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화 〉13화입니다. (13/75)



〈 13화 〉13화입니다.

“저기 있다!”


저 멀리 들려오는 목소리에 영진은 이를 물며 달렸다.


“여기서 오른쪽!”


“이미 막혔어! 계속 가야해!”

이릴이 말한 방향으로 발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틀림 없이 매복이 있을 것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가려는 곳마다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뒤쫓는 이가 몇 명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몰아지고 있다.’


이건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교묘하게 길을 막으며 마치 가야할 길을 안내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영진은 짜증이 솟구쳤으나 어쩔  없었다. 혼자라면 매복을 뚫고 지나갈  있었으나 이릴이 함께였다.

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없었더라면 출구는 커녕 여전히 감옥에서 빌빌거리며 있었을 테니 말이다.

“영진, 앞에!”

“칫!”


생각도 못하게 하는군. 영진은 앞에서 달려오는 병사들을 피해 코너를 돌았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전부 때려눕히기 전에 후속 병력이 도착할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뛰던 영진의다리가 멈췄다.


이릴은 어째서 멈췄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천장과 이어져 있는 드높은 벽이 그들 앞에 있었다. 낙원의 가장자리였다.


숨을 고르는 그녀들 뒤로 수많은 발소리가 몰려왔다. 영진은 이릴을 자신의 등 뒤로 보내고 창을 치켜들었다.


수십 쌍의 시선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영진은 혹여 몸이 떨리지 않게 긴장시키며 그들을 바라봤다.

길지 않을 대치가 시작되었다.

-

“하프 엘프와 백토 공주라.”

가면을 쓴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노예 경매소 아래에 위치한 감옥에 있었다. 뒷처리를 위해 돌아온 트레오와 함께였다.


트레오는 중얼거리는 남자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흥미가 있으신가 봅니다?”

“둘 다 희귀한 상품이지 않은가.”

“그렇지요.”

낙원에서 엘프가 마지막으로모습을 보인 것이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백토 공주는 그것보다 좀 더 빈번하게 나오기는 했으나 역시 모습을 보인지도 해를 넘긴 뒤였다.

그리고 이번 소동으로 그 둘이 탈출했다.

사실상 금화보따리에 다리가 달려 도망간거나 다름 없었지만 트레오는조급해하지 않았다.


낙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자력으로 탈출하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물며 알고있다고 하더라도 출구에서붙잡힐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낙원의 경비대에 연락해 리베치오의 인력과 연합해서 쫓고 있었다. 그들이 감옥으로 돌아오는 것도 시간 문제이리라.

트레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경 께서도 이번에 열리는 경매에 참여하실 생각이었습니까?”

“마누엘이라고 부르게. 이곳에서는 작위나 직위으로부르지 않는게 불문율 이지 않나.”

“제가 또 결례를 범했군요.”

트레오는 전혀 결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마누엘이라는 이름도 가명일게 분명했다. 옛날 성자로 불리던 이가 부활한  아니라면 말이다.


“경매에 참가할 생각은 있었네. 애지중지 키우던 노예가 죽어버렸으니 새로 구해야 했지.”

“저런, 안타까운 일이군요. 병이었습니까?”

“아니, 나와 대련 중에 명을 달리했지. 녀석은 호전적인 주제에 굼떴거든.”


장부를 적던 트레오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곧바로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호전적이고 날랜 녀석이 필요하시겠군요.”


“그렇지. 하지만 지금 내가 보기에는 그런녀석들이 보이지 않는군.”

마누엘의 눈이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감옥 안의 노예는 모두 여성이었고 싸움 하나 할  모르는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 가녀리고 유약하다.

 보아도 밤놀이 정도로 쓰고 버릴 물건들 뿐이었다.

트레오는 팬으로 장부를 두드리며 말했다.


“최근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3년 전 리윈 재건을 외치며 남부에서 군사가 일어났던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전투라고 할 것도 없었군요.”

그마저도 일주일만에 격파당했다. 그들이 리윈의 왕으로 옹립했던 이는 사지가 찢겨져 짐승에게 산 채로 파먹혔고 가담한 이들은 모두 참수되어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천이 넘는 수가 흘린 피로 강을 이뤘다고 하니 장관이었다. 고 동료가 떠들던 것이 기억났다.


“그러니 마누엘 님께서 찾으시는 노예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입니다.”

“뭔가 따로 있나보군?”

“마누엘님께서는 백토 공주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나약한 마물이지. 꽤나 미형이기도 해서 몇  구매한 적이 있네.”

번번히 부숴먹었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워지겠군요.  백토 공주가 마누엘 님께서 찾으시는 노예입니다.”

“호오, 어째서지?”


마누엘은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것은 보통의 백토 공주와는 다릅니다. 강하고, 재빠르며, 사납죠. 마치 길들여 지지 않은 맹수와 같은 녀석이었습니다.”

“그래봐야 백토 공주가 아닌가?”

“이건 동료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트레오는 일부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어차피 이곳에는 두 사람 외에는 노예 밖에 없었으나 분위기란 것이었다.

마누엘 역시도 그런 장난스러운 행동에 맞추듯 슬쩍 귀를 가까이 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한차례 탈출 소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탈출 소동이라.”

“탈출한 노예는 백토 공주 하나였고 곧바로 후송하고 있던 가용 병력의 대부분이 차출되어 포획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과정에서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을 때려잡았답니다. 상행단을 호위하고 있던 세구지오 대장이 나서서야 겨우 포획할  있었다 합니다.”

“호오…”


마누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세구지오라면 그 역시도 아는 이름이었다.


