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9화입니다. (9/75)



〈 9화 〉9화입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서 데일은 홀로 문 옆에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 웃으며 카드를 돌리고 있었다. 보초의 일은 데일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으나 신입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불만을 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인 자신과는 달리 저기 실없이 웃고 떠드는 셋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베테랑인 선배들이니 말이다.

물론 그들의 덩치가 데일보다 컸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데일은 지난 밤 떠나간 본대를 떠올렸다. 본래라면  역시도 그 행렬에 끼어 에리오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입은 이곳에  번 쯤은 체류하는 것이 관례라고 하던가.


‘관례는 무슨…’

달리 상징성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뭍 위로 드러나지 말아야할 장소가 아닌가.

이런 곳에 자신 같은 신입햇병아리를 쳐 박아 두는 것보다 저기 카드놀음을 하는 선배들 같은 베테랑들이 있어야할 곳이었다.

불만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비롯해서 리베치오의 단원들은노예경매소 바깥을 나갈 수 없었다.

이곳 낙원이라 불리는 도시는 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이지 데일 같은 무지렁이들이 돌아다닐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은 일대로 하고 쉬는 것도 제대로 쉬지 못하니 고역이 아닐  없었다. 데일은 옅게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를 세었다.

“무슨 소리 안들렸냐?”


카드놀음을 하고 있던 선배  하나, 우노가 말했다.


“네가 대가리 굴리는 소리는 들리는 거 같은데.”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패나 까 보시지.”


남자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아냐, 분명 비명 소리 같은 게 들렸다니까?”

“보나마나 또 거리에서 쇼 하고 있는 거 겠지.”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노예를 학대하는 장면은 낙원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있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도 자세히 본 적은 없었으나거리를 오가며 한  씩은 그런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우노가 들었다는 소리 역시도 그런 것이리라. 동료인 두에스가 그렇게 말했으나 우노의 표정은진지했다.

“거리에서 들려온 게 아니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린 것 같단 말이지. 이를테면 노예 감옥에서 말이야.”


“나 참, 시간을 끌려고 별 짓을 다 하는구만. 어이, 데일!”

“예, 예!”


멍하니 서 있던 데일은 느닷없는 호명에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너도 들었냐?”

“무슨 말씀이신지…”


“저녀석도 못들었다고 하잖냐.”

멍 때리고 있느라 주위를 경계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훈련을 빙자한 구타가 시작될 테니 말이다.


“분명 똑똑히 들었다니까.  귀가 얼마나 좋은지 또 설명을 해줘야 알아 듣겠어?”

“지겹게 들었으니 입 뻥긋 할 생각하지마. 데일, 빠르게 가서 확인하고 와. 이 녀석 말이 맞는지.”

트레오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데일에게 말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 바깥으로 나왔다.


초소에서 노예 감옥까지는 고작 열 걸음도  되지 않았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열쇠를 문에 꽂는 순간이었다.


-아아아…

“응?”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일은 잘못 들었나 싶어 문에 귀를 가까이 했다. 그러자 소리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쇠를 돌렸다. 잠금이 풀리고 문이 열리자 창살 너머로감옥의 전경이 보였다.

“이게 무슨…”

눈에 보이는 풍경에 데일은 할말을 잃고 멍하니 서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피투성이인 노예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때 난동부리던 백토 공주였다. 그녀는 커다란 귀 안쪽을 마구 긁으며 억눌린 신음을 내고 있었다.

 옆으로 하프 엘프가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었고 나머지 노예들은 그녀들을 피해 구석진 자리에서 떨고 있었다.

아마도 우노가 들었던 비명이라는 것은 백토 공주가 내지른 것이리라. 데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쥐고 있던 단창을 역수로 쥐었다.


“어, 어이!  내려!”


고함을 치며 뭉툭한 부분으로 위협하지만 백토 공주는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그 모습에 압도당하는 것은 데일이었다.

이미 일격에 그녀에게 제압 당한 전적이 있었고 미친듯이 귀를 긁으며 피투성이가  모습은 꽤나 괴기스러운 몰골이었다.


