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8화입니다.
"내가 살고 있던 왕국은 리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
한스는 우두커니 앉아 중얼거렸다.
"작은 나라였지만 현명한 왕의 치세 아래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곳이었다. 빈곤한 이는 있었으나 불행한 이는 없었지. 풍경이 아름다웠고 활기가 넘실거리는 살기 좋은 나라였어."
보글보글. 수면 위로 기포가 올라온다. 조교사는 그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격정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멸망했다! 왕은 현명했으나 어리석었다. 제국의 야망이 얼마나 강대한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제국의 세작을 붙잡아 알렸는데도 왕은 온건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지껄이고는!"
한참동안 열변을 토하다 머리를 붙잡는다.
두통이 심한 것인지 으으 신음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괜찮아진 것인지 멀쩡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언제 분노했냐는 듯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다.
그는 잠시 제 얼굴을 쓰다듬다 제 앞에 얼씬거리는 줄을 잡아당겼다.
"그래, 내 이야기를 듣고 어떤생각이 들었는지 말해주게."
아까와는 달리 자상한 어투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스는 머리를 긁적이다 무릎을 굽히며 영진과 눈을 마주쳤다.
초점 없는 눈이 썩은 동태눈깔 같았다. 눈동자 위로 물방울이 흘러 내려가는데도 깜빡임조차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쳐박아 둔 탓일까. 하지만 한스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전문가였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오래 살려두면서 고통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말아 쥔 주먹이 뻗어져 복부를 강타한다. 그것으로 영진은 되살아났다. 폐에 가득한 물을 입과 코로 토해내며 강제로 의식이 끌어올려진다.
"크헥, 콜록! 커어…"
콜록거리는 소리가 오래 이어졌다. 물을 모조리 토해내고 나서야 영진은 주위를 볼 수 있었다.
출입구인 문을 제외하고 모두 벽으로 막혀 있는 공간. 머리 아래에는 귀를 적시고 있는 커다란 물통이 있었고 거꾸로 뒤집힌 시야로 움푹 패인 눈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벌써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몇 번 째지?"
영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고 귀에서는 계속해서 이명이 들려왔다. 그야말로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이었으나 한스는 친절히 답했다.
"이번이 세 번째다."
"세 번…"
세 번. 죽음에 한 발짝 걸쳤던 횟수 였다. 영진은 멍한 눈으로 조교사를 바라봤다.
그는 세구지오의 말을 듣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조교사라는 말에 영진은 경매 전 자신의 기를 죽이기 위해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물고문이라는 형태로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이곳에 들어와 거꾸로 매달려진 직후부터 영진은 끊임없이 물속으로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히고 폐가 쑤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영진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한스가 상대해온 훈련된 군인이 아니라 그저 성격이 더러운 인간.
"...뭘, 원해."
그렇기에 포기한다.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노예로서의 삶에 굴복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진의 모습에 한스가 웃는다.
"아무것도."
밧줄을 쥔 손이 풀린다. 물 속에 처박힌 영진의 몸이 발작하듯 비틀렸다.
그것을 보며 한스는 오래 전 멸망한 고향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
지하도시인 낙원에는 햇빛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는 풍경은 한낮의 거리보다도 밝았다. 지상의 시간이 어떻든 이곳은 항상 활기로 가득차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며 걷고있었고 그 가운데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은 이가 있었다.
세구지오는 은근히 모이는 시선에 허리춤에 찬 검을 만지작거렸다. 적대적인 시선이 섞여 있지는 않았다. 정체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이에 대한 호기심과 의문에서 오는 것이었다.
세구지오는 그 시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이곳에 있는 것부터가 불만이었다.
그러나 모시는 주인의 체면을 구길 수 없기에 검을 뽑는 대신 세구지오는 몸을돌려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오, 여기 있었군.”
천막 안으로 들어오자 반기는 이가 있었다. 세구지오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한스에게 물었다.