그가 알기로 세구지오가 이끄는 병사들은 마물을 잡는 일에 특화된 자들로 절대로 약하다고 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살생이 불가한 제약을 달고 싸웠다고 하나  병사들을 스물 넘게 때려잡고 세구지오가 직접 움직여 포획했다 하니 과연 흥미가 돋지 않을 없었다.


마누엘은 가까이 했던 몸을 바로 하며 말했다.


“좋은 이야기를 들었군.”

“좋게 들으셨다니 저야말로 기쁩니다.”


“허면 나도 자네에게 나쁘지 않을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경청하겠습니다.”


트레오는 고개를 숙였다. 마누엘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물은 먼 옛날 용사의 손에 죽어가던 마왕이 세상에 뿌린 저주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지.”

“예?”


뜬금 없는 소리에 무심코 되물었다.


그야 당연했다. 마누엘이 말한 것은 세 살 먹은 갓난 아이도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왜 지금 말한단 말인가? 의문스러운 시선에도 마누엘은 여전히 빙글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마왕의 저주를 마기라고 부른다. 마물의 몸에는 그것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지.”

“그렇...습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마누엘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기는 접촉한 인간을 오염시킨다네. 물론 마물과 단순 접촉했다고 한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지. 만약 그랬다면 자네들이 먼저 알아차리지 않았겠나?”


맞는 말이었다. 당장 트레오 역시도 아직 신입에 불과할 때는 피를 흘려가며 마물과 부딪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말이지, 혹시라도 정제되지 않은 체액이 평범한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가게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


“마기에 접촉된 인간은 마물과 같아진다. 이성을 잃고 난폭해지며 사람들을 해치려 들지. 그 남자처럼 말이네.”


그렇게 말하고는 마누엘은 트레오를 바라봤다. 트레오는 더 없이 창백한 낯빛이었다.


‘그래서 우노가 그렇게 된 거였나…!’


“굳이 더 묻지는 않겠네. 어차피 마기라는 것도 제국 내에서 아는 이가 많지 않아.”


대신. 마누엘은 빙글 웃으며 말했다.

“이번 건을 덮어주는 것까지 포함해서 기대하도록 하지.”

트레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왔다. 리베치오 상단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마누엘의 부관이었다. 부관은 마누엘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부관이 가져온 소식에 마누엘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숙녀분들께서 기다린다고 하는군.”

토끼를 잡으러 갈 시간이었다.

-

영진은 여전히 병사들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어째서 달려들지 않는 거지?’

그들은 빈틈 없이 포위를 짜놓고는 가만히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쪽에서 성급하게 달려드는 것을 기다리는 걸까.하지만 이쪽에서도 쉬이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포위가 촘촘하기도 했거니와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났다.


대부분 무장하지 않은 구경꾼들이었다. 가지각색의 가면을 쓰고 저들끼리 소곤거리고 있었다.

영진의예민한 귀는 그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듣지 않으려했다.

모두 자신을 욕망하는 말이었다.


관상용으로 나쁘지 않겠다는 말부터 몸을 평가하는 듯한 말, 그리고 백토 공주 자체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목소리가 여과 없이 들렸다.


영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닥쳐 이새끼들아!”


그 외침에 잠시 사위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윽고 웃음 소리로 가득찼다.


빠짐 없이 그녀를 비웃는 것이었다.


“어쩜, 귀엽게도!”


“하하! 궁지에 몰린 쥐, 아니 토끼라도 자존심은 있다는 건가!”


“어이!  번  소리쳐봐! 우리에게 그 귀여운 목소리를 들려주는 거다!”


“이새끼들이…!”

영진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으나 뛰쳐나갈 수는 없었다.

미약하게 등 뒤에서 옷깃을 잡고 있는 손길 때문이었다.

“영진, 참아야 해.”

“나도 알아.”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내쉬며 진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천성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젠장!”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난리라도 치고 싶었다. 이렇게 좀 쑤시게 대치를 하는 게 아니라 포위망 한가운데를 파고 들어서 모조리 흩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끝이었다.자신이 날뛰는 사이 이릴은 잡힐 것이고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해야할 것이었다. 이릴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 생각이이릴에게는 훤히 보였다.

함께한 시간은 짧았으나 영진은 숨김이 없었고 직설적인 인간이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생각을 알기란 어렵지 않았다.


“미안해. 도움을 준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짐만 되고…”

그렇기에 이릴은 그렇게 말했다.


만약 영진이 혼자였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렵지 않게 포위를 뚫고 도망칠  있었으리라.

전부 나약한 자신 때문이었다.

“됐어. 어차피 결과는 똑같았을 거야.”

영진은 굳이 그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생각하고 있던 걸 말했다.


“오히려 네가 있어서여기까지  수 있었던 거지.”

“영진…”

“탈출하지 못해도 네 탓이 아니야. 솔직히 고작 둘이서 뭘 어떻게 하겠어?”

한 쪽은 힘만 무식하게 센 녀석이었고 한 쪽은 그냥 평범한 여자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여자 둘이서 장정 수십을 뚫고 나가야하는 일이다.


당연히 가능할 리가 없었다.


“운이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자고.”

영진은그렇게 중얼거리며 병사 너머를 바라봤다.


저 멀리서 누군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발 소리는 셋. 그중 하나는 들어본  있는 녀석이었다. 나머지 둘은 잘 모르나 한쪽은 걸음걸이가 여기서 들었던 그 어느 것보다 묵직했다.

“어쩐지 대치가 길어진다고 했더니 이유가 있었나.”


“영진?”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고개를 빳빳이 들어 병사들 사이로 모습을드러내는 놈들을 바라봤다.

감옥에서 보았던 트레오와 가면을 쓴 남자였다.

칠흑의 나비 가면을 쓴 남자가 빙글 웃으며 말했다.

“이런 너무 기다리게 했나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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