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화 〉19화입니다. (19/75)



〈 19화 〉19화입니다.

알폰스가 말했다.


“다시 소개하지. 내 이름은 알폰스 메르씨엘. 부족하게나마 남작위를 가지고 있네."

"어쩌라고. 네놈한테 댈 이름 같은 건 없어."

"주인이 노예의 이름을 몰라도 되지만 노예가 주인의 이름을 몰라서야 되겠나?"


"염병하고 자빠졌네."


영진은 짜증난다는 듯 내뱉고 고개를 돌렸다.

“주인에게 말이 거친 노예군.”


알폰스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다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반응을 원했다. 그녀가 고작 한 번의 꺾임으로 무너지지 않기를 바랬고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기특하게도 자신의 예상대로 행동해주었다.


도리어 기분이 나빠진 쪽은 영진이었다.

눈을 떠보니 이미 낙원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는  위를 달리고 있었고 이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조금 집착해버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런 꿈을 꿨으니 어쩔 수 없으리라.


처음 몇 마디씩을 주고 받고서는 대화가 끊겼다. 두 사람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영진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생각에 잠겼고 알폰스는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할 지 궁금했다.

당연하게도 먼저 입을 연 쪽은 영진이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뒤 조금은 차분해진 눈으로 알폰스를 바라봤다.

“그래서, 이제 날 어떻게 할 셈이야.”

“생각보다 침착하군.”

“왜, 내가 탈출하겠다고 난동이라도 피울 줄 알았나?”

“조금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길 바랬다. 그랬다면 낙원에서 아쉽게 끝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어서 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빙긋 웃으며 내뱉는 대답에 영진은 코웃음치며 말했다.


“누구 좋으라고?”


그건 명백히 알폰스를 노리고 하는 말이었다. 영진은 그가 무척이나 가학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부수는데 거리낌이 없는 놈. 그건 상대의 직위와 무력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철저히 주관적으로 생각하기에 그렇다고 느낀다면 가차 없이 실행에 옮기는 녀석이었다.

“그래, 마냥 짐승은 아니란 건가.”


“누구보고 짐승이라는 거냐.”


맹수처럼 으르렁 거리는 영진의 모습에 알폰스가 피식 웃었다.

굳이 성향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노예에게 숨기는 게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에 대한 생각은 조금 고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마차에 비치되어 있던 상자에서 연초를 하나 꺼내들었다. 이곳에서 처음보는 친숙한 물건에 영진의 시선이 절로 그것을 따라갔다.

알폰스는그 시선을 알아차렸으나 말 없이 능숙하게 성냥으로 불을 일으켜 붙였다.

그리고는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영진을 향해 내뱉었다. 한순간 마차 내부에 연기가 가득찼다.

“콜록! 이게 무슨, 켁! 짓이야!”


“흥미가 있는 것 같기에. 그런  치고는 익숙하지 않나보군.”


알폰스는 즐겁다는  말했다. 연신 콜록거리며 연기를 흩어내려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눈도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연기가 그녀에게는 독했던 탓인지 눈물도 방울방울 흘리고 있었다.


영진은 영진대로 억울했다.

그녀 역시도 이런 몸이 되기 전까지는  애연가라고   있었다. 그래서 알폰스가 익숙한 모양의 담배를 들었을 때 흥미가 가진 건 사실이었다.

다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이 몸이 단 한 번도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없는 말끔한 폐의소유자라는 것이었다.

고작 연기 한 번 쐬었다고  난리였다. 남자였을 때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알폰스는 한 개비를 꿋꿋이 다 태우고 나서야 그것을 창 밖으로 던졌다. 물론 그동안 영진이 괴로워 했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사실이리라.


콜록거리는 기침소리를 배경으로 그가 여상하게 말했다.

“그래, 이제 널 어떻게 할거냐고 했었지. 우선 지금 당장은 그 수려한 얼굴을 내 고간 사이에 파묻고 한 발 뺄까 하는데.”

