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18화입니다.
밤거리에 전등이 깜빡였다.
영진은 길 위에 우두커니 서서 풍경을 바라봤다. 기억에 있는 거리였다. 일찍이 보육원에서 나와 살고 있던 동네였다.
‘내가 왜 여기에 서 있었더라?’
잠깐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어차피 또 적당한 놈 하나 붙들어서 주먹다짐이나 하려고 했을 것이었다. 안그래도 요즘들어 짜증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난 터라 주먹이 근질거렸다.
‘일단 적당히 걸어볼까.’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어둠 속을 걸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거리가 조용했다.
평소라면 말다툼하는 소리나 접시가 깨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을 건데 그런 것 하나없었다.
하다못해 고양이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영진은 한참을 돌아다니다 돌계단 위에 앉아 턱을 괴었다.
“왜 아무도 없지?”
보통 때라면 분명 한둘 쯤은 돌아다녀야 정상이었다.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건 여럿이서지나가는 행인을삥뜯으려 있던 간에 말이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평범하게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동네를 한바퀴 돌아도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사람 뿐인가 그 흔한 길고양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밤낮 없이 시끌시끌하던 거리가조용해지니 마치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영진은 기침하듯 숨을 내쉬면서 품을 뒤졌다. 찾는 게 없는 건지 품 속이 아니라 바깥으로 손을 더듬거렸다.
없다. 없다. 있어야 할 네모난 곽이 만져지지 않는다. 돛대를 피우고 새로 사지 않았던가? 기억이 가물거렸다.
“젠장.”
침을 탁 뱉고는 몸을 일으켰다. 담배도 없고 시비를 걸 놈도 없으니 바깥에 있는 건 의미가 없었다. 집으로 향하는 걸음에도 지나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묵묵히 걷고 있으니 2층 짜리 건물이 보였다. 영진의 집이었다.
물론 제 건물은 아니었다. 아래 1층에는 여든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 살고 있었고 영진은 2층이었다.
문을 열고 경사가 심한 계단을 올랐다.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어떻게든 돈을 뽑아먹으려 하는 건물주의 노력이 느껴졌다.
여기서 구르면 무조건 죽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열쇠를 꺼내들었다. 나무판에 문고리를 달아놓은 것 같은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문고리에 열쇠를 꽃으려던 영진의 손이 멈췄다. 안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열쇠를 든 손을 내리고 문고리를 소리가 안나게 잡고 돌렸다. 저항 없이 돌아간다. 나올 때 문을 잠그지 않았던가? 아니, 그럴리 없었다. 그렇다면 일가친척이 왔다던가? 코웃음 나오는 가정이었다. 그놈들이 이제와서 자신을 찾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놈들?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사는 곳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으니 미행을 한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복수를 하고자 하면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을 정도다.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허탕을 쳤다고 생각했더니 제 발로 아가리에 몸을 들이밀 줄이야.
영진은 복수하러 오는 것들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자신을 찾아와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일일이 찾아다니는 것도 귀찮고 하니 말이다.
몸을 긴장시키며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는 덤벼오는 녀석들을 향해 주먹을
“왔어? 오늘도 늦었네.”
날리지 못했다. 영진은 멍청히 자신을 반기는 여자를 보며 물었다.
“누구냐, 넌?”
“갑자기 뭔 소리를하는 거야? 혹시 술마셨니?”
제법 신랄하게 말하는 폼이 퍽 자연스러웠다. 마치 익숙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쓸데없는 소리말고 들어와. 바람 들어와서 추워.”
작은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하마터면 신발을 벗지 못할 뻔 했다.
영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좁은 방과 부엌을 오가는 여자를 바라봤다. 키는 자신보다 머리하나는 작았고 금발이었다. 얼핏 눈을 마주쳤을 때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외국인인가? 하지만 외국인이 왜 자신의 집에 있단 말인가. 영진은 궁금한 것을 참지 않았다.
“뭐야, 넌? 어떻게 내 집에 들어온 거냐?”
“얘가 누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래. 그리고 어떻게 여기가 네 집이야? 내 이름으로 한 거니 따지면 내 집이지.”
흥, 콧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더욱 의아해졌다. 누나라니, 내게?
그럴리가. 하다못해 누나가 있었더라도 저런 모습은 아니여야 했다. 영진의 부모님은 한국인이었다. 외가와 친가 역시도 말이다. 그러니 제 누나라면 검은 머리, 하다 못해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이정상이었다.