“녀석은 어찌 되었지.”
“내가 누군가? 부탁한대로 얌전하게 만들었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한스에 세구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덧붙여 물어보는 것은 없었다. 그가 해냈다는 말은 요구한 것보다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뜻이니 말이다. 평소라면 그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스는 세구지오가 자신을 지나치기 전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네.”
“뭐냐.”
“백토 공주란 년들은 원래 저런가?”
세구지오는 고개를 돌려 한스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지?”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고 할 지라도 한계라는 게 있다네. 단련 받은 이라고 해도 말일세. 평범한 인간이라면 더욱이 그 한계는 낮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한스 특유의 빙빙 돌려말하는 화법에도 세구지오는 아랑곳 하지 않고 툭 잘라 말했다.
이미 함께 움직인 세월이 햇수로 두 자리가 넘어갔으니 당연했다. 한스는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 아무리 훈련된 인간이라도 역치를 넘어서는 고통을 주게 된다면 굴복하고 말지. 하지만 저 노예는 뭔가? 고통을 잘 참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반드시 지켜야할 정보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끝끝내 굴복하지 않더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평범한 노예라면 고문을 시작하자마자 울부짖으며 살려달라 외칠 것이었는데 그 노예는 비명을 지르기만 할 뿐 그에게 비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살려달라 외치기는 커녕 죽여버리겠다고 하지 않나. 물론 한스는 그 대답으로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실패 했다는 건가?”
“아니. 네가 원하는 대로 얌전하게는 만들었지. 고통에는 익숙하지 않아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언제든 고통을 딛고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당장은 아니라는 뜻이군.”
“그런 셈이지.”
그렇다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세구지오는 한스에게서 등을돌려 걸었다.
“최소 인원만 남기고 출발한다.”
“어디로 가는 건가?”
능숙하게 말에 올라탄 세구지오가 말했다.
“에리오로. 주인께서 우리를 찾으신다.”
-
영진은 의식을 차렸다.
주위로 노예들이 잠들어 있었고 이릴이 머리 맡에서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 머리 뒤에 푹신 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무릎 베개를 해주고 있는 듯 했다.
삼면으로 보이는 회색 벽과 쇠창살을 보고서야 처음 갇혔던 노예 감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몸이 물 먹은 듯 축 늘어졌다. 실제로도 몇 리터나 되는 물을 강제로 마셨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전히 폐가 쿡쿡 쑤셨고 목은 내지른 비명으로 부은 느낌이었다. 눈도 제대로 뜨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실감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감옥이 아니라 고문실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자신은 기절해 있고 이건 그 사이에 꾸는 꿈이라고.
영진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는 입을 열었다.
“이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목 안쪽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도 함께였다.
“영진!”
미약한 음성에도 이릴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리고는 푸른 눈에서 눈물을 쏟으며 영진을 껴안았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정신이 들어서…”
어깨가 젖어들어가는 느낌에도 영진은 맥 없이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저항할 힘도, 울지 말라고 말할 기력도 없었다. 그저 이릴이 스스로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이릴이 영진에게서 떨어진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녀는여전히 눈물을 훌쩍거리며 말했다.
“몸은 괜찮아?”
“아니, 죽을 것 같아.”
몸 안쪽 깊은 곳에서는 용암이 솟구치듯 뜨거움이 흘러나왔지만 팔다리 같은 신체 말단은 엄동설한의 추위처럼 몹시 차가워 감각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따뜻한 난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힘 없이 대답하는 영진의 모습에 다시금 울컥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던 이릴이었으나 그것을 꾹 참으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최소한 다른 사람들처럼 되지는 않았으니까.”
이릴은 최악의 경우 그녀가 다른 노예들처럼 넋이 나간 사람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교사의 손에 의식을 잃은 영진이 들려왔을 때 하염 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그의 손을 거치고 멀쩡한 이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감사했다. 영진은 눈물이 그렁한 푸른 눈을 보며 말했다.
