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30화입니다.
비올렛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공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 품 안에 안겨있는 알을 바라봤다.
품에 한 아름 안겨 있는 새하얀 알은 어둠 속에서도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묘하게 따뜻하기도 해서 알에 기대니 안쪽에서 두근거리는 박동이 느껴졌다.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느낌에 비올렛의 표정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운 감각이었다. 마치 원래부터 있어야 할 것을 이제야 되찾은 기분이었다.
이대로 여기서 쭉 있고 싶었다. 알이 부화할 때까지 계속해서, 영원토록.
‘영진, 일어나.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이릴?”
비올렛은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어둠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릴, 어디야?”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니? 여기가 어디… 윽.”
비올렛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래, 자신은 분명 알폰스의 저택에 있었다. 이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공간이 아니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반투명한 모습의 이릴이 다시 한번 말했다.
‘여기에 있으면 안 돼.’
그 순간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추락하는 부유감을 느끼며 비올렛이 하늘을 바라봤다.
허공에 떠오른 새하얀 알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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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천장이다. 아니, 아주 낯설지는 않은가. 비올렛은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뒤척거렸다.
그리고 옆에서 자신을 향해 돌아보고 있던 새빨간 눈동자와 마주쳤다.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며 그녀가 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네가 왜 여기 있어?”
“당연히 비올렛을 깨우러 왔죠.”
그럼 깨우면 될 것이지 뭣 하러 사람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단 말인가.
“5분 뒤에 깨워.”
비올렛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기분이 뒤숭숭했다. 간밤에 꿈을 꾼 것 같은데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꿈에서 느낀 감정만이 남아 심기를 어지럽혔다. 다시 잠들려는 찰나 등 뒤로 샬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우셔라. 그렇게 뜨거운 밤을 함께 보내놓고 말이죠.”
“뜨거운 밤은 개뿔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비올렛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 아래로 감춰져 있던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제게 옷을 벗고 자는 버릇이 있던가? 단언하건대 그런 버릇은 없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참, 벌써 잊어버리신 건가요? 어제의 일을?”
방금까지는 그랬지만 이불을 들쳤을 때부터 기억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몸이 달아올라 성욕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 샬럿과 알폰스의 정사를 보며 자위했던 것.
그리고 샬럿에게 마구 자극당해서 절정에 이르렀던 것까지 말이다. 단숨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스팀이 뿜어져 나올 것처럼 붉어져 있는 비올렛의 모습을 보며 샬럿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젯밤의 비올렛은 정말로 귀여웠다고요? 저를 붙잡으면서 ‘시럿♥ 가고 싶지 않아♥’ 하면서… 우앗.”
“그런 말 까진 안 했어!”
비올렛은 화를 내며 손에 잡히는 것을 던졌다. 묵직한 베개가 샬럿에게 날아들었지만, 그녀는 유려한 몸짓으로 굴러 침대 바깥으로 빠져나가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언제 놀렸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좀 더 주무시겠어요? 아니면 목욕을 하시고 아침 식사를 하시겠어요? 그것도 아니라면… 저?”
샬럿은 옷깃을 내리며 요염하게 비올렛을 바라봤다.
“지랄.”
그것을 한마디로 일축한 비올렛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어라?’
이게 안 먹히네. 샬럿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료 마법까지 사용한 상태였다. 그녀의 주인인 알폰스 역시도 걸리지는 않을 정도로 저급한 마법이었으나 어제 밤으로 쾌락을 알았을 비올렛이 보일 반응은 아니었다.
항마의 체질일지도. 샬럿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비올렛은 속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거부해야 함이 옳았지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막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젯밤 샬럿이 제게 해주었던 행동들은 분명 기분이 좋았다. 좋았다 정도로 끝날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일선을 넘어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몰랐다.
‘어제처럼 몸이 뜨겁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약 어젯밤처럼 계속 몸이 달아올라 있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졌다. 비올렛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옷을 찾았다. 그런 그녀의 뒤로 샬럿이 슬며시 다가와 껴안았다.
“뭘 그렇게 찾, 켁!”
“아, 깜짝이야.”
비올렛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안색이 창백해진 샬럿이 팔로 복부를 부여잡으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몸에 닿는 것에 놀라서 팔꿈치를 휘둘러 버렸다. 그녀는 별로 미안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냐?”
“핫, 하하, 손이 좀 매우시, 욱, 내요…”
자기도 모르게 공격한 거라 힘 조절을 못했는데 헛구역질하는 걸로 버티는 걸 보니 생각보다 몸이 튼튼한 것 같았다.
하기야, 알폰스와 그렇게 떡을 쳐대려면 저 정도는 돼야 버틸 만 할 테지.
‘무슨 힘이…!’
비올렛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샬럿은 속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방심을 했다고 하나 제게 이 정도의 타격을 줄 수 있을 줄이야. 물론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데다 손목에 차고 있는 노예의 인장을 보고 전투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위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샬럿은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눌러 내렸다.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애써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그래서, 뭘 찾고, 콜록, 계시나요?”
“어제 입었던 옷. 계속 알몸으로 있을 순 없으니까 말이지. 그보다 어디서 무슨 냄새 나는 것 같지 않아? 마치 피비린내 같은…”
“착각이에요.”