적어도 금발과 푸른 눈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진은 외동이었다. 이건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성큼 다가가 어깨를 붙잡아 돌린다. 국자를 들고 있던 여자가 깜짝 놀라 올려다봤다.
“깜짝이야. 또 왜?”
“별로 농담할 기분 아니니까 말해. 누구야 너?”
“얘가 오늘 따라 장난이 심하… 악! 아파!”
“난 여자라고 안봐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니 금세 고통스러워 하며 몸을 비틀었다. 자랑은 아니었지만 악력이 꽤 강했다. 딱히 운동을 한 것 같지도 않으니 금방 고통에 굴복해서 내뱉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뒤늦게 정수리를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악! 씨발!”
“장난 그만해! 자꾸 그러면 나도 화낼 거야!”
들고 있던 국자가 살짝 찌그러져 있는 걸 보니 저걸로 내려친 것 같았다.
“뭐하는 짓이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늦게 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이런 장난이나 치고!”
빽 소리를 내지르는 모습에 영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을 보며 여자는 더욱 가열차게 말했다.
“지금도 인상 찌푸리는 거 봐. 어릴 땐 누나 누나 하면서 잘 따랐는데 아휴.”
“어릴 때라고?”
“그럼 어릴 때도 말로만 누나라고 한 거니?”
조금 충격 먹은 듯한 얼굴이었다. 영진은 무어라 말하려다 갑자기 욱신 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기억이 하나 둘 씩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눈앞의 여자를 축소 시킨 것 같은 금발 꼬맹이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소문을 모를리가 없는데 다가와 친하게 굴었었다. 사이좋게 지낼 생각이 없다고 밀어내도 몇 번이고 다가왔었다.
결국 포기한 건 자신이었다. 독불장군처럼 굴었어도 결국 어린애에 불과했다.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고 금발 꼬맹이는 그것을 자처했다. 한 번 마음을 여니 금세 친해졌고 곧 누나 동생 하는 남매 같은 사이로 까지 발전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걸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인데.
“괜찮아? 내가 너무 세게 때린 거 아니지?”
머리를 부여잡고 미동도 않고 있으니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먼저 상처를 입힌 건 자신인데도 남을 먼저 걱정해준다.
그렇게 착해 빠져서야 어떻게 살아가려고. 영진은 머리를 한 번 털고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가득한 눈망울이 보였다.
“아냐, 내가 맞을 짓 했지.”
“맞아, 네가 맞을 짓을 한 게 문제야. 이것 봐 어깨에 멍들 것같아.”
옷을 살짝 내리며 보여주는 걸 보니 과연 손자국이 붉게 남아있었다. 그것이 더욱 죄책감을 부추겼다.
“미안, 내가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봐.”
“미안한 줄 알면 가서 자리에 앉아. 너 먹이려고 스프 했으니까.”
영진은 굳이 자신이 도와준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랬다가 도리어 망친 기억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의 말대로 얌전히 상을 펴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냄비를 부들거리며 들고오는 모습이 보였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냄비를 건네 받으니 고맙다는 듯 눈웃음지었다.이거하나 제대로 들 힘이 없어서 어떻게 살겠나 하고 생각했지만 받아드니 생각보다 묵직했다.
상에 올려두고뚜껑을 여니 한계치까지 가득차 있는 게 보였다.
“뭘 이렇게 많이 했어?”
“만들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히히.작게 웃는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주 웃었다. 그녀는 스프를 그릇에 덜었다.
그리고는 숟가락으로 작게 퍼올려 내게 향했다. 마치 먹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나 혼자 먹을 수 있어.”
“또 그런다. 팔 나을 때 까지는 그냥 얌전히 받으세요~”
“꼭 내가 팔을 다친 것처럼 얘기…”
말을 하다가 고개를 내렸다. 하얀 붕대로 돌돌 감겨 가슴께에 걸쳐져 있는 오른팔이 보였다.
분명 아까 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팔이 부러졌는데도 병원을 안가겠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까먹은 척 하고 있어.”
“...우리 사정에 병원은 무슨.”
“알면 싸움 좀 줄여. 그래서 아직도 왜 싸웠는지 알려줄 생각은 없고?”
영진은 입을 다무는 것으로 답했다. 으이그, 그녀가 혀를 차며 숟가락을 놀렸다.
