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화 〉14화입니다. (14/75)



〈 14화 〉14화입니다.



처음 백토 공주를 본 마누엘은 속으로 적잖게 실망했다.

미색은 나쁘지 않았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백토 공주와 다를 바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드러난 팔다리는 얇다 못해 부러질 것 같았고 창을 쥐고 있는 모습조차 엉성해 보였다. 표정은 다른 것들과 다르게 호전적이게 보이고 그러기는 했지만 성격 정도는 차이가 있는가보다 생각했다.

어찌됐건 마누엘이 원하는 기준에는 맞지 않았다. 그는 좀 더 기초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금방 배울 수 있는 이를 원했다.

이래서야 이야기와 다르지 않나. 조금 흥미를 잃은 기색으로 백토 공주를 천천히 훑어보던 마누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음?’

사납게 치켜뜬 눈이 그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 보통의 백토 공주라면 루비를 연상캐 하는 새빨간 적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특이하게도 자수정을 닮은 자안을 가지고 있었다.


돌연변이인가 생각했으나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정도 특이성이라면 원하던 것은 아니더라도 잠깐 가지고 놀  있을 정도는 되었다.

결정을 내린 마누엘이 트레오를 향해 물었다.

“저 녀석은 얼마쯤에 내놓을 생각이었나?”

“시작가로 금화 400장, 100 단위로 경매를 진행할 예정이었습니다.”


“비싸군.”

아무런 특색이 없는 노예가 금화 20장에 팔린다는 걸 생각한다면 확실히 비싼 것이었다. 심지어 같은 백토 공주조차도 여지껏 200장 이상의 가격으로 시작된 적이 없던 걸 떠올려 보면 말이다.


단순하게만 생각해도 가격 차이가 2배였다. 물론 마누엘에게는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는 액수였다.


“평범한 녀석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나?”

대답 대신 허리춤에 차고 있던 몽둥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뛰쳐나가 영진에게로 달려들었다.

영진 역시도 그에 대응했다. 묵직한 공격이 연속해서 틈을 찔러 들어온다. 넓게 잡은 단창을 쥐고 쇄도하는 공격들을 쳐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드러난 빈틈을 향해 빠르게 내질렀다.


트레오는 그것을 크게 움직이며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기울이며 허리를 틀었다. 반짝이는 무언가 허공을 가르며 영진에게 쇄도했다.


“우윽!”


영진은 당황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움직였다. 거의 본능적으로 날아든 비수를 빠르게 창을 움직여 쳐내고는 숨을 골랐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트레오는 더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뒤를 돌아보며 마누엘에게 말했다.

“이정도면 되었습니까?”


“손속을 봐준 건가?”

“불가능하다는 건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마누엘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일반적인 백토 공주의 무력은 전무하니 트레오가 달려들었던 그 즉시 무력화되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저기 서있는 녀석은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고는 빈틈을 찔러들어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던져진 비수. 솔직히 말해 마누엘은 그런 짓까지 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간 상품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확신하는 것처럼 거리낌이 없었고 그 예상대로 저것은 훌륭하게 막아냈다.


마누엘은 첫인상을 고쳤다. 밤놀이로 사용하기 좋은 노예에서, 가능성이 보이는 노예로 말이다.

“600장이면 어떤가?”


“500장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마누엘은 굳이 무어라 더 이야기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왼편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시립해있던 부관에게 손짓했다. 별 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으나 부관은  알아듣고 금화 주머니를 준비해왔다. 그것을 건네주는 것으로 거래는 끝이었다.


“이제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트레오의 말에 마누엘이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여전히 경계를 하고 있는 영진을 향해 신사다운 인사를 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름다운 아가씨.”

“아가씨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넌 뭐야?”


“수려한 미모와는 다르게 입이 거친 분이시군요. 제 이름은 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아가씨의 이름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무척이나 실례되니 내 눈앞에서 꺼져.”


“까칠한 성격을 가지신 분이군요.”


마치 연극을 하듯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낙담하는 마누엘을 보며 영진은 소름돋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당사자들이  듣고 있는 상태에서 사람을 사고파는 행위를 했던 이가 갑작스레 이런 짓을 하니 그런 기분이 들지 않을래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나 그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는 달리 보였던 같았다.

바깥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소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재밌어 하고있었다. 마치 하나의 쇼를 관람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영진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좋을 사람이 어딨겠냐만 그녀의 성격상 더욱 그랬다.

무릎을 꿇은 채로 낙담하고 있던 마누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손으로 흙이 묻은 바지를 털며 일어났다.

“뭐, 장난은 이쯤 하도록 하고 나와 내기를 하나 하지 않겠나?”


“내기라고?”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네. 어때, 해보겠나?”

“...무슨 내용인지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겠어.”


“어차피 그대에게는 선택지가 없네. 하거나, 아니면 내 노예가 되거나.   하나지.”

담담히 전해오는 사실에 영진을 인상을 찌푸렸다.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오려고 했으나 숨을 들이쉬며 진정했다.


흥분해봤자 좋을 것 없었다. 화를 내더라도 내용을 들은 뒤에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한껏 차분해진 표정으로 영진이 말했다.

“좋아. 말해봐.”

“이런 상황에서도 당돌하군.”

“딱히 내가기죽어 있어야할 이유도 없지 않나?”


“맞는 말이지. 오히려 벌벌 떨었더라면 무척이나 실망했을 거야.”

마누엘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내용은 간단하네. 나와 대련해서 이기면 자유민으로 풀어주겠네.”

“대련이라고?”

영진은 흘깃 마누엘을 바라봤다.