“등신, 콜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가 그런 짓을 할  같아?”

“물론.”

알폰스는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다리를 들어 그녀의 허벅지를눌렀다.이후에 일어날 일을 대비해서 말이다.

“끄으윽!!!”

영진은 목에 걸려 있는지도 몰랐던 목걸이를 부여잡으며 경련했다.

목걸이에서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전기충격에 몸이 멋대로 들썩거리며 발버둥쳤으나 허벅지에 올라와 있는 다리 때문에 자유롭지 않았다.

다시  번 손가락을 튕기자 언제 그랬냐는 잠잠해졌다. 영진은 거센 호흡을 내쉬며 멀쩡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도대체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알폰스를 바라봤다.

알폰스는 친절하게 말했다.


“그 목걸이, 노예의 인장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름에서도 알다시피 노예를 쉽게 다룰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지. 어째서 목걸이가 아니라 인장이라 부르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듣는 노예를 혼낼 기능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는게 좋을 거다.”

요컨데 족쇄라는 뜻이었다. 영진은 목걸이 틈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어 있는 힘껏 당겼다.

당연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장 이거 풀어.”


한참이나 기를 쓰다 풀리지 않자 이글거리는 눈으로 알폰스를 바라봤다.


“금화500장.”

“뭐?”


“널 사는데 쓴 금액이다. 그걸  수 있다면 풀어주지.”

당연히 불가능한 말이었다. 영진은 무일푼이었고 이 세계의 화폐가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평민이 평생 일해서 벌  있는 돈이 금화 2장 남짓하다는 것도 말이다.


물론 그녀가 어떻게든 돈을 모아온다고 하더라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저만한 노예를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알폰스가 부유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영진 역시도 눈치챌 있었다. 그랬기에 주저 없이 행동했다.


마차 안은 넓었으나 두 사람의사이의 거리는 마주보고 있었기에 가까웠다. 알폰스가 다리를 뻗어 그녀를 누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그녀의 신체능력으로  거리를 순식간에 매꿀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을 누르던 다리는 전기충격이 멈추고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영진의 움직임을 방해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여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을 죽인다. 머리속에 오직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손 끝에서 무언가 자라나는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서 튕겨져 나가듯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창을 내지르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

길어진 손톱이 안면을 꿰뚫기 직전까지도 알폰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처럼.

“아아악!!!”

목걸이로부터 전해지는 전격에 영진이 비명을 지르며 발작했다. 알폰스를 공격하던 와중이었기에 그의 품 안겨져서 버르적 거렸다.


알폰스는  안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영진을 껴안고 말했다.

“노예를 다루는 물건인데 주인을 공격하는 노예 대비를 안해 놨을까. 어이쿠.”

“아으악!!!”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손을 고개를 젖히는 걸로 피한 알폰스가 헛웃음 지었다.


설마하니 전격에 당하는 와중에도 공격을해올 줄은생각도 못했다. 그 덕분에 가해지는 전격이강해졌지만 자업자득이었다.


이대로 고통에 몸부림 치는 걸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자세를 고쳐 그녀를 품 깊숙히 안으니 발작으로 떨리는 몸이고간에 짓눌려 진동했다.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비명소리가 조금 시끄러웠으나 감내할만한 자극이었다. 물론 전희 정도로만 사용할 수 있겠지만.


알폰스가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반대로 영진은 죽을 맛이었다.

눈앞이 번쩍거리면서 몸이 멋대로 팔딱거렸다. 제 몸을 제어할 수 없는  생각보다 무척이나 불쾌했다.


물론 불쾌한 것보다 고통이 더 강했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타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고문을 당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감각이었다. 게다가 영진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지만, 전격은 주인의 허락 없이는 끊어지지 않았다.

즉, 언제까지고 계속 이렇게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버티던 영진의 입에서 항복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마아아안!”

“그만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이거엇! 그마안!!!”

혀가 멋대로 꼬여서 길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영진은 최대한 멀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말했다.

