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화 〉6화입니다. (6/75)



〈 6화 〉6화입니다.

출구를 막은 판자 틈으로 햇살이 들어와 마차 안을 비쳤다. 다그닥 거리는 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소음이 귀를 맴돌았다.


잠들어 있던영진이 깨어난  당연한 수순이었다.


‘잠들었었나.’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 한쪽 어깨가 무거운 것을 느꼈다.

고개를 슬쩍 돌리니 태연하게  어깨에 기대 잠든 이릴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긴 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밤동안 이릴과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소하게는 자신이 생각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을.

이릴은 자신이 아는 한도에서 세상을 설명했다. 라움이라 불리는 거대한 대륙과  위에 수많은 제국과 왕국들, 그리고 영진의 지금 모습에 대해서 말이다.

백토 공주라는 이름의 마물. 솔직하게 말해서 영진은 앞의 이야기들을 모조리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제국이니 귀족이니 하는 것들은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었고 또 너무나 방대했기 때문에, 그리고 지루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백토 공주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집중해서 들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현재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였으니 당연했다.


백토공주는 깡패 두목 같은 것이었다. 백토, 부하 깡패들을 거느리고 조종하며 인간을 공격하고  몸을 보호하는 존재.

그렇지만 반대로 일신의 무력은 미약하기 그지 없어서 평범한 인간이더라도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백토 공주의 특징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백토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엄연히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미색이 빼어난 여인들이어서 꽤 비싼 값으로 팔린다고 한다.

지금의 영진처럼 말이다. 그제야 영진은 자신이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품었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왜 노예가 되었나? 미색이 훌룡하기 때문에. 실로 간단한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리 유난인지.’


깨어난 지 수 일이 지난 상태였으나 영진은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거울은 고사하고 물조차  적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물론 이릴이 호들갑을 떨며 칭찬했었지만, 딱히 그 말이 와닿지는 않았다.


그나마 제 눈이 자주색이고 머리가 하얗다는 것 정도일까. 생각을 이어나가던 영진이 문득 어깨를 털며 말했다.

“어이, 일어나.”


“으음… 왜…”


“아무래도 도착한 것 같다.”

마차가 움직이면서 느껴지던 흔들림이 사라졌다.

그제야 흐리멍텅하던 이릴의 눈이 번쩍 뜨여지며 몸을 일으켰다. 영진은 출구 가까이 몸을 움직여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옅들었다.

-

“정지! 신분과 목적을 말하시오!”

세구지오는 눈가를 좁혔다.

그가 알던 문지기가 아니었다. 좀 더 늙수그레한 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눈앞에 있는 이는 이제  솜털이 빠진 듯한 애송이였다.


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앞선 마부가 잽싸게 증명패를 내보이며 말했다.


“리베치오 상단입니다. 상품을 팔기 위해 에리오에서부터 왔습니다.”

“리베치오?”

투구 아래에서 형형히 빛나는 눈빛. 적어도 호의를 가진 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마부가 무어라 덧붙이기 전에 세구지오가 앞으로 나왔다.

“이전에 있던 문지기는 어디로 갔지?”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소만.”


“늙고 다리를 저는 남자 말이다.”


“그 분은 어제 하루 교대 없이 일을 하시고 쉬고 계시오.”

문지기는 담담히 말했다. 세구지오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딘가 아주 낯설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문지기는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검문을 해야겠는데 마차 내부를 보여주시겠소?”

“문지기 일을 시작한  얼마 되지 않았나보군.”


“경력의 짧음이 문지기의 소명을 다하지 못할 이유는 없소. 검문을 거부하겠다면 도시에는 들여보낼 수 없소. 다음!”

단호히 말하며 뒤로 이어지는 행렬을 향해 외친다. 하지만 누구도 앞을 가로막고 있는 리베치오를 지나쳐 문지기에게로 오는 이는 없었다.

세구지오는 아직 젊은 문지기를 보며 말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터. 그래도 막겠다는 건가.”


“문지기의 소명을 다할 뿐이오.”


문지기, 자코모는 흉터를 가진 남자를 보며 말했다.

리베치오의 악명은 그 역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을 후원하는 자가 지체 높은 귀족이라는 소문 역시도 말이다.

하지만 자코모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코모의 아버지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도시의 치안을 지키고 범죄자를 소탕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란 그는아버지를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였고 문지기가 되어서도 그 생각은 변치 않았다.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범죄자를 막는 것 역시도 정의로운 일이었으니. 그렇기에 리베치오 상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코모는 결심했다.


그들의 죄를 낯낯이 파헤치겠노라고.

“마음대로 해라.”

그런 의지가 깃든 눈빛에 세구지오가 말했다.


자코모는 힘있는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쳤다. 수많은 시선이 꽂히자 묘한 고양감이 차올랐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하는 감정이었다.

가장  번째 마차에는 문이없었다. 출구를 바깥에서 판자로 덧댄 수준의 허술한 방비에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앞으로 다가가 틈으로 그 안을 바라봤다.


“흠!”

순간적으로 몰아치는 악취에 몸이 멋대로 뒤로 갈 뻔 했으나 자코모는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텼다.


그리하여 보이는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희미한 빛으로 보이는 내부에는 연령 미상의 여인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그나마 출구 가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들만이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한 여인는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어딜 보나 명백히 노예의 모습이었다. 자코모는 다급히 그녀들에게 말했다.


“괜찮니? 지금 도와줄 테니 조금만 참아다오.”

“도와준다니 누구를?”