코도좋으셔라. 비올렛의 말에 샬럿은 슬그머니 피가 묻은 손수건을 치마 밑으로 떨어뜨렸다. 꾸물텅 거리며 검은 물체가 그것을 홱 감췄다.
“그런가?”
“그렇답니다.”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입으셨던 옷은 제가 수거했어요."
"사람이 멀쩡히 입고 있는 걸 왜 가져가?"
"그렇지만 푹 젖어서 세탁하지 않으면 얼룩이 졌을걸요?"
"푹 젖다니 말도 안 되는…"
거기까지 말하던 비올렛은 무언가 생각하다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덮었다.
샬럿이 웃으며 말했다.
"어젠 큰일이었죠. 바닥에도 한껏…"
"그만. 옷을 왜 가져갔는지 알겠으니 말하지 마. 그럼 다른 옷을 줘."
"그전에 먼저 씻으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만 욕조에 채워.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정말로 혼자 하실 수 있으신가요?"
걱정된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게 뻔히 보였다. 샬럿 역시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비올렛은 대놓고 말했다.
"네가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야속해라… 제가 얼마나 잘해드렸는데."
그러더니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들어 눈물을 찍는 시늉을 했다. 비올렛은 코웃음 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하기나 해.”
“네, 네 알았다구요. 정 없는 분.”
투덜거리며 가볍게 손뼉을 친다. 그 신호에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들어와 물을 퍼 날라 욕조를 채웠다.
“읏.”
자신이 나신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던 비올렛이 깜짝 놀라 몸을 가렸으나 다행히 그녀의 몸에 시선을 주는 이는 없었다.
“굳이 가릴 필요 없다고요?”
샬럿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어차피 비올렛은 주인님의 것이니까요. 이 저택에서 비올렛을 음란한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주인님밖에 없답니다?”
“뭐라는 거냐 이 색녀가.”
“색녀라니, 너무하세요.”
알폰스 다음으로 위험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별로 신빙성이 가지 않았다. 샬럿이 다가온 만큼 멀어진 비올렛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는 사이 욕조의 물이 가득 차올랐다. 사용인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다시 두 사람이 되었다.
샬럿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정말로 안 도와줘도 되겠어요?”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고 말지.”
“고양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비올렛은 아차 싶었다.
설마하니 이 세계에는 고양이가 없는 걸까. 그녀가 뭐라 물어보기 전에 욕실로 도망쳤다.
문을 닫으니 텁텁한 증기로 가득 찬 공간이 비올렛을 맞이했다.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내뱉고는 천천히 욕조로 다가갔다.
“으…”
욕조 안에서 넘실거리는 물을 보니 이빨이 절로 딱딱하고 떨려왔다. 다리는 금방이라도 힘이 풀릴 것 같았고 몸을 돌려 도망가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쳐들었다.
어쩌다 제가 이렇게 돼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고작 물을 보고 겁에 질려몸을 떠는 꼴이라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많은 일을 겪었다. 원래라면 경험하지도 않았을, 그러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을 경험해왔다. 이런 꼴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납득을 해야 했다.
제 안의 공포를 마주해야 했다. 그래야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
비올렛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욕조 안을 바라봤다. 이곳에는 알폰스도 조교사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갑자기 제 뒤통수를 잡고 물속에 쳐박아 숨이 막히고 폐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 잡고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다.
조심스럽게 다리를 집어넣었다. 물이 따스하게 피부를 감싸는 느낌이그렇게 소름 돋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고 어금니를 깨물어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아냈다.
두 다리 모두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비올렛은 심호흡을 하며 몸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비올렛.”
바깥에서 샬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렛은 깜짝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용을 쓰며 말했다.
“뭐, 뭐야 갑자기.”
“까먹고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말이죠.”
“뭔데?”
“목욕용품을 안 가지고 가셨어요.”
목욕용품이라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벽 너머를 바라봤으나 이내 곧 깨달았다. 이 욕실에는 저가는 비누나 샴푸 같은 것이 없었다.
저번에 목욕했을 때는 어떻게 했더라? 생각해보니 눈을 가리고 있어서 철저히 샬럿에게 맡겼었다.
비올렛은 짧게 욕지거리를 했다.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는 아직 물이 무섭게 느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때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도와드릴까요?”
샬럿이 말했다.
“...그냥 그 용품만 안으로 넣어줘.”
“에이, 제가 하는 편이 더 좋을 거 같은데 말이죠.”
“그냥, 두고 가.”
“네에.”
한 음절씩 끊어서 말하니 아쉽다는 듯 슬쩍 문이 열리며 바구니가 들어오고 닫혔다. 비올렛은 한숨을 내쉬며 욕조에서 빠져나와 바구니를 주워들었다.
“이게 다 뭐야?”
바구니 안에는 여러 종류의 병이 있었다. 대부분 액체의 형태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 말에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샬럿이 답했다.
“몸에 바르는 향유와 머리카락을 윤기 나게 해주는 기름, 그리고 장시간 물속에 있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바르는 곱게 간 분말과 입욕제, 그리고…”
“그만. 그렇게 말해도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역시 제가 도와드리는 게…”
“아니 들어오지 마. 거기서 알려줘.”
“정말깐깐하시네요.”
“네 행실을 되돌아보시지.”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귀엽게 느껴질 법도 하건만 비올렛은 딱 잘라 말했다.
샬럿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네에, 그럼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