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화입니다.
비올렛은 몸을 움찔거렸다. 보고 있는 걸 들켰나? 하지만 보고 있을 때는 한 번도 이곳을 향해 눈을 돌리지 않았는데.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답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알폰스와 사이 좋게 대화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알폰스가 돌아봤다.
“관심이 없나?”
“닥쳐. 말 걸지 마.”
비올렛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부관을 향해 말했다.
“부관, 전장에서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나?”
“관심 없습니다.”
“이런,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군.”
알폰스는 한탄하듯 말했다. 비올렛 역시도 조금 이상한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부관을 바라봤다.
저야 그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관이라 불리면서 함께하는 이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시선을 눈치를 챈 것인지 그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물어볼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이상한 사람이다. 비올렛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피했다. 부관은 달리 말을 더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알폰스는 홀로 말했다.
“전장에서 가장 먼저 죽는 녀석은 간단하지.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놈, 제 실력을 과신하고 역량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놈.”
그는 비올렛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비올렛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을 노리고 하는 말 같지 않은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비올렛, 넌 날 죽이고싶겠지.”
“알면 순순히 죽지 그래?”
그녀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재미가 없지 않나.”
알폰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칼을 유려하게 휘둘렀다. 분명 곧게 뻗어 있을 검이 휘어지듯 낭창하게 밤공기를 갈랐다. 마치 검무를 추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비올렛은 그것에 눈을 빼앗긴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주지. 네가 날 죽일 방법은 나보다 오래 사는 것뿐이다.”
비웃듯 그렇게 말한다.
“평생을 노력하더라도 말이다.”
“...내게 좆이 부러졌던 주제에 잘도 말하고 있네.”
“방심했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으마.”
그에게도 썩 좋은 기억은 아닌지 살짝 안색이 나빠졌다.
“하지만 네가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비올렛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죽일 듯한 눈으로 알폰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는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내게 검을 배워라.”
“내가 왜?”
“날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만들어주지.”
“뭐?”
잘못 들었나 싶었다. 비올렛은 어이없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으나 알폰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날 죽일 수 있게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네. 널 죽일 수 있게 만들어 줄 테니 네게 검을 배워라?”
“그래.”
미친놈. 비올렛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신을 죽일 수 있게 만들어준다니 보통 미친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알폰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네게는 충분히 자질이 있다. 신체 능력은 물론이고 재능 역시도 출중하지. 고작 성노예로 팔리기에는 아깝다. 내가 너를 키워주마. 일류 검사로 세상에 네 이름을 널리 알리는 거다.”
표정 변화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은 광기에 가까웠다. 비올렛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그편이 재밌을 테니까.”
재미, 라. 비올렛은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알폰스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 팔을 부러뜨리고, 목을조르며 강간하고, 고문을 했던 것도. 그리고 지금 자신을 회유하여 검을 배우라 말하는 이 순간조차도.
모두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라고.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고작, 그런 이유라고?”
“네 이해를 바라진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으니.”
알폰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기실, 그가 비올렛에게 제안을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비올렛은 노예다. 그리고 알폰스는 그녀의 주인이었다.
손가락을 튕겨 인장에 내장된 전격 마법을 일으키면 비올렛은 아무런 대비도 못하고 고통을받아야했다.
사흘 정도 독방에 가둬놓고 전격을 쏘아대면 제아무리 그녀라고 하더라도 알폰스에게 빌며 살려달라고 빌며 굴복할 것이었다.
굳이 인장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그녀를 굴복시킬 방법은 많았다.
당장 지금이라도 비올렛을 강압적으로 찍어 눌러 몇 날 며칠을 범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렇게 반항도 못할 정도로 마음을 꺾어 버리고 나면,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처럼 변할 것이었다.
이런 제안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고 질리도록 했다. 일종의 권태감이었다.
인형 놀이는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비올렛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약하면서도 강인했다. 부러질 듯 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곧 분노를 태우며 제게 달려 들었다.
저가 봐왔던 노예들과는 다르게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다. 게다가 재능까지 있으니 비올렛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도보고 싶었다.
아마도 제게 검을 배운다 한들 그녀가 자신을 이기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비올렛이 하늘이 내린 기재여서 자신이 걸어온 세월을 비웃어 넘길정도로 성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꺾어 굴복시킨다면, 그 쾌감 역시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아래가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알폰스는 그것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네가 하지 않겠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럴 경우에는 널 굴복시킨 뒤 가르치면 될 뿐이니까.”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말했다.
비올렛은 그 말에 반발하지 못했다.
