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15화입니다. (15/75)



〈 15화 〉15화입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옷을 벗으라니, 이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진의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마누엘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싫은가?”


“너 같으면 하겠냐?”


“나라면 주저 없이 벗어던졌을 테지.”


담담히 내뱉는 말에 영진이 울컥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소중히 여기는 이보다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먼저 중요시 하는 거냐는 함의가 담긴 말에 어찌 반박할 수 있을까.

이가 절로 갈리는 조건이었으나 어쩔  없는 것이었다. 아니, 도리어 나쁘지 않은 내용이었다.

싸움에 지장되는 패널티도 아니거니와오히려 옷깃을 잡혀 움직임을 제한 당하는 상황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입고 있는 원피스는 너무 팔랑거렸다.


그러니 그깟 요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야 할 터였다.

손에 잡힌 원피스가 구겨지며 주름이 생겼다. 옷을 벗어던지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저 지금 잡은 손 그대로 들어올려 벗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행동 하나가 무척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뭐하냐!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으니 관중석에서 야유가 들려왔다.


영진은 그들을 노려봤으나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들은 합창하듯 외쳤다.

마누엘은 빙글 웃으며 말했다.

“관객들도 빨리 시작하길 원하는 것 같은데, 아니면 조건을 바꾸길 바라나?”

“필요 없어.”

영진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옷을 벗어던졌다.

“오오오!”


여기 저기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끼긱 거리며 영진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빛에 반사된 새하얀 몸이 무대 위로 드러났다.

머리카락도 피부도 하얗기에 오히려 자색 눈동자가 부각되었다. 가슴은 아담했으나 알이  차 봉긋했으며 허리는 얇았고 둔부는 몸에 비해 작지 않았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몸을 이루는 선이 아름다웠다. 남자의 성욕을 자극하는 육체였다.


그 모습에 마누엘 역시도 작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도 백토 공주를 안아본 경험이 있었지만 저런 완벽한 몸을 가진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게 고작 금화 500장이라.’

제대로 경매에 올라오기만 했더라면 1000장은 족히 받았을 정도였다.

제 아무리 부유한 마누엘이라도 그 정도 숫자라면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분명 자신이 낙찰 받기 위해 기꺼이 돈을 썼을 것이었다.


눈앞의 백토 공주는 그럴 가치가 있었다.


영진은 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듯 했다.

아무리 남자라고 할 지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알몸이 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제 물건에 자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그건 성관계에서의 이야기지 이런 노출증 환자나 할 법한 짓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단 말이다.


자꾸만 손이 가슴을 가리려고 했다. 제 의지가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이 그렇게 올라갔다.

여성으로 변했다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일까, 남자였더라면 가릴 필요조차 없는 부위였으나 영진은 그렇게 했다.

애초에 그녀는 이곳에 와서 자신의 몸을 지금 처음 보게 된 것이었다.

원래부터 여자를 가까이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보니 여성의 몸에 특별히 면역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성 쪽으로는 사춘기 남자아이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즉, 흥미가 있으면서도 부끄러웠다는 이야기였다. 사나운 성격과 안 맞게도 말이다.

“부끄러운가?”

“닥쳐.”

영진은 붉어진 얼굴로 그리 쏘아붙였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숫처녀처럼 수치스러워 하는 모습에 하반신이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며 마누엘이 말했다.

“부끄러워 할 시간에  쓰러뜨리는 것이 수치심을 줄이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영진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옷을 벗어던진 것 때문인지 시선이 더욱 잘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생생히 전해지는 욕망의 파편에 몸서리쳐질 법도 했지만 영진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은 붉지 않았다. 영진은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창을 껴안듯 두 손으로 쥐었다.

가슴과 비부가 훤히 드러났으나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저 멀리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비웃어도 말이다.


피어오르는 투지가 몸을 긴장시켰다. 전신의 근육이 금방이라도 힘을 폭발시킬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녀의 변화를 마누엘은 눈치챘다.

