스의 실력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을 테니까.
실질적으로 현재 알폰스는 비올렛보다 좀 더 강한 정도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제힘을 숨기고 있다면 기회를 노려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상황.
알폰스는그것을 기꺼이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테지.'
“흡!”
힘겨루기는 금방 깨어졌다. 비올렛이 숨을 토해내며 검을 튕겨냈다. 알폰스는 부러 큰 움직임을 보이며 튕겨 나간 검을 높이 들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검이 그렇게 드러난 허점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찌르기다. 고작 검을 배우기 시작한 지 두 시간밖에 안됐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검은 베기 위한 것이지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언제 높이 떴냐는 홰치듯 빠르게 목검이 내려 찍혔다.
-따악!
“아윽!”
목검의 끝이 정확하게 손목을 강타했다. 검이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비올렛은 붉어진 손목을 매만지며 알폰스를 노려봤다.
알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검으로 찌르기를 하는 건 기량이 상대보다 좋을 때, 마물을 잡을 때 쓰는 거라고.”
“칫.”
“처음 공격에서도 나와 힘겨루기를 해서는 안 됐다. 곧바로 상대가 안 되는 걸 깨닫고 쳐내는 판단은 나쁘지 않았지만, 만약 내가 힘을 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머리에 칼이 박혔을 거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비올렛은 짜증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힘을 빼고 있었다는 건 검을 맞붙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첫 대면에서 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몸으로 체험한 게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알폰스가 강하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일을 벌인 건, 알폰스라면 분명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재미를 추구하는 그의 성격이라면 말이다. 그것을 노려 한 방 먹여줄 생각이었다.
‘실패했지만 말이지.’
“다시 검을 들어라.”
“또 한다고?”
“이대로 끝내도 좋다면 나는 상관없다만.”
“그럴 리가.”
비올렛은 냉큼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손목이 아릿하게 저려왔으나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군.”
사용인이 가져온 물을 마시며 알폰스가 중얼거렸다. 수려한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받아든 수건으로 가볍게 그것을 닦아 내고 비올렛에게로 던졌다. 사뿐하게 얼굴 위로 안착했다. 그것을 받아들 힘도 없는 것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오늘하루 검을 맞댄 것만 해도 백여 합에 가까웠다. 체력적으로 자신이 있는 알폰스가 살짝 버겁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보다 못한 비올렛이 어떨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숫제 죽을 맛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에 모래알이 들어오는 기분이었고 검을 잡았던 손은 멋대로 떨리고아팠다. 손바닥이 조금 까져서 따갑기도 했다. 그리고 목검으로 두들겨진 부위가 욱신거려서 아팠다.
살짝 축축한 수건에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얼굴을 닦았다. 거의 물로 세수를 한 수준이었다. 그리고는 수건을 치우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조금만 잘했더라면 이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자신은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기량의 차이가 압도적이었을 뿐이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체력적으로도 힘들어서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을 정도였으니까.
우선 체력을 기르는 게 먼저인 걸까.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시선 한구석으로 알폰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는 건 발소리로 들어 알았지만,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나는 추태를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폰스는 지긋이 비올렛을 바라봤다.
그녀는 알까. 땀을 많이 흘린 탓에 옷이 몸에 달라붙어 몸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젖은 셔츠 아래로 새하얀 알가슴이 여과 없이 보인다는 것을.
게다가 몸을 일으키려는 것처럼 상체를 든 모습은 묘하게 색기 있는 자세가 되어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 모를 것이었다. 비올렛 묘한 부분에서 눈치가 없는 것 같았으니까.
알폰스는 손에 인장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군말 없이 팔을 내어준다. 힘드니까 괜히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쇠가 맞물리는 소리를 내며 손목에 채워졌다.
비올렛은 이제는 퍽 익숙한 손목에 무게를 느끼며 젖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렸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영 귀찮았다. 나중에 돌아가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그것을 보며 알폰스가 툭 내뱉었다.
“유혹하는 건가?”
“뭔 개소리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절로 욕이 튀어 나갔다. 진지한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알폰스를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땀으로 옷이 젖어 축축한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래서야 욕실까지 가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우왁!”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몸이 번쩍 들렸다. 알폰스가 오금에 팔을 걸어 쑥 들더니 다른 팔로 등을 바친 것이었다. 으레 공주님 안기라고 부르는 그것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당장날 내려놔!”
“걸어갈 힘도 없어 보이길래 도와주는 것뿐이다.”
“네 녀석의 도움 같은 건…!”
“내기의 내용, 잊지 않았겠지?”
비올렛의 입이 꾹 다물렸다. 대련을 하는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대련에서 졌을 때는 노예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한다는 것. 다음 대련 전까지는 그것을 지켜야 했다.
그것이 내기의 내용이었으니까.
“젠장, 마음대로 해.”
“그럴 생각이다만.”
알폰스는 웃으며 답했다.
두 사람은 저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