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24화입니다.
“저 녀석 별 이야기를 다 하는군.”
마차 안쪽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알폰스가 중얼거렸다. 느리지 않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 데다 부관의 목소리도 작은 편이어서 본래라면 마부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 대화를 듣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민한 청각은 마차 안에서 비올렛이 헛웃음을 내뱉는 소리까지도 잡아주고 있었다. 덕분에 마차를 모는 일이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과거, 인가.”
평소라면 떠올리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주제였으나 마차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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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생아였다. 어머니는 빨래 같은 잡일을 하는하녀였고 아버지는 귀족이었다.
그것도 제국을 바치는 두 기둥 중 하나라는 휘황찬란한 수식어를 가진 공작가의 가주였다.
아무런 장점도 없는 어머니를 어째서 가주가 안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성욕을 풀기 위해 마침 곁에 있는 것을 썼을 뿐일지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사랑 같은 뜨뜻미지근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빚에 팔려 들어온 사람이었고 가주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하룻밤 뿐인 관계였으나 그 한 번의 관계로 어머니는 임신을 했다.
그녀는 가주에게 임신한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교활한 여자였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평범하게 일했다. 산달이 다가왔을 때까지도 말이다. 그녀는 휴가를 요청해 저택 바깥의 어느 여관에서 홀로 자신을 낳았다.
귀족의 혈통은 고귀하다. 하물며 사생아라고 할지라도, 귀족의 피가 흐르는 자는 귀족이었다. 어머니는 귀족을 낳은 사람으로서 귀족과 동등한, 아니 그것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생활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했다.
가주의 씨앗을 품고 자신을 낳은 것 역시도 그런 이유였다. 어머니는 저가 어느 정도 말을 또렷이 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을 때 가주의 앞으로 데려가 말했다.
‘가주님의 아이입니다.’
자신을 본 가주는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어린 자신은 가주와 완벽하게 닮아 있었다.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새까만 눈동자나 남색에 가까운 푸른 머리카락, 젖살이 빠지지 않아 이목구비는 완전히 비슷하지 않았지만, 자란다면 그와 비슷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군.’
가주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어머니의목을 베었다. 그녀는 교활했으나 현명하지 못했다. 귀족의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귀족은 폐쇄적인 집단이다. 푸른 피가 흐르지 않는 이를 귀족가에 편입시킬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가주의 집무실에서 붉은 피 분수를 뿜으며 죽었다.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 땅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죽었구나 싶었다.
‘놀라지 않는구나.’
‘놀라야 합니까?’
어머니가 죽었으나 딱히 특별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것이 가주의 흥미를 이끌었는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이름이 없던 자신에게 이름을 주며 가문의 일원임을 인정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알폰스다.’
가문의 성은 받을 수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형제들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가문을 물려 받지는 못하겠지만, 공부를 하여 관료가 되든 무예를 갈고 닦아 군부로 진출하든 어떤 제약도 없으리라.
사생아라고하지만 엄연한 공작가의 일원이었으니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가문의 영광뿐만 아니라 일신의 재능 역시도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검을 잡았다. 본능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문에서 내려오는 검술을 배우지 못했으나 한 때 기사단장을 역임했던 이가 자신을 가르쳤다. 첫 스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훌륭한 선생이었고 올곧은 인간이었다. 늙었으나충직했으며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 장차 제국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스승은 열과 성을 다해 저를 가르쳤다. 일생동안 깨우쳤던 깨달음을 전수하고자 했고 나는 그것을 하나도 빠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칠 년이 지나고 스승은 죽었다. 대련 중 사고였다. 그는 반쯤 잘린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부여잡으며 눈을 흡 뜨고는 절명했다. 신관을 불러와 치유 마법을 쓰기도 전이었다.
실전성을 높이기 위해 진검을 사용해서 생긴 일이었다. 장례식이 열렸고 별 탈 없이 사건은 지나갔다. 그리고얼마 지나지 않아가주가 와서 물었다.
‘그는 어땠느냐?’
‘좋은 스승이셨습니다.’
‘그것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주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다 말했다.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사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 숨길 필요도 없었다. 스승이 죽인 것은 사고가 아니라 내 의지로 죽인 것이었다. 살의를 담아 검을 휘둘렀으며 그는 막지 못하고 단칼에 절명했다.