그렇지만 이 소란을 보고도 물러날 수는 없었다. 저 몰골을 보고도 그대로 있다가는 책잡히는 것은 자신이었다.

데일은 우선 제압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차피 감옥에 갇혀 있는 노예다. 듣기로는 조교사의 손을 거쳤다고도 하니 이전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적당히 복부를 노리면 되겠지.'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없어야했다. 노예는 팔 상품이다. 최대한 깨끗한 몰골로 다뤄야했다.


역수로  창대가 백토 공주에게 쇄도했다. 그때까지도 노예는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귀를 긁었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데일의 두 눈이 화전등처럼 크게 뜨였다.

"이, 이게."


내지른 창대가 옆구리에 붙잡혀 있었다. 안간 힘을 쓰며 빼내려 했으나 피투성이인 손이 그것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데일은 당황하며 허둥지둥 거리다 노예와 눈이 마주쳤다.

초점이 사라진 공허한 자안이었다.


"죽여버리겠어…"

"허억!"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모습에 데일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엇 하는 사이 당겨지는 힘에 몸이 앞으로 딸려나갔다.


"어이쿠!"


우당탕 넘어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데일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머리 위로 드리워진 예기에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드니 단창을 내려찍듯 역수로 쥐고 있는 노예의 모습이 보였다. 데일은 황급히 말했다.


"잠깐…!"


그러나 노예가 창을 내려 찍는 것이 더욱 빨랐다.

-아아악…


열린 문 틈으로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 소리를 건너방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이 듣지 못할리 없었다.


그들은 시시덕 거리다 얼굴을 굳이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누가 뭐라하기도 전 동시에 몸을 일으켜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어이! 무슨 일…!"


곧바로 감옥에 도착한 그들은 눈앞의참상에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방아를 찍듯 창으로 데일을 난도질 하는 노예의 모습에 말을 잃고 말았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근처에 있던 하프 엘프였다.

"영진! 그만, 그만해!"

"죽여버릴거야… 죽여버릴거라고…"

"이미 죽었어!"


온몸을 던져 저지하려는 듯 했지만 힘의 차이가 명백하다.


하프 엘프를 달고서도 백토 공주는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달려온 남자 중 트레오가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씨발, 모처럼 쉬는가 했더니…"


두에스가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눈앞의 참상을 목격하고 겁에 질리거나 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산전수전을 겪어온 그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긴장시키며 생각했다.


고작 신입 하나가 죽은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정도는 둘러댈 수 있는 것이었다. 귀족에게 잘못 보여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났다던가 하는 걸로 말이다.


하지만 노예가 무기를 가지게 되는 건 다른 일이었다. 하물며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녀석이라면 더욱 그랬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자들은 각기 무기를 손에 쥐었다.

돌아버렸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상품이기에 훼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들고 있는 것들 중에 날이 서있는 것은 없었다. 노예를 제압하고 밀어낼 봉과 혹여 일어날 사태를 대비한 몽둥이가 무장의 전부였다.

그들이 슬금 발을 내딛자 방아를 찍던 백토 공주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한다. 아주 잠깐의 대치에 먼저 움직인 것은 남자들이었다.

봉을 쥔 두에스가 먼저 영진을 향해내질렀다. 우선 데일의 시체에서 멀리 떼어내려고 했다. 그것을 보고 백토 공주는 단창을 뽑아 뒤로 물러났다. 하프 엘프를 달고 있는 상태에서도 유려한 몸짓이었다.

남자들은 그 모습에도 방심하지 않으며 제빠르게 데일의 시체를 끌고 나왔다.

문을 닫고 나서야 세 사람은 숨을 토해냈다.

"씨발, 병신 같은 새끼. 뭔짓을 했길래 노예한테 죽어?"


"죽은 새끼한테 물어보면 답이 나오냐? 그래서 저거 어쩔거냐."


"어쩌긴 씨발. 당연히 무기도 회수해와야지."


우노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데일 그 어리버리한 자식이 기어코 사고를 쳤다. 일이 잘못되면 세 사람은 책임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목을 내놓는 것 외에는 없었다.

자신들의 대장인 세구지오라면 분명 주저없이 그럴 것이었다. 우노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다른 두 사람 역시도 같은 생각을 했었기에  말에 아무런 이의를 가지지 않았다.


