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3화입니다.
소란스러웠던 바깥이 어느 순간부터조용해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이릴은 모르지 않았기에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예상했던 대로 영진은 탈출에 실패한 게 분명했다. 소란이 길어졌던 걸 생각하면 꽤 선방한 것 같기는 했지만, 아마도 그 남자가 바로 나서지 않은 것이리라. 마지막에 땅을 울리는 소리가 난 걸 보면 최후에 나섰던 것이겠지.
부서진 문으로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어깨에 꽁꽁 묶인 영진을 짐짝처럼 들고서.
그녀를 들쳐매고 온 남자는 마차 안으로 아무렇게나 던져 내려놓은 뒤 부서진 문을 고치고 나갔다.
판자를 덧대 대충 막은 것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곳에는 영진처럼 탈출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남자가 나가고 다시 마차가 움직였다. 이릴은 판자 틈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보이는 영진을 바라봤다.
꽤 격렬한 싸움이었던 건지 새하얗던 원피스가 흙과 먼지로 얼룩저 있었다. 다행히 피는 흘릴 정도로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이릴은 마음이 아려왔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데도 그녀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물론 그랬으면 영진에게 먼저 두들겨 맞는 건 이릴이었겠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끄응… 으으...”
불편한 신음을 내뱉으며 영진이 몸을 뒤척였다. 아무래도 누운 자리가 불편한데다 묶여 있으니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이릴은 밧줄이라도 풀어주고 싶었지만 단단하게 묶여 있어 그녀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대신이라고 할지 이릴은 영진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표정이 한결 나아지는 것이 보여 이릴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된 게 좋은 거야.’
이미 한 번 실패를 맛봤으니 당분간은 탈출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영진은 운이 좋았다. 이렇게 소란스럽게 탈출을 시도했는데도 온몸이 묶이는 정도로 끝났으니. 이릴이 기억하기에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노예의 말로는 이것보다도 훨씬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릴은 영진이 또다시 탈출을 한다던가 하는 짓을 하지 않길 바랬다. 그녀에게는 안된 말이었으나 순순히 노예로서 체념하길 바랬다.
그 편이 영진에게도, 그것을 지켜볼 이릴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될 리 없겠지만.’
고작 한 번의 실패로 체념할 성격이었다면 처음부터 뛰쳐나가지도 않을 것이었다.
고작 짧은 시간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이지만 이릴은 영진이 충동적이고 저돌적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소망했다. 노예경매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가 깨어나지 않기를. 차라리 모든 것이 끝난 뒤에서야 의식을 찾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릴의 바람은 금방 깨졌다.
-
“씨발.”
의식을 되찾은 영진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머리통이 울려대는게 여간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려고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꿈틀거리고 나서야 자신의 몸이 밧줄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입에서 된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릴은 그 광경을 보며 쓰게 웃었다.
“깨어났구나.”
“이것 좀 풀어봐.”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이릴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영진은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꼼지락 거렸다.
“내 힘으로는 무리야. 할 수 있어도 풀어주지는 않았겠지만.”
“시비거는 거냐? 젠장, 더럽게 안풀리네.”
한참을 홀로 씨름하던 영진은 헉헉 거리며 늘어졌다.
정말로 피만 겨우 통할 정도로 꽉 묶어 놓은 탓에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저릿한 팔을 주무르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샘솟아 오를 정도였다.
영진은 도저히 안풀리는 밧줄을 공략하는 대신 이릴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 놈은 뭐야?”
“그 놈이라니?”
“눈깔에 흉터진 놈 말야!”
“아, 세구지오 말이구나.”
이릴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에게 졌구나.”
“젠장, 그 놈은 대체 뭐야? 팔을 움직이는 게 보이지도 않았다고.”
“세구지오는 지금은 멸망한 왕국의 기사였던 사람이야. 네가 상대하기에는 무리였겠지…”
“기사? 왕국? 또 뭔 소리야 그건?”
또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내뱉는 이릴의 모습에 영진이 중얼거렸다.
그가 아는 왕국은 동물의 왕국 뿐이었고 기사는 택시 기사나 버스 기사 뿐이었다.
“애초에 여기 한국이 맞기는 한 거냐?”
영진은 깨어났을 때부터 가졌던 의문을 내뱉었다.
마차 안에 있을 때는 긴가민가 했지만 바깥으로 나갔을 때는 확실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마차가 달리고 있던 곳은 숲이었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도로가 아니라.
그가 살고 있었던 곳에는 숲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런 건 도시를 벗어나 한참을 달려야 하는 장소에 있었다.
물론 도심 가운데에도 공원을 빙자한 숲이 있기야 했지만, 마차 바깥의 풍경은 그것과도 비교도 안될 정도로 울창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영진은 자신이 있는 곳이 적어도 살고 있던 도시는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한-국? 그런 나라의 이름은 처음 듣는데…”
“처음 듣는다고? 그럼 여기가 어딘데?”
