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22화입니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비올렛은 눈을 떴다.
창 밖으로 달빛이 마차 안을 비추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으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떠있는 달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비올렛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주위로 알폰스가 검을 들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검 끝을 바라보며 서서히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시 내려친다. 홱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음이 이곳까지 들려왔다.
잠을 깨운 소리의정체가 그것이었다. 비올렛은 검을 반복해서 휘두르는 알폰스를 바라봤다.
가학적인 웃음을 짓고 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무술을 단련하는 무도가처럼 보였다. 감정을 절제하고 움직임 하나에 의미를 담았다.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비올렛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수련하는 모습을 멍청하게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황급히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알폰스를 죽이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부관을 생각하지 못하고 당한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두 번이나 당한다면 그건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라 생각할 지능이 없는 머저리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다행히 부관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일 지도 몰랐다. 어쨌든 지금이 도망칠 기회라는 건 확실했다.
비올렛은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가 어질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윽…!”
투박한 느낌의 붕대가 손에 잡혔다. 그러고보니 뒤통수가 깨졌었던가. 기절하기 전의 기억이 가물거렸다.
한참 뒤에서야겨우 정신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알폰스는 여전히 수련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비올렛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잠겨있지 않아 쉽게 열렸다.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 땅을 밟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이 나부꼈다.
그러고보니 옷을 입고 있구나. 분명 알몸이었는데 기절한 사이 갈아입혀놓은 걸까. 누구의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연하늘색의 원피스였다.
비올렛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낮췄다. 절그럭 거리며 손목에 무게가 느껴졌다. 알폰스의 좆을 꺾는데 썼던 노예의 인장이 손목에 걸려 있었다.
비올렛은 잠시갈등했다. 전격이 발동하는 조건은 그녀가 알기로는 두 가지 뿐이었다. 알폰스가 내킬 때, 그리고 그를공격했을 때.
문제는 전자 쪽이었다. 과연 거리가 멀어져도 그 능력이 사용될 것인가. 그렇다고 할 경우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알폰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그가 찾아올 때까지 아무것도하지 못하고전기 고문을 당하고 있어야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할 경우에는 달랐다. 무조건 멀리, 최대한 그가 없을 곳으로 도망치기만 한다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인장을 풀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푼다면 거기서 끝이었다.
그게 가능한지는 둘째치고서 말이다. 비올렛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고민은 짧았다. 결단은 빠르게 내려졌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힘을 길러 복수를 하기 위해 후일을 도모하는 행위였다. 언젠가는 돌아와 알폰스를 쳐 죽일 것이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걸어 마차에서 멀어졌다.
“어디 가십니까?”
뒤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것이었다. 비올렛은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황급히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부관은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봉투를 들고 있었다.
마차 건너편에서는 여전히 칼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알폰스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비올렛은 짧게 고민하고 움직였다. 그를 부르기전에 처리할 셈이었다.
소리 없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부관은 여전히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그녀가 있었던 방향을 보고 있었다.
바람이 일었다. 비올렛의 주먹이 가슴팍 바로 앞에서 부들거리며 멈춰 있었다.
“아, 깜짝이야.”
부관은 그제야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렇게 중얼거렸다.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전혀 놀란 것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비올렛은 얼굴을 찡그리며 제 팔을 붙잡은 이를 바라봤다.
“깨었다면 깨어났다고 말을 해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검을 휘두를 때의 무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평소의 미소를 지으며 알폰스가 말했다. 비올렛은 얼굴을 찡그리며 다리를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다리를 들어 후려치기도전에 발목을 걷어차는 움직임이 더 빨랐다. 일순간 몸 허공을 부유했다.
“크윽!”
등 전체로 퍼지는 충격에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좆됐다. 비올렛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알폰스는 자비라고는 없는 남자였다. 그런 놈의 남근을 부러뜨린 것도 모자라 죽이려고 했으니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전처럼 두려움이 들지는 않았다. 체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비올렛은 알폰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부러진 곳은 이제 괜찮나봐?”
“부러진 뼈는 다시 붙으면서 단단해지는 법이지. 시험해 보겠나?”
잔뜩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으나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확실히 바지 위로 보이는 길다란 윤곽은 꺾여있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비올렛은 당황하지 않으며 말했다.
“한 번 더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닥쳐.”
그런 말에도 알폰스는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진해진 것 같기도 했다. 비올렛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비올렛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도리어 혼란스러웠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알폰스가 어째서 제게 이런 호의를 내비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손을 내려다보다 신경질적으로 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후려친 손이 더 아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네 놈의 도움 따위는 받지 않아.”
알폰스는 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부관에게 시선을 한 번 던지고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아마도 모닥불 근처로 돌아가 수련을 계속하려는 것 같았다.