“내가 의식을 잃고 얼마나 지난 거야?”
“꽤 오래. 적어도 반나절은 지난 것 같아.”
“반나절, 이라…”
영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릴은 일어나려는 영진의 몸을 붙잡으며 말했다.
“일어나지 마. 좀 더 쉬어야해.”
“지금부터 몸을 풀어놔야 탈출을…?”
일순간 영진의 몸이 휘청거렸다.
눈앞이 핑 돌았다. 몸상태가 좋지 않은데 갑자기 일어서려 했으니 당연한반응이었다. 이릴이 붙잡고 있었던 탓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런건 문제가 아니었다.
“영진, 괜찮아?”
“...으.”
“영진?”
이릴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으나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영진은 귓가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노예들의 옅은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지만, 영진은 소음에 허우적 거리며 말했다.
“이 소리, 뭐야?”
“소리라니?”
“긁는 소리, 뭔가를, 자꾸만 긁고 있어.”
이릴은 영진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그렇기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영진, 내 말을 들어야해.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건 그냥 환청일 뿐이야. 실제로 들려오는 게 아니라.”
“아냐… 계속 들리고 있어. 사각, 사각하고 계속 들려. 점점 더 커지면서, 으…”
“영진.”
이릴의 말에도 영진은 허우적거리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려 했다.
하지만 매끈한 피부만 만져질 뿐이었다. 더듬거리며 귀가 있어야할 부분을 만지다가 그제야 제 귀가 머리 위로 이동했었다는 걸 깨닫고는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커다란 귀를 어떻게 막아야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손바닥을 펼쳐 귀구멍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막았다. 인간의 귀와 구조적으로 달랐기에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 했다.
사각거리는 소음에 계속해서 들려왔다. 영진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그것을 견디려고 했다. 옆에서 이릴이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사각거리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영진은 손을 더듬으며 귀를 완전히 막으려고 했다.
그러다 어느 한 부분에 닿았다. 귀 안쪽이었고 딱딱했다. 다른 부드러운 면과 다르게 불룩 튀어나온 그것은 세 줄기로 쭈욱 이어져 있었다. 마치 상처 위에 난 피딱지를 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기억이 떠오른다.
작은 갈퀴를 쥔 한스와 의자 위에 묶여 있는 자신.
큼지막한 귀 안쪽을 갈퀴가 훑고 간다. 마치 짐승의 털을 빗어 넘기는 듯한 유려한 손길이었으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귀 안쪽으로 미세한 선혈이 세 줄기로 그어진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도 한스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 번 훑고 지나간 길을 다시 처음부터 섬세하게 지나간다. 마치 밭을 가는 농부처럼 경건한 몸짓이었다.
귀 안을 밭 삼아 하는 갈퀴질이 몇 번이고 반복 되었다.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고 차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영진은 떨리는 손으로 피딱지를 만졌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게다가 어느 순간 가려움도 느껴졌다.
미친듯이 귀 안쪽을 긁었다. 딱지가 뜯어지고 피가 묻어 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영진, 그만해! 피가 나오고 있잖아!”
“젠장 가려워… 시끄럽다고…”
이릴이 영진의 손을 붙잡았으나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붙잡힌 손을 내팽겨치고 미친듯이 귀를 긁었다. 이릴은 망연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멀쩡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조교사의 손을 거친 뒤였으니. 하지만 이렇게 심각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불과 조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조금 기력이 떨어져 보였을 뿐 평범해 보였으니까.
“영진…”
“으, 으으…!”
영진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귀가 아프고 머리가 웅웅 거렸다. 눈앞은 이미 흐릿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감각이 귀에 집중된 것 같았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귀에서느껴지는 고통이 점점 커져만 가고 제대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아아아!”
갈라진 비명이 감옥을 가득 채운다. 이미노예들은 깨어나 구석으로 도망가 있었다.
넓어진 공간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영진과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이릴만이 유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