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25화입니다.
“도착했군요.”
부관이 중얼거렸다. 비올렛은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보이는 저택을 바라봤다.
이야기로 들었던 메르씨엘 저택이었다. 확실히 돈이 많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건물에서 광이 나는 것 같았다.
대문 앞에는 메이드로 보이는 여자 하나와 하인 여럿이 마중 나와 있었다. 메이드는 마부석에 앉아 있는 것이 부관이 아닌 알폰스라는 것을 깨닫고 작게 놀란 듯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어머, 주인님께서 손수 마차를 모시고 온 건가요?”
“그럴 사정이 있었어.”
알폰스는 그렇게 말하고 마차 문을 열었다. 여전히 비실거리는 부관을 에스코트해 내려준 뒤 비올렛에게 손을 뻗었다.
당연하게도 그 손을 가볍게 쳐내고는 스스로 내려왔다. 그 모습에 메이드의 뒤에 있던 하인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으나 메이드는 어머 하며 작게 중얼거리고는 말했다.
“신기하신 분이네요.”
“그러니까 데려왔지.”
그는 웃으며 말했다.
“샬럿, 이 녀석에게 적당한 방을 내어줘.”
“하인들이 쓰는 방이면 될까요?”
“그것보다는 좋은 방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비올렛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마차를 타서 피곤할 테니 오늘 하루는 푹 쉬도록 해.”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향했다. 비실거리는 부관과 하인들 역시도 그 뒤를 따랐다.
그 덕분에 이곳에 있는 건 샬럿이라 불린 메이드와 비올렛 뿐이었다.
동그란 안경을 낀 그녀는비싯 웃으며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인사했다.
"처음 뵙겠어요, 신기하신 분. 제 이름은 샬럿. 메이드장이라는 미천한 신분이지만 저택 관리를 맡고 있답니다."
"영, 아니비올렛이라고 불러."
그녀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 자신을 비올렛이라 소개하는건 싫었으나 혹시나 알폰스에게 트집이 잡힐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비올렛 님이시군요. 바로 방으로 안내해드릴까요?"
"비올렛이면 충분해. 안내해줘."
앞서가는 샬럿을 따라 비올렛이 저택으로 들어갔다.
샬럿은 무척이나 수다스러운 여자였다.
어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알폰스가 그간 들였던 백토 공주가 자신을 제외하고 셋이나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 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죽어 나갔다는 것도 말이다. 그 말에 딱히 적의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저가 백토 공주라는 것을 알고 떠오르는 기억을 내뱉는 것으로만 보였다.
"팔에 차고 계신 건 노예의 인장인가요?"
"그래. 혹시 푸는 방법을 알고 있거나 뭐…"
"알고 있다고 해도 알려드리지 않았겠죠?"
그건 그렇지. 상큼한 얼굴로 대답하는 샬럿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도 희망을 가지고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 혹시나 하고 던져 본 것 뿐이었다.
저택은 넓었으나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문보다 조금 큰 것이 평범한 방은 아닌 것 같았다.
샬럿은 문을 열며 말했다.
“앞으로 저택에 있는 동안 이 방에서 생활하시면 돼요.”
“오…”
절로 감탄사가나오는 방이었다. 전생에서 살던 집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커 보였다.
비올렛은 방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어느 것 하나 비싸보이지 않은 물건이 없었다. 하다못해 촛대조차도 반짝거리는 것이 보통 값이 나가는 게 아닌 것같았다.
침대도 무척이나 컸다. 킹사이즈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쩔어.”
“그럼 식사 전에 다시 부르겠습니다.”
“아, 잠시만.”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비올렛은 조금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 몸을 씻고 싶은데.”
벌써 이틀째 몸을 씻지 못했다. 강에서 한 번 물에 몸을 씻었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씻었다기보다는 사투를 벌인 것과 같지 않은가.
실질적으로는 사흘, 더 나아가서 낙원에 있기 이전까지 생각한다면 닷새나 씻지 못했다. 비올렛 역시도 샤워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 기간은 너무 길었다. 당장이라도 몸을 씻고 싶었다.
샬럿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목욕 준비 말씀이시군요. 곧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위치만 알려줘. 혼자서 할 수 있으니까.”
고작 샤워를 할 뿐인데 도움까지야. 비올렛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으나 샬럿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아뇨. 분명 제 도움이 필요하실 겁니다.”
그리고는 비올렛이 뭐라 답하기 전에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녀는 다가오는 샬럿의 모습에 잠시 멈칫했으나 곧 제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긴장을 풀었다.
비올렛의 뒤에 있는 벽을 더듬더니이내 그것을 옆으로 밀었다. 벽이 스르륵 열리며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사람 두 명은 우습게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욕조가 눈에 띄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샤워기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물 없이 비어 있는 욕조만이 덜렁 놓여있었다.
“...확실히, 그렇겠네.”
“그렇죠?”
떨떠름하게 대답하니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목욕 준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인 여럿이 따뜻한 물을 양동이에 담아 욕조에 붓는 것을 반복하고 어느 정도 차오른다 싶으면 샬럿이 준비해 온 물건들을 하나씩 욕조에 넣었다.
물어보니 입욕제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들이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향기가 금세 욕실을 가득 채웠다.
비올렛은 준비가 끝났음에도 욕실에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호화스러움이 넘쳐서 차마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냈다.
“자아, 들어가자고요.”
“자, 잠깐.”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단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샬럿은 그녀를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비올렛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옷을 벗겼다.
“힉.”