"어떻게?"

"문을 따고 들어간다. 어차피 무기를 회수하려면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저 꽤 날래던데. 무슨 수로 제압하지?”

"씨발, 그래봐야  명이야. 좁아터진 감옥에 셋이서 덤벼들면 제압하는 건 껌이야."

우노는 그리 말하며 데일의 허리춤에서 열쇠 꾸러미를 들었다.  중에서 감옥 열쇠를 찾아 들었다.

"여는 건 내가 테니 너희 둘은 저 년이 허튼 짓 못하게 해. 알겠어?"

대답은 듣지 않고 다시 문을 열었다. 아까 물러났던 그대로 벽에 붙어있는 백토 공주와 그 옆에 엉겨붙어 있는 하프 엘프가 보였다.


이제보니 저 둘은 꽤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하프 엘프 쪽이 일방적으로 다가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되도록 사이가 좋기를 바랬다.

'여차하면 하프 엘프 쪽을 인질로  수 있을 테니.'


우노는 그리 생각하며 감옥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를 두에스와 트레오가 봉을 들고 호위했다. 여차하면 달려드는 것을 밀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창살의 문이 열릴 때도 백토 공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봉을 두고 몽둥이를 든  사람이 감옥 안으로 들어올  까지도 말이다.

"영진, 진정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거야. 천천히. 그래. 그렇게."

"스읍, 후우…"


가까이 다가가니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저 하프 엘프가 백토 공주를 진정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었다.

불안정한 정신도 문제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정신인 것도 문제였으니. 몽둥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발자국 더 내딛었을 때 벼락처럼 고개가 들어올려졌다. 세 쌍의 시선과 자안이 마주쳤다. 우노의 옆에 있던 트레오가 먼저 뛰쳐나갔다.


"영진! 안 돼!"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으며 백토 공주가 튀어나왔다. 잡혀 있었던 것치고는 날랜 몸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움직임이 무뎠다.

‘할만하겠는데.’


백토 공주의 공격은 매서웠으나 날렵하지 않았다. 배운 이의 정돈된 느낌이 아닌 야성적인 휘두름이었다. 불규칙한 공격이었으나 나름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에게는 훤히 보이는 것이었다.


평범한 상대였다면 트레오 홀로 제압이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뭔 놈의 힘이…!'


최대한 흘려보낸다고 움직였는데도 그랬다. 가녀린 체구에 비해서 부딪혀 오는 힘이 트레오의 예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는 몇 번의 공격을 피하다 틈을 보고 재빨리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저 녀석, 힘이 생각보다 강해.”


“구체적으로는?”

“적어도 하급 마물 이상.”


백토 공주의 무력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 사실은 세 사람 역시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노는 트레오의 말을 경시할 생각이 없었다.

신입이라고 하나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 훈련받은 데일이 제대로 손도 못쓰고 당했다. 이미 그 사실로도 눈앞에 있는 노예가 평범한 백토 공주가 아니라는 것 쯤은  수 있었다.

‘하지만 하급 마물 급이라…’


우노는 생각했다. 마물은 간단하게 상중하 급으로 나눠져 있었다. 하급이라고 하나 마물인 이상 평범한 인간보다 몇 배는 강한 존재였다.

우노는 흘깃 백토 공주 뒷편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하프 엘프를 바라봤다. 어쩌면 저것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이. 모여 봐.”


 사람을 가까이 부른 뒤 작은 목소리로 계획을 이야기 했다. 두에스와 트레오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동시에 달려들었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왔던 두 사람의 합격(合擊)이 이어졌다.

제 아무리  사람을 압도하던 백토 공주라 하더라도 그것을 뚫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은 곧 불가능하다는  아니었다.

짧은 시간동안 주고 받은 공격 속에서 공기를 뚫고 창이 내질러졌다. 두에스가 얼굴로 질러지는 공격에 표정을 굳히며 황급히 피했다.

반격이 시작되었다.

"어이!"


그리고 그 반격은  사그라들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토 공주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목덜미에 칼이 드리워져 있는 하프 엘프와 우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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