굳이 대화를 더 했다가는 추궁을 당할 것 같으니 얌전히 받아 먹었다. 아기새처럼 주는 족족 받아먹고 있으니 흐뭇해 하는 표정이 보였다.
한그릇을 완전히 비우자 배가 찼다. 자신의 위가 작았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 였다. 한 접시 더 주겠다는 그녀를 만류했다.
“안 돼. 무조건 더 먹어야 해.”
“아니, 더 안들어 간다니까…”
“그렇게 입이 짧으니까 이렇게 말랐지.”
“마르긴 누가.”
“이 팔 좀 봐. 그렇게 먹였는대도 이렇다니까.”
못해도 이쪽이 2배는 덩치가 컸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상 아래에 놓여져 있던 팔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손에 잡혀 들린 팔은 무척이나 가냘펐다. 영진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저 팔은 누구 꺼지? 이 방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으니 둘 중 하나의 것이었다. 그녀의 것은 아니었다. 팔을 잡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영진이었다. 하지만 이해할수 없었다. 자신의 팔은 아주 근육질이라고는 못하지만 적어도 저렇게 얇지 않았다.
“이릴, 이게 어떻게 된… 아, 아?”
여자 처럼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 영진은 이게 제 목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상한 예감에 퍼뜩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시선이 조금 낮아진 기분이었다. 분명 자신이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올려다보는 모습이었다.
이릴은 처연하게 웃고 있었다.
“영진.”
제 이름을 부르며 머리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미안해.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를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
“너를 혼자 두게 만들어서 미안해.”
미안해 할 필요 없어.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조심스레 얼굴을 감싸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릴은 눈물 맺힌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부드럽게이마를짓누르고 떠나가는 감촉이느껴졌다.
따스한 숲의 냄새가 감돌았다.
“부디 네가 무너지지 않기를.”
“부디 너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부디… 네 앞길에 행운이 깃들기를.”
축복을 바라는 이릴의 말과함께 공간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단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
알폰스는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무료하게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시선을 돌려 색색 잠들어 있는 동승자를 향했다.
한 쪽 팔에 붕대를 감아 가슴께에걸쳐 있었고 얼굴에도 거즈가붙어 있었다. 목에는 검은 철로 된 목걸이를 차고 있었고 피부는 머리색처럼 새하얗게 되어 있어서 안그래도 처량해 보이는 모습을 더했다.
‘신체 능력은 나쁘지 않은데 몸이 좀 약한 게 탈이군.’
낙원을 떠나 귀로에 오른 지도 하루하고 반나절 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다.
혹시나 자는 척을 하는가 싶어서 자신의 물건으로 얼굴을 문데었을 때도 말이다. 반응이 없는 이를 범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금방 그만두었지만.
아무튼 고작 그정도의 싸움이었다. 금방 털고 일어나는 것은 기대하지 않아도 하루가 가기 전에는 정신이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알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이틀을 더 마차를 타고 가야했다. 그동안에 잠깐 길들여 놓을까 생각했는데 깨어나질 않으니 계획을 세워도 말짱 도루묵 이었다. 무엇보다도 이틀 동안이나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이 더 괴로웠다.
‘젠장, 그냥 따먹어버릴까?’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시간이 잘 갈 것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좆이 반응하지 않는다. 결국 다시 하릴 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그러다 떠올린다. 백토 공주 옆에 있던 반쪽 짜리 엘프를.
스스로를 이릴이라고 밝힌 하프 엘프는 그날 쇼를 마치고 돌아가는 알폰스의 앞을 막아섰다. 이제와서 저항이라도 하려는가 싶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알폰스는 신사적인 남자였기에 허락했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기절해 있는 백토 공주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준 뒤 이마에 키스를 하고 물러났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다.
퍽 애틋한 사이처럼 보였다. 척 보기에는 접점이라고는 없어보이는데 말이다.
‘선점한 사람만 없었으면 내가 데려오는 건데.’
하다못해 작위라도 자신보다 낮았더라면. 알폰스는 입맛을 다셨다.
서로 막역한 사이라면 그걸 이용해서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수도 없이 많았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상상했더니 아랫도리가 조금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으음…”
타이밍도 좋군. 알폰스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얕게 뒤척이는 영진을 바라봤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숨겨져 있던 자주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꿈 꾸셨나, 공주님?”
멍하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 순간적인 반응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