쾅! 맨발로 땅을 박찼다고 하기에 듣기 어려운 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졌다.


어느새 허공으로 도약한 영진이 창을 종으로 휘두르며 마누엘에게 내리 꽂혔다. 마누엘은 한 수 앞서 뒤로 물러났다.

단창이 허공을 갈랐으나 영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창술에 대한 조예가 없었다. 막무가네로 베고 찌른다. 그러나 뛰어난 육체가 그것을 보완해주니 무술과 다를 바 없었다.

평범한 이라면 단숨에 절명했을 공격들이 쉴 틈 없이 마누엘을 향해 이어졌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라는 말이 절로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설프다.’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국 근위대는 황제와 제국을 수호하는 집단.


당연하게도 그곳에 속해 있는 마누엘이 평범한 사람일리 없었다. 그의 눈에는 불규칙하게 내질러지는 공격이 전부 보이고 있었다.

마누엘은 뻔히 눈에 보이는 공격에 당하는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살벌하게 내질러지는 공격을 피한다. 손을 사용해 막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몇 번 움직이고 몸을 빼거나 숙이는 정도로도 영진의 공격을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것에 바짝 약이 올라 전신에 힘을 바짝 주었다. 후웅! 하고 마누엘의 머리 위로 창대가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회전력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킨 영진의 다리가 채찍처럼 얼굴을 향해 후려쳤다.

퍼억! 북을 터트리는 듯한 소음이 실내를가득 매웠다. 왁자지껄하던 관중석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그러나 영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으나 마치 바위를 때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팔뚝으로 발차기를 막아낸 마누엘이 미소를 지었다.


영진은 발차기를 하기 위해 다리를 쭉 뻗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려져 있던 음부가 훤히 보였다.


남자를 경험하지 않은 것인지 앙다물어 있는 모습은 마누엘을 기분좋게 만들었다.

“절경이군.”

희롱하는 듯한 말에도 영진은 얼굴을 붉히는 대신 다리를 거두고 뒤로 크게 물러났다.

마누엘은 꿇었던 몸을 일으키며 공격을 막아낸 팔을 털었다. 들은 대로 힘은 무식하게 강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저 백토 공주는 싸울 줄을 알았다. 따로 스승을 두지않은 것인지 투로가 난폭하고 불규칙하기는 했으나 타고난 센스가 남달랐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해야 자신의 몸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있을 지를 알았다.

타고난 전사의 몸이었다. 만약 제대로 배우고 단련했더라면 자신과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새하얀 백지였다. 질감이 좋고 아주 고급스러운 백지.

그것을 자신의 색으로 채운다면, 어떤 모습이 될 지 궁금해졌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절로 창을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몸을 일으킨 마누엘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아까보다 한 층 더 강해졌다.

조금 전까지는 장난스러운 움직임이었다면, 이번에는 진심으로 싸우고자하는 투기가 느껴졌다.

영진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장난 같은 움직임으로도  공격을 모조리 피해낸 사람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한다면 이길 수 있을  미지수였다.

‘아니, 버틸 수는 있을까?’

그녀 답지 않게 약한 생각이었으나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영진이 겪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세구지오가 제일 강했으나 그때는 지쳐 있었다고 변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제대로  컨디션으로 맞붙었더라면 그리 나약하게 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적어도 반절에 가깝게 승리를 점칠 수도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하지만 마누엘은 달랐다. 지금도 영진은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하더라도 지금 같은 마누엘에게 이길 수 있을 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기는 건 생각하지 말자.’


내기의 내용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었다. 아주 작은 상처라도 피를 흘리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영진은 슬쩍 공격이 들어갔던 팔뚝을 바라봤다. 그만큼 제대로 들어갔으면 붉게 달아오를 만도 하건만 작은 흠집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몸인지. 영진은 숨을 깊게 내쉬며 몸을 웅크렸다.