하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었다. 서커스장에서 그랬듯 자신을 부수고 범하면서 말이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저를 굴복시키자고, 마음을 꺾겠다고 한다면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주먹 쥔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눈이 충혈될 것처럼 크게 뜨였다.
“...배우겠어.”
씹어먹을 것 같이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약자였다.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선택지라는 것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저가 이렇게 대화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그의 변덕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비란 강자의 특권이었고 알폰스는 명백히 그녀보다 강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짐하듯 말했다.
“배워서, 반드시 널 죽여주지.”
“기대하지.”
알폰스는 배부른 짐승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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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주고 받기는 했으나 당장 바뀌는 건 없었다.
그들은 하룻밤 노숙을 하고 다시 마차길에 올랐다. 이틀을 내리 달려야 메르씨엘 남작령의 도시가 나왔고 거기서 다시 반나절을 달려야 알폰스가 살고 있는 저택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거진 사흘은 마차 안에서 있어야 했다. 비올렛은 불퉁한 얼굴로 창가에 턱을 괴며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봤다.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상태는 눈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우선 몸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옷 아래의 것들은 물론이고 제일 심각했던 팔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난 상처들은 묻기도 우스울 정도였다.
단순히 붕대를 풀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상이 완전히 치료된 상태였다.
비올렛은 눈을 돌려맞은 편에서 졸고 있는 부관을 바라봤다. 부상을 말끔하게 치료해준것은 그의 능력이었다. 치유의 힘이 있었고 그것으로 몸에 있던 상처를 모두말끔하게 지워냈다.
그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먹고 주군을 배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검술을 배우겠다고 했을때 알폰스가 그에게 시킨 일이었다.
상처가 치료되는 것은 금방이었으나 그에 비례하듯 부관은 기력이 빨린 인간처럼 비실거리더니 끝내 기절했다.
마부석에 앉아 있어야 하는 그가 마차 안에서 졸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마부석에는 알폰스가 앉아서 마차를 이끌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비올렛은 도대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었다.
부관이라는 것을 부르면 두 사람의 상하관계가 명확하다는 것을 알 수있었다. 부관 역시도 알폰스를 주군이라 불렀으니 더욱이. 하지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상관과 부하의 관계가 아니라 마치 동등한 위치의 사람들끼리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비올렛은 궁금한 것을 참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는 알폰스가 없었으니 말이다.
“어이.”
꾸벅거리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 잘도 저러고 깨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살짝 다리를 움직였다. 툭, 하고 가볍게 그의 정강이에 발가락이 닿았다. 다크서클진 눈이 슬며시 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냥, 심심해서.”
몇 시간 동안이나 달리는 마차 안에 있었다. 바깥 풍경을 보는 것도 처음 몇 십분 정도였지 지금은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들판, 아니면 나무 뿐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심심했을 뿐이었다. 부관은 그녀를 한 번 보고는 눈을 감았다. 다시 잠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어이, 왜 다시 자는 거야.”
발가락으로 정강이를 꾹꾹 눌렀다.
“...용무가 없다면 건들지 말아 주십시오. 능력을 쓰고 나면 무척이나 피곤해지니 말입니다.”
“용무? 그런 거야 있지.”
“후우…”
그답지 않게 부관은 살풋 얼굴을 찡그리며 숨을 내뱉었다. 짜증을 부리는 걸 보니 아주 감정이 없진 않나 보다 생각했다. 그는 마른 세수를 하며 피곤한 눈으로 비올렛을 바라봤다.
“말씀하십시오.”
“넌 남자냐 여자냐?”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이었다. 부관은 척 보기에는 여자인 것 같기도 했다.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나 갸름한 얼굴이나 그런 것들 때문에 말이다. 목소리도 그렇게 낮지 않아서 보이시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냥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것이 목젖이 살짝 굴곡저 튀어나온 것 같기도 했다. 어깨도 여자라고 생각하기에는 넓은 편이었고.
체격 자체가 작지 않았다. 당장 그녀 자신보다는 큰 편이었으니말이다. 부관은 그걸 물음이라고 하는 듯한 눈을 하더니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남자 입니다. 다른 궁금한 점이 더 있으십니까?”
고작 그런 것만 물어보려한 건 아닐 테지. 피곤함에 절은 샛노란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당연하게도 더 물을 것이 있었다. 이를 테면 알폰스에 대해서.
“네 주인에 대해서 알려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던가.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겠지만, 아예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마차 안에서 시간을 때울 것이 필요했다. 그런 기색을 알았는지 부관은 눈가를 문질렀다.
긴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