“여긴 비젠이야. 대륙 동부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이고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데르망 백작령에위치한 도시 알레스지.”
“젠장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
그렇다고 외국일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비젠이니 알레스이니 하는 이름은 완전히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한국이 아니라는 건 확신할수 있었다. 적어도 그런 지명은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나는 이 녀석과 어떻게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문득 그런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곳이 해외라면 다른 사람과 이렇게 유창하게 회화를 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영진이 아는 외국어라고는 영어로 그마저도 하이 가 끝이였다.
하지만 외국인이 분명한 이릴과는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깨어났을 때부터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행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언어로 말하고 있는 거지? 한국어?”
“갑자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하게 공용어로 이야기 하고 있어.”
“공용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한국어는 아니네.”
영진은 자신이 내뱉는 언어가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평범하게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잘 들어보니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뭔가 꼬부랑거리는 듯한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 언어가 제 귀에는 한국어로 들려왔지만 말이다.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칼에 찔려 죽나 했더니 살아 있지를 않나, 살았다고 생각했더니 인신매매에 이제는 저가 살던 나라도 아니라고 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차라리 탈출에 성공했더라면 선택지가 늘어났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잡힌 상황이라면, 온몸이 묶여 있는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모른다. 이런 상황에 처해져 본 적도 없었고 생각을 한 적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애초에 누가 그런 것을 생각할까. 당장 오늘을 살기도 바쁜데 미래를 생각할 여유 따위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영진에게 해결되지 않는 상황은 없었다.
그나마 돈과 관련했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스트레스 정도야 양아치들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 감정을 해소한 뒤 차분해진 머리로 방법을 생각하고 해결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몸을 묶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가 된 적은 처음이었다.
발 끝부터 올라오는 무기력함에 영진은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이 느껴졌다.
속이차가워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숨이 거칠어지고 사고가 마비되어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영진?”
상태가 이상함을 느낀 이릴이 물어왔으나 대답할 수 없었다. 패닉에 빠진 영진이 대답할 수 있을리 없었다.
“윽, 으윽…”
억눌린 단말마를 내뱉는 영진의 얼굴은 창백했다.
패닉에 빠진 상황이 당혹스러웠으나 제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단시간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고 온몸을 헤집고 다녔다.
불안과 공포가 몸을 엄습했다. 평소의 영진이라면 상상하지 않을 최악의 상황들이 머리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가 뒤이어 덮치니 참을 수 없었다.
히스테릭한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누를 수 있었다. 그것마저도 전부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이따금 단말마 같은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이릴은 그 상태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생각에 빠진 영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있었지만, 맞닿은 신체에서부터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보이는 표정은 그녀 답지 않게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영진이 어떤 생각을 하고 결론에 도달한 건지, 아니면 도달하지 못한 것인지는 몰랐으나 이릴은 자신이 해야할 일이 뭔지 알았다.
패닉에 빠져 있던 영진의 머리 위로 손이 올려진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머릿결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쉬이… 괜찮아…”
차분하지만 다정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그것을 반복했다. 영진의 떨림이 멈출 때 까지.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던 영진이었으나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을 안심시키려 한다는 것도 말이다.
자신을 안심시켜주려고 하는사람이 있다. 신기하게도 그것을 자각하자 몸의 떨림이 서서히 멈췄다. 머리속을 지배하던 공황 역시도 말끔하게 사라져갔다.
영진은 짧게 숨을 토해냈다. 그것으로 떨림은 완전히 멈췄다.
하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여전했다.
“...뭐하는 짓이야?”
그리고 이곳에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반사적으로 까칠한 말이나왔으나 이릴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게는 동생이 있어. 나이는 아마 너와 비슷할 거야.”
“별로 궁금하지 않으니까 머리에서 손이나 떼.”
“그 애는 어릴 때부터 번개를 무서워해서 항상 번개를 치던 날이면 내게 와서 안겼지. 혼자 자기는 무서우니까.”
“무시하는 거냐?”
영진은 짜증을 냈지만 이릴은 꿋꿋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 때마다 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어. ‘괜찮아. 번개가 널 다치게 두지 않을 거야. 내가 지켜줄게’.”
“그래, 우애 좋은 이야기네.”
영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형제는 고사하고 가족이라 부를 것조차 없었기 때문에 가족애라는 걸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릴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건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느닷없이 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동생 얘기를 시작했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것을 이릴은 미약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영진의 사정과는 다른 이야기였으나 마물의 생리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물은 마왕이 남긴 저주에서 태어나는 존재. 부모도 형제도 없으니 위험에서 몸을 지킬 수 없을 때 닥쳐오는 불안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었다.
믿을 것은 오직 본신의 힘 뿐. 그러니 그것이 무력화 된 다음 찾아오는 감정에 대해서 대처할 방법을 알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릴은 말했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
“불안해 한다고? 내가?”
말도 안되는 소리. 그렇게 대답하고자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벌벌 떨고 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것을 보며 이릴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완전히 쐐기를 박기 위해서.