맨몸 격투로는 상처를 입힐  없을  같았다. 그렇다면 어찌되었건 이 무겁기만한 단창으로 해결해야한다는 뜻이었다.

창을 몸 가까이 끌어당기고 한계까지 웅크린다. 마치 압축되는 용수철처럼. 그리고 쏘아졌다. 딛고 있던 땅이 박살나며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창을 앞으로 뻗으며 곧게 마누엘을 향해 좁혀졌다.

‘남말할 처지가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누엘과 다르지 않게 자신의 몸도 만만치 않게 비정상이었다. 직접 움직이면서도 사람의몸이 이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싶었다.


공간을 가로지르며 마누엘과 거리가 좁혀졌다.


“확실히 이건 위험하군.”


평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날이 몸과 닿기 직전에 아래에서 무쇠 같은 주먹이 쳐올려졌다.

그 무식한 힘에 창머리가 부서지고 붙잡고 있던 팔이 들렸다.  비게  복부를 보호할 새도 없었다.


마누엘이 한발자국 다가오며 영진과 몸을 가까이 했다.

“배에 힘을 주는  좋을 거다.”



충고에 영진은 확실히 따랐다. 핏줄이 드러난 주먹이 무방비한 복부에 깊이 틀어박혔다.

“크훕-”

숨을 토해내는 소리를 내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누엘은 그녀를 쳐내지 않고 그대로 땅에 매다 꽂아버렸다.

카학-남아 있던 공기 마저 토해냈다.

영진은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트럭에 치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하지만  순간은 아주 잠시였고 복부와 등 쪽에서 상상도 하기 힘든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새하얀 피부가 금새 검푸른 멍으로 덧칠되었다. 그녀는 웅크린 상태에서 연신 기침을 토해냈다.


그럴 때마다 고통이 더욱 거세게 느껴졌지만 그러지 않고는숨조차 쉴 수 없었다.

연신 꺽꺽 거리는 영진의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끝인가?”


숨소리 하나 거칠지 않았다. 그는 가벼운 산책을 한 사람처럼 말했다.

영진은 여전히 배를 부여잡고 기침해댔다. 대답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다시 일어나는 것 따위 불가능했다.


마누엘은 영진의 몸에서 그런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나름 재능이 있어보였지만, 아무래도 이 노예 역시도 오래가지 못할 듯 싶었다.


그럼에도 이전보다는 나아갈 수 있으리라. 마누엘은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슬슬 내기를 끝내도 좋을 것이었다.


“아직, 하악, 안 끝났어.”

완전히 포기한 줄 알았던 영진이 몸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그러려고 했다.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다. 복부를 감싼 채로 웅크리고 있는 것은 여전했으나 분명히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자세를 잡는다. 본능적으로 취한 자세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을 보고 따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누엘 역시도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 군인이라면 반드시 배우는 근접격투술의 기본 자세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후자 쪽이리라 마누엘은 생각했다. 그리고는 빙글 웃으며 같은 자세를 취했다.

 사람은 마치 거울을 보는  같았다. 하지만 한 쪽은 불안정했고  쪽은   없이 단단했다.

“하아, 하아…”


그럼에도 영진은 쓰러질 수 없었다. 쓰러져서는 안되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이곳에 와서 여러 번 겪었다. 모든 것을 놔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삶을 원했고 다른 이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더욱 강렬했다.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자신도, 이릴도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고작 눈앞의 남자를 쓰러뜨리면 될 뿐이었다. 단순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숱하게 해오던 짓거리이지 않은가.


아니, 꼭 쓰러뜨려야 했던가? 고통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건 오직 이기겠다는 정신 하나 덕분이었다.


만일 누군가 가볍게 밀치기라도 한다면 영진은 속절 없이 쓰러져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누엘은 그녀가 체력을 회복할 수 있게 충분히 기다렸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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