대답은 여인들이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문지기는 몸을 돌려 세구지오를 바라봤다.

“노예는 제국법으로 명백히 금지되어 있는 사안이오. 헌데 이들은 대체!"

“그래서 우리를 잡아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당연한 말을! 그대들은 제국법을 어긴 범죄자니까!”

그는 분노한 음색으로 말했다.


다른 마차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노예가 있다고 확인된 이상 그들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나 다름 없었다.


자코모는 목에 걸고 있던 휘슬을 불었다. 짧게 두번, 길게  번 하늘 높이 소리가 울려퍼진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사용하는 신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 안쪽으로 경비대가 들이닥칠 것이고 리베치오 상단의 인간들을 모조리 체포할 것이었다.


자코모는 그렇게 자신하며 세구지오를 향해 말했다.


“이제 당신들의 악행도 끝이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단주 테르조 밀레니오까지 제국의 엄준한 심판대에 오르게 될 것이니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마시오.”

“내 충고 하나 하지.”

“뭐?”

“다음에 만났을 때 내 주인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될 거다.”

그 말에 자코모는 코웃음쳤다.

다음은 없을 것이었다. 노예를 사고 파는 행위를 한 자는 사형대에 오르거나 그에 준하는 처벌을 받게 된다.  좋게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불구가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을 논하다니 어찌 웃지 않을  있을까. 무어라 대꾸하려다 뒤에서 들려오는 무수한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알레스의 치안을 담당하는 자랑스러운 경비대가 규율 잡힌 모습으로 자코모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늙은 아버지 역시도.

“아버지?”


다리를 절며 나타난 늙은 아버지를 보며 자코모가 의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젊었을 적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던 아버지는 범죄자와 싸움에서 무릎을 다치고 문지기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문지기 일을 시작한 것 역시도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도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 아버지가왔단 말인가? 경비대와 함께  늙은 문지기는 병사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의문스러운 표정에 대답하지 않고 세구지오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젊은 문지기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나리, 죄송합니다. 지금 도착하실 줄 알았더라면 제가 나와 있었을 텐데…”

“됐다. 늦은 건 우리 쪽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저 자는 자네 아들인가?”

“그렇습니다. 혹여 저 아이가 나리께 실례를 저질렀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아직 문지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일에 대해 알려주지 못한  잘못입니다.”

“이번은 넘어 가지. 다음에는 없다는  기억하도록.”

“관대한 처사에 감사드립니다.”

머리를 땅에 박으며 늙은 문지기가 외쳤다.

세구지오는 무심한 얼굴로 자코모를 바라봤다. 그는 말문이 막힌듯 멍하니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있을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을 본 사람처럼 말이다.

세구지오는 그를 지나치며 성문을 통과했다. 경비대는 세구지오를 막지 않았다. 마차 행렬이 그의 뒤를 따랐다.

도시 안으로 향하는 리베치오 상단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늙은 문지기는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굳어 그 모습을 보던 아들은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열며 물었다.


“아버지, 이건 대체…”


“네게는 미안하구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온 아버지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나쳤다. 짧은 말이었으나 자코모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알레스를 통치하는 관리 역시 리베치오와 연결점이 있는 것이리라.


그것에 아버지가 대항할 수 있을리 없었다. 그는 늙었고, 가족이 있었으니까. 지키기 위해서 굴복한 것이리라.

검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코모의 눈에서 뜨거움이 흘러넘쳤다.


절뚝이며 멀어지는 아버지의 등이 무척이나 작고 여리게 느껴져서 더욱 그랬다.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벅벅 눈물을 닦아낸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절대로 굴복하지 않으리라고.

-


그 모든 것을 듣고 있었던 영진이 말했다.

“여기도 노예는 불법인가보군.”

“그건 어제도 말해준 거였잖아. 설마 내 이야기를 한귀로 듣고 흘린  아니지?”


약간 길고 뾰족한 귀가 까딱거렸다.


영진은 그것이 불만을 나타내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대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어쨌든 슬슬 탈출할 방법을 생각해야하는데…"


"나로서는 포기해줬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이릴은 투덜거리듯중얼거렸다.


당연히 노예로서 사는 건 싫을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에 벗어나고자 무모한 탈출을 시도하는 건 죽는 것보다 괴로운 길을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 하기 싫으면 말던가.”


“너도 안하는 거지?”

“아니. 난 탈출할 거야. 널 데리고.”


영진은 홀로 탈출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어제부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릴은 그녀를 한  바라보다 어쩔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하겠다는 거네.”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밧줄을 풀 방법도 없고, 또 우리가 여기서 당장 나가봤자 곧바로 잡혀들어올 뿐이야.”


“알아. 보아하니 이곳 놈들이 리베치오 놈들이랑 사익가 좋아보이던데.”


“리베치오 뒤에는 귀족이 있으니까.”


그녀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명망 있는 귀족들이 리베치오를 후원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마도 알레스를 영지로 삼고 있는 데르망 백작 역시도 그중 하나일 것이었다.


"우선도착할  까지는 얌전히 있어야해."


"그래야 놈들이 경계를  할테니까?"

"지금 사람들은 널 무척이나 경계하고 있을 거야. 네가 그런 무력을 보여줬으니까.”

숲에서 있었던 탈출 소동. 아마도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노예경매소에서 행할 탈출은 지금보다  배는 쉬웠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영진의 강함이 알려진 지금은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적어도 평소보다는 많은 병력들이 배치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지나간 얘기는 하지 말자고.”

“그래, 이젠 앞으로의 일을 얘기해야겠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릴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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