한 때 제국에서 무력으로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내였으나 지금은 나약한 노인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기에 죽였다.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웠기에.
첫 살인이었으나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약한 열기가 가슴 속에 피어올랐다.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했지만, 가주는 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빙긋 웃으며 스치듯 머리를 쓰다듬고 사라졌다.
그 후에 가주의 추천으로 근위대 소속 기사의 종자가 되었다. 열일곱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별다른 일 없이 3년을 기사의 종자로 살았고 이후에 기사가 되었다. 기사가 되고몇 년 안되어서 전쟁이 일어났고 나는 전쟁터로 향했다.
상대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소왕국이었다. 제국에 비하면 한 톨의 먼지조차 되지 않은 작은 나라였으나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멸망할 예정이었다. 표면상으로는 그런 이유였고 실질적인 이유는 왕의 유일한 자식인 왕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황제는 왕녀를 가지고자 했고 왕은 그것을 완곡하게 거부했다.
황제는 암군은 아니었으나 폭군이었다. 가지고자 하는 것은 가지지 않고 풀리지 않았다. 왕국 하나가 멸망하는 건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에 달리 이견을 가지지 않았다. 전쟁 덕분에 메르씨엘이라는 성도 하사받았고 남작위에 다스릴 영지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부관도 거기서 만났던가.’
제아무리 신을 믿는 신전이라고 할지라도 전쟁의 화마를 피할 수 없는 법이었다. 하물며 두 나라의 국교가 다르다면 더욱이.
부관은 부서진 신전 지하에 묶여 있었다. 관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발목까지 내려왔고 몸이 비치는 얇은 천 조각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노예라고 생각했다. 밤꽃 썩은 냄새가 가득 풍겨왔으니 말이다.
실제로 부관은 성노예가 맞았다. 하지만 생각치도 못한 것은 그가 남자였다는 것이었다. 훗날에서야 그 종교의 신관은 결혼을 하지 않는 대신 어린 소년을 안는 풍습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 당시에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데려갈 이유도 없었기에 단칼에 죽일 생각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있는지도 몰랐던 생채기를 치료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치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꽤 고급 인력에 속했다. 대부분 고위 신관들이나 쓸 수 있었으니 말 그대로 신이 내린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잘한 상처는 금방 낫게 만들고, 중상을 경상 정도로 낮추며 강한 치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잘린 신체 부위도 붙일 수 있다고 했다. 부관은 잘린 신체 부위를 붙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쓸모 있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거두었다. 치유 능력은 숨기고 다만 이단에게 고통받고 있던 어린 아이를 구했다는 것만 알렸다. 그런 거짓말에 사람들은 내 이름을 칭송했다.
고결하고 명예로운 기사, 알폰스 메르씨엘 남작. 그렇게 말이다.
전쟁이 끝나고 황제가 내린 포상을 받은 뒤 가문으로 돌아가지않았다. 부관을 데리고 하사받은 영토로 가서 저택을 짓고 살았다. 돈은 부족하지 않았다. 영토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꽤나 쏠쏠했고 근위대의 봉급 역시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또 다시 몇 년이지났다. 제국은 여전히 강대했고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미가 없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것도 처음 일 년 정도는 재밌었다. 하지만 숫자는 영 자신과 맞지 않았다. 차라리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즐거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부관을 가르쳐 영지 관리를 대행시켰다.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것이 꽤 볼만 했다.
그 뒤로는 지금까지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우연히 낙원을 소개를 받아 노예 몇을 들였다던가 하는 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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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알폰스는 문득 대화가들려오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집중하니 잠든 숨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하늘을 보니 지평선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서는 조금씩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오랫동안 상념에 빠져 있었기는 했으나 잘못된 방향으로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삐를 가볍게 내리쳤다.
어차피 하루 정도 잠들지 않는다고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다. 애초에 피곤함이란 것을 느껴본 것도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였다.
앞으로 반나절을 달리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때부터는 부관이 더 고생할 테니 말이지.'
거의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웠으니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있을 것이었다.
부관이 좀 고생하기야 하겠지만 주군이 이렇게 몸소 마차를 끌어주는데 감수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애초에 주군의 일이잖습니까. 그렇게 책망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알폰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조용한 평야 위로 마차 한 대가 내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