비올렛은 그런 등을 노려보다 숨을 내쉬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지가 부러졌을 때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신 역시 남자였을 때 그런 일을 겪는다면 큰 충격에 빠졌을 테니까.
“식사 하시겠습니까?”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부관이 그렇게 말했다. 방금 전에 비올렛에게 공격을 당할 뻔 했음에도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비올렛은 그를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들킨 이상 도망치기는 요원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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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관은 능숙하게 식사를 준비했다. 땔감을 그러모아 모닥불의 화력을 키우고 간단한 지지대를 만든 뒤 냄비를 걸어 요리를 했다.
그가 들고 있던 봉투 안에는 식재료가 한가득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도시가 있었으니 그곳에서 사온 것이 분명했다.
부관이 만들고 있는 것은 미트 스프였다. 모험가들이 자주 먹는 육포를 찢어 넣은 스프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걸죽한 액체가 아니라 생고기와 약간의 향신료를 깃들인 진짜 음식이었다.
비올렛은 살짝 떨이진 곳에서 그것을 바라봤다.
맛있는 냄새가 비강을 가득 채웠다. 꼬르륵 하며 배가 울었다.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눈을 뜬 뒤로 먹은 거라고는 미음 같은 희멀건 죽 뿐이었다. 그마저도 배 속에서 소화를 하기도 전에 토해내지기 일 수 였으니 사실상 먹은 것이 없는 거나 다름 없었다.
입가에 침이 고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냄새가 짙어질수록 꼬르륵 거리는 빈도가 늘었다.
부관은 자신을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에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알폰스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침을 흘릴 기세인 비올렛을 지켜봤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없는 적막 속에서 솥을 젓는 마녀처럼 국자를 움직이던 부관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뒀던 나무 그릇으로 한 사람의 분량을 나눠 담았다. 가장 처음 푼 것을 알폰스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푼 것을 자신의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푼 것을 비올렛이 있는 방향으로 두었다. 그리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아무 말 없이 스푼을 움직였다.
비올렛은 잠시 두 사람을 보고는 무릎 걸음으로 다가와 그릇을 들고 다시 멀리 떨어졌다. 그녀가 알던 숟가락과는 조금 모양이 다르긴 했으나 사용법은 똑같은 것이었다. 조심스레 한 입 떠 먹었다.
맛있다. 찰진 고기와 향신료가 더해진 스프가 감칠맛을 더했다. 비올렛은 허겁지겁 그것을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맛이라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느끼고 있는 곳이 자신의 목숨을 몇 번이나 위협했던 이의 옆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릇이 바닥을 보이는 건 금방이었다. 비올렛은 순식간에 빈 그릇이 된 것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부관을 바라봤다. 잊고 있던 배고픔을 자각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고작 스프 한 그릇으로 며칠을 굶은 배를 채우는 건 불가능했다.
비올렛은 답지 않게 그들의 눈치를 봤다. 부관도 알폰스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모닥불 위에서 스프가 끓고 있었다. 배고픔은 수치심이라는 것을 잃게 할 정도였다.
그녀는조용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국자를 들었다.
“부족하십니까?”
하마터면 국자를 놓칠 뻔 했다. 비올렛은 도둑질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져 부관을 바라봤다.
“...뭐, 불만 있냐.”
“많이 해두었습니다.”
그렇게만 말하고는 제 식사를 계속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제 뒤통수를 후려까기는 했으나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자신을 대했다. 어떠한 호의도 적의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있으니 말을 건다는 느낌이었다.
비올렛은 그를 한 번 보고는 스프를 퍼 담았다. 이번에는 멀리 가지 않았다. 밤이 되니 추웠다. 따뜻한 스프가 몸을 녹여주기는 했으나 잠깐이었다.
모닥불 옆에서 한참동안앉아 식사를 계속했다.
알폰스는 식사를 끝내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묵묵히 허공을 베어내는 움직임은 기계처럼 정확하고 일관성이 있었다.
비올렛은 숟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며 그모습을 바라봤다. 저런 꾸준한 단련이 그 강함의 근원인가 싶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알폰스는 느끼고 있었다. 본래 그는 여행길에서도 단련을 하는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지금 하는 행동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비올렛의 관심을 끌기 위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관심을 갖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없었다. 그녀라면 분명히 흥미를 가질게 분명했다. 당연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비올렛은 자신을 증오하고 혐오했다. 이제와서 호의를 배푼다고 한들 끝없이 의심하리라.
물론, 그 의심대로 호의를 비올렛에게 베풀 날은 영원토록 오지 않을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당근은 채찍을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비올렛은 그의 단련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 먹은 그릇을 놓고 알폰스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약점을 찾기 위한 눈일 수도 있었다. 그런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고작 단순 반복하는 행위에 약점 같은 것이 있을리 없었다.
그렇기에 알폰스는 입을열었다. 여전히 허공을 가르며.
“검술에 관심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