“분명 혼란스럽겠지. 원래 살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이렇게 노예가 되어버렸으니까. 불안해 하는 건 당연한 거야. 누구나 마찬가지로.”
“...”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내가 널 도와줄게. 네가 더 이상 혼란스러워 하지 않게 해줄게.”
“왜 그렇게 까지 하려는 건데?”
조금은 격정적으로 말하는이릴의 모습에 영진이 되물었다.
“피차 오늘 처음 만난 사이 아닌가?”
“네가 의식을 잃고 감옥에 있었을 적부터 알았지만, 의식을 되찾고 대화를 해본 건 오늘이 처음이야.”
“그래, 니가 날 좀 더 일찍 알았다고 치자. 결국 남인데 왜 그렇게 나를 도우려고 하는 거냐?”
생각해보면 이릴은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영진에게 친절했다. 묻는 말에 모두 대답을 해줬고 자신이 험악한 말을 내뱉어도 도리어 사과할 뿐 기분이 나쁘다는 기색조차 내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이릴이라는 인간을 판단하기에는 같이 있었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그녀가 자신에게 무한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런 의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자 이릴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내 동생이 떠올라서.”
“또 그놈의 동생이냐?”
영진은 질린다는 듯 말했으나 이릴은 계속해서 말했다.
“난 빚을 대신해서 노예가 됐어. 어떤 이유로 부모님은 아주 큰 돈이 필요했고, 리베치오에게 돈을 빌렸지. 무척이나 큰 돈이었지만 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어.”
“시간이 부족했군.”
“턱없이 부족했지. 납기일이 되었지만 수중의 돈은 원금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었고 결국 우리는 아주 끔찍한 수준의 이자를 감당하게 됐어. 하루마다 불어나는 이자는 금새 원금을 뛰어넘을 정도로 살인적이었지.”
영진은 그 말에 이따금 동네에서 어슬렁 거리던 사채업자들을 떠올렸다.
다행히 사채에 손을 대면 정말로 나락까지 떨어질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다.
“잘도 그런 돈을 빌렸구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쨌든 우리는 끝없이 늘어나는 이자에 허덕이고 있었어. 이대로 가다가는 일가족 전부가 빚 때문에 노예가 될 지도 몰랐지. 바로 그때였어. 리베치오가 부모님께 제안을 한 건.”
“제안?”
“나와 동생 중 한 명을 상단으로 넘긴다면 여태까지 발생한 이자와 앞으로 발생할 이자를 면하게 해준다는 제안이었지.”
“그래, 뒤는 안들어봐도 되겠네.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니까 말이지.”
“내가 간다고 했어.”
“멍청한 결정이었네.”
“괜찮아. 어차피 부모님은 처음부터 날 고를 셈이었을 거야. 동생은 친자식이었고 나는 아버지의 외도로 태어난 사생아였으니까.”
낭만을 쫓던 젊은 남자와 그런 남자를 사랑한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이릴은 어머니가 종종 내뱉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나도 동생이 그런 꼴이 되기를 원치 않았어. 그 애는 어렸고, 겁이 많은 아이였거든.”
“그래서 날 보고 그런 동생이 떠오른다?”
“그래.”
“미친년.”
영진은 그렇게 말했다.
암만 이야기를 들어봐도 이릴의 동생과 자신의 연관성은 전혀라고 할 정도로 없었다. 아니 오히려 180도 정반대였다. 자신은 어리지도 않았고 겁이 많지도 않았다. 오히려 겁대가리 상실한 새끼란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을 정도였다.
“동생은 남자냐?”
“아주 예쁜 여자애였어.”
“내가 봤을 땐 둘 중 하나야. 네 눈이 삐었거나 아니면 네가 돌아버렸거나.”
아니면 둘 다 거나. 영진은 맨 마지막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덩치 큰 남성을 보고 여동생을 떠올리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영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릴이 웃으면 말했다.
“사실 내 동생이지만 너보다는 예쁘다고 할 수 없을 거야."
"뭐?"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영진의 표정이 괴상해졌으나 이릴은 계속해서 말했다.
"보석 같은 자주색 눈이나 설원을 떠올리게 하는 머리카락…"
장황한 묘사를 담은 말이 시작되었지만 영진의 귀에는 처음 이릴이 내뱉은 말이 계속 맴돌았다.
'동생보다 예쁘다고? 내가?'
이릴은 자신의 동생이 여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을 비웃으려고 내뱉은 말이거나 아니면…
"...그리고 또-"
"잠깐, 궁금한 게 있는데."
영진은 황급히 이릴의 말을 끊었다. 입을 열자 제 귀에 들리는 높은 톤의 목소리가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어째서 이걸 이제야 알아차린 건지. 영진은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이지?"
“어떻게 보인다니?”
“내가 남자와 여자 중 어느 쪽인 것 같냐는 거야.”
“어느 쪽이냐니.”
이릴은 이상한 걸 물어본다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당연히 여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