순식간에 느껴지는 해방감에 저도 모르게 그런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손이 멋대로 움직여 가슴과 비부를 가렸다. 주저앉지 않은 건 초인적인 인내심 덕분이었다.
“우와, 이걸 옷이라고 입고 있던 건가요?”
샬럿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등에 매인 끈을 풀면 한순간에 벗겨지게 설계된 옷이었다. 게다가 입고 있을 때도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비쳐서 안 입은 거나다름없는 느낌을 냈다.
사실상 옷의 형태를 한 천 쪼가리나 마찬가지였다.
“무, 무슨 짓이야 이게.”
“씻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걸 도와드릴 뿐 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비올렛의 어깨를 잡고 욕조로 이끌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곧장 욕조 앞까지 도착했다. 욕조 안의 물이 넘실거리며 따뜻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자아, 자아."
샬럿이 어깨를 꾹꾹 누르며 재촉했다. 하지만 비올렛은 욕조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들어갈 수 없었다가 맞는 말일 것이다.
"비올렛?"
샬럿이 의아한 듯 그녀를 불렀다. 어깨를 잡은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몸을 내밀어 비올렛을 바라봤다.
비올렛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겁을 먹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물이 무서웠다. 정확히는 물을 보면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무서웠다. 조교사와 알폰스가 비올렛에게 저지른 것은 트라우마로 남아 기억에 오래 남을 정도였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폐와 코가 물을 먹은 듯 아릿하게 아파졌고 당장이라도 누가 제 머리를 붙잡고 물 으로 처박을 것만 같았다.
"으, 으아…"
비올렛은 황급히 머리를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덜컥 밀려오는 두려움에 언어마저 퇴화되버린 기분이었다. 억눌린 비명을 반복하며 욕조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했다.
"괜찮아요? 갑자기 이게 무슨…"
그것을 모르는 샬럿에게는 황당한 일이었다. 금방까지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였으니 당연했다.
그녀는 비올렛을 달래면서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물을 무서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을 무서워 하는데 씻고 싶다 했다고?'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납득되지 않은 건 아니다.
하긴, 그녀는 노예였고 제 주인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그가 데려왔던 노예중에 이런 적은 없었으니 조금 당혹스럽기는 했다. 도대체 비올렛,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비올렛에게 다행인 것은 샬럿이 무척이나 유능한 메이드라는 것이었다.그녀는 곧 하얀 천을 구해와 비올렛의 눈을 가렸다.
“괜찮아요. 물은 이제 없다고요?”
그리고는 조곤조곤 등을 쓸어내리면서 그녀를 다독였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자 몸의 떨림도 서서히 멎었다.
“괜찮아 졌나요?”
“...응.”
샬럿의 말에 비올렛은 작게 대답했다. 두려움이 가시니 부끄러움과 분노가 치솟았다. 이게 다 망할 알폰스, 그 놈의 탓이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툭하면 물고문에 목을 졸라대니 몸이 기억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그 싸가지 없는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있으니 샬럿이 말했다.
“목욕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
비올렛은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서 포기하고 싶다. 두려움이 가셨기는 했지만, 여전히 물을 보면 겁쟁이처럼 벌벌 떨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몸을 씻고 싶은 욕구가 컸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다는 것도 한 몫 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씻는 거 도와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샬럿은 1초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비올렛은 그녀의 부척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봉사가 된 심정으로 더듬거리며 욕조까지 나아갔다.
“윽…”
“괜찮아요.
손끝에 물이 닿았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니 부드럽게 마주 잡아 왔다. 닿는 온기가 마음을 안심시켰다.
샬럿은 잡은 손을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맞잡은 두 손이 물속으로 느릿하게 들어갔다. 흠칫거리며 놀라는 비올렛에게 괜찮다며 속삭였다. 다른 손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반복했다.
욕실에 들어온 지 꽤 되었으나 물은 여전히 뜨거운 기운을 내뱉고 있었다. 샬럿이 넣은 입욕제 중 물의 온도를 유지해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비올렛은 두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느낌에 점점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몸을 담가 보죠.”
“뭐? 잠, 잠깐…”
엇 하는 사이에 물속에 있던 손이 이끌려 나왔다. 그리고는 맞잡은 온기가 사라지더니 허벅다리 밑으로 쑥 팔이 들어왔다.
비올렛이 작게 비명을 내질렀으나 샬럿은 아무렇지도 않게 발바닥을 손으로 받치며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
“힉!”
“참아요.”
단호한 말에 비올렛이 저도 모르게 합 입을 다물었다. 다른 발 역시도 금세 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다리에서 일렁거리는 물의 감각에 질끈 눈을 감았다. 잠잠해졌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스윽스윽 하고 천이벗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잠잠하던 물속에 파문이일었다.
“쉬이, 괜찮아요.”
등 뒤로 샬럿이 그녀를 안아왔다. 비올렛은 등 뒤로 느껴지는 감각에 몸을 굳혔다. 잘 알지 못했으나 그건 분명히 옷이 아니라 피부의 감각이었다. 비올렛은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샬럿은 그녀를 배려하지 않았다. 천천히 오금을 무릎으로 누르면서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넘실거리며 차오르는 물의 감각에 비올렛이 끄억끄억 억눌린 비명을 내질렀다. 어느새 목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다.
비올렛은 더 이상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끅끅 거리며 겨우 숨을 내뱉었다. 샬럿은 그녀를 껴안으며 조곤조곤 괜찮다고 다독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물속에서 전라의 두 여인이 몸을 겹친 채로 있었다. 샬럿은 조용해진 그녀에게 물었다.
“조금 괜찮아 졌나요?”
“...덕분에.”
살짝 물기가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