거리가 있음에도 고개를 살짝 들어야 얼굴이 보였다. 이는 신장 차이가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입고 있는 정복 위로도 확연히 근육이 도드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왠만큼단련을 한 사람이었다.


허리춤에 검을 매고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운동을  했다는 정도의 사람 역시도 아닐 것이었다.


그에 비교해서 자신의 몸은 간단하게 설명할  있었다.


나약하다. 가늘다. 그리고 짧았다. 힘은 전생과 비교했을  뒤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순수 힘만 따지자면 전생보다 강했다. 눈앞의 남자와 비교했을 때는 알  없었다. 부딪혀 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영진의 마음 속에는 이미 패배라는 두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기술이 동등하다는 가정하에 체급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팔다리의 길이, 근육의 크기. 그런 것을 기술의 차이로 매꿀 수 있다고 하지만 결국 그 정도 노력이 있어야 간격을 메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영진은 자신이 가진 싸움의 기술이 마누엘과의 체급차이를 좁힐  있을 정도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얼핏봤을 때 그는 군인과 닮아 있었다. 일정한 보폭, 각이 잡힌 움직임, 언제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긴장시킨 몸가짐 따위가 말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내기에 응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운명에 순응하는 행위 따위 영진이 제일 끔찍해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이길 수도 있지 않은가.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 영진이 말했다.


“...좋아. 그 내기, 받아들이겠어.”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라고 해주겠네.”


“그 전에한 가지만 더.”

“뭔가?”


영진은 이릴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대화에서 동떨어져 있던 이릴이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영진?”


“내가 이긴다면 이 녀석도 함께 풀어줘.”

“그쪽이 하프 엘프였군. 하지만 내가 산 건 그대 하나 뿐인데 말이지. 애초에 과분한 요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마누엘이 말했다.

영진이 생각하기에도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릴을 혼자 둘 수 없었다.


자신 혼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맞잡은 손을 꽉 잡았다.


“영진, 나는 괜찮아. 너 혼자만이라도…”


“내가 안 괜찮아. 너를 혼자 두고  순 없어.”

영진은 난생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특별히 여기게 되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아직 잘 몰랐다.

사랑이라기에는 미약했고 친애라기에는 거대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대로 그녀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습을 보며 마누엘이 중얼거렸다.


“눈물겨운 우정이군. 이보게,  하프 엘프는 얼마인가?”


“그것이… 경매로 내놓을 상품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주인이 정해져 있는 노예입니다.”


“의뢰인가. 의뢰인은?”

“알려드릴  없습니다. 이것은 저희 상단 규정상의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트레오는 슬쩍 종이 조각을 건넸다.

마누엘은 태연자약하게 그것을 받아들고는 펼쳐 보았다. 종이에 써져 있는 이름을 보고는 곧바로 주머니에 쑤셔놓았다.


“혹여 일이 잘못된다면 내가 그분께 잘 이르도록 하지. 그분과 적잖은 인연을 가지고 있으니 이해해 주실 거야.”


“그렇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누엘이 말했다.


“좋아, 그 조건을 받아들여주지.”

“그럼…”

“단,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대에게도 조건이 있네.”

“뭐지?”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루도록 하지.우선 자리를 옮길까 하는데 어떤가?”

영진은 그것마저 거부하지 않았다. 이미 이릴의 처우에 대한 요구를 한 것부터가 주제를 넘은 일이었다.

그들이 움직이자 둘러싸고 있던 이들 또한 함께였다. 마치 양치기를 따라 움직이는 양 떼 같았다.


마누엘이 안내한 곳은 텅 빈 서커스장이었다.

구경꾼들은 익숙하다는 듯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금새 자리가 꽉 차 만석이었다. 자리가 없어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만어린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영진은 관람석을 꺼림칙한 눈으로 둘러봤다.

이것들이 과연 자신과 같은 인간인가 싶었다. 하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다른 건 당연할 것이었다. 애초에 다른 세계의 사람이지 않은가.


넓은 무대 위로 두 사람이 거리를 벌리고 마주봤다. 이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대 위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영진, 조심해야해."

작은 목소리였으나 영진의 귀에는 들릴 정도였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마누엘을 바라봤다.

그는 입고 있던 정장을 풀고는 부관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련에서 이기면 자유민으로 풀어준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대가 나를 이길 수는 없겠지."

"..."

"그러니 이렇게 하지. 나는 아무런 무기도, 방어구도 착용하지 않겠네. 오직 이 두 손만을 사용하겠네. 그대는 들고 있는 창을 써도 좋고, 아니면 다른것을 요구해도 좋네."


"그쪽한테 너무 불리한조건인거 아닌가?"

"유리하다고 생각드나?"

빙글 웃는 모습에 영진은 고개를 저었다.


무기를 들고 있음에도 쉽게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소매의 단추를 풀며 마누엘이 말을 이었다.


"승패는 먼저 피를 낸 쪽이 이기는 걸로 하지."

이번에도 영진에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얼굴은 굳어가고 몸은 긴장되었다. 그런 조건을 걸어도  만큼, 상대는 자신이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소매를 걷어붙인 팔뚝으로 갈라진 근육이 보였다. 한 때는 영진의 몸에도 있었던 것이었다.

마누엘은 깜빡했다는 듯 작게 소리를 내더니 영진에게 말했다.


"아까 내가 조건이 하나 있다는 것을 기억 하나?'


영진은 올 것이 왔다는 듯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이 너무 좋았으니 이제 자신에게 패널티가 부여될 때도 되었다.

그녀는 부디 운신에 방해가 되지 않는 종류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옷을 벗고 대련에 임하게."


"...하?"


마누엘의 말에 관중석에서 환호가 들려왔다. 영진은 멍청하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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