“잘모테쓰니까아앗!!!”

“잘못했다고?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고 있나?”


“꺄으아악!”


더 이상 대답도하지 못하고 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슬슬 한계인가. 알폰스는 그리 생각하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으로 영진을 괴롭히전 전격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바르르 떨며 발작하던 몸이  늘어져 알폰스의 몸에 완전히 등을 기대어 왔다.


전격의 후유증인지 이따금 움찔 움찔 하며 몸을 떨었다.


“이런.”


그는 작게 탄식했다. 뜨겁게흘러나오는 액체가 옷을 적시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다른 것까지 풀린  같았다.

알폰스는 넋을 놓고 있는 영진을 한 번 보고는 마부석을 향해 인근 마을로 향하라고외쳤다.


-

영진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내가 오줌을 지리다니!’

그것도 저 녀석의 품에 안겨서.


불가항력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으나 영진은 그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안그래도 수치스러운 일 인데 가장 보여주기 싫은 녀석의 앞에서 그런 추태를 부렸으니 말이다.


영진은 짜증을 내며 주먹으로 수면을 내리쳤다.

“가만히 있어주세요. 씻는 것이 늦어집니다.”

“나 혼자서 할 수 있어.”

“제 주군께서는 당신을 도우라 하셨습니다.”

“염병할.”


평이한 목소리에 영진이 작게 욕짓거리를 했다.


확실히 한 팔이 불편한 그녀가 혼자 씻는 것보다 누군가 도와주는 것이 빠를 것이었다.


하지만 영진은 누군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이 기분 좋지 않았다.


원래도 그랬지만, 서커스장에서의 일 이후로 더욱 심해졌다. 물을 끼얹는 손길에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이건 자신이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알레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시 테시메스 인근에 위치한 강이었다.

본래라면그대로 쉬지 않고 목적지까지 달렸을 것이었지만, 영진이 저지른 추태를 닦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씻는 것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은 부관이라는 직책을 가진 남자였다. 이름은 알 수 없었다. 부관이라고만 불리는 것을 들었다.


사실 남자인지도 의아했다. 부관은 중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얼핏보면 소년 같아 보이기도 했고 소녀 같아 보이기도 했다. 목소리 역시도 그리 굵지도, 얇지도 않았다. 변성기가 애매하게 온 사람 같았다.


몸을 이루는 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나오지 않은 걸로 봐 남자일 것 같기도 했다.

“궁금하신게 있으십니까?”

이런,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피하지 않았다. 샛노란 눈동자를 보며 영진이 말했다.

“저 놈을 죽일 방법.”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단번에 답을 내놓았다. 뭐, 그렇겠지.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제 주군을 죽일 방법을 묻는데 곧이 곧대로 대답한다는 것도 이상했고.


영진은 부관과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몸을 맡겼다.


"잠깐."

허벅지 안쪽을 훑는 손을 붙잡았다. 샛노란 눈동자에 의문이 담긴다.


"불편하신곳이 있으십니까?"

자신을 희롱하려는 손놀림은 아니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원인은 제게 있었다. 영진은 느릿하게 말했다.


"여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제가 하는 것이 더 빠를 텐데요.”

“내가.  수 있어.”


단호하게 말하는 모습에 부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영진은 짧게 숨을 내쉬고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새하얀 나신이  몸이라는 것이 여전히 실감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 치부를 다른 사람이 만지게  수는 없었다.

여체의 익숙하지않았지만, 결국 자신의 몸이었다. 어색하기는 했으나 어렵지 않게 씻을 수 있었다.

‘읏…’


가끔 이상한 곳을 스치면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올  했지만, 내뱉지 않고 참을 수 있었다.

영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부관을 향해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했다. 뒤에서 배를 껴안는 팔만 아니었다면.

“꼴에 여인이라고 씻는 게 오래 걸리는군. 아니면 내가 씻겨주길 바라나? 응?”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절로 몸이 굳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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