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102화. 용암
< -- 116. 용암 -- >
온 몸이 뜨거웠다.
마치 불판에 올려진 고기마냥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랄까?
눈을 번뜩 떴다.
"으아아악!!!"
눈을 뜨니 용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몸이 녹아내리지 않은 이유는 내 몸이 검은색의 딱딱한 돌덩이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 돌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황천길을 건너갔을 것이다.
용암에서 뿜여져나오는 엄청난 열기에 이마에 식은땀이 미친듯이 흘러내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썹에 송글송글 맺히면서 시야를 덮어버렸다. 손으로 눈가를 비비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하늘이 온통 붉었고, 온 땅이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다. 군데군데에는 내 목숨을 살려준 돌덩이들이 놓여져 있었고, 앞에는 거대한 화산이 자리해 있었다. 화산의 분화구에서는 쉴 새 없이 용암과 가스가 흘러나왔다.
"...... 뭐냐?"
다급한 마음에 일단 검 부터 뽑고자 했다. 이번에도 뽑혀지지를 않았다.
초조함에 검을 돌덩이에 마구 두들겨댔다.
"뽑히라고! 뽑히라고!! 뽑혀!!!!"
쩌저저적ㅡ
불길한 소리. 돌덩이에서 금이 가고 있었다. 뛰어오르면 갈 수 있는, 맞은 편의 돌덩이를 쳐다봤다.
힘차게 뛰어올랐고, 무사히 그 돌덩이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가 서 있던 곳의 돌덩이는, 두 쪽으로 쩌적하고 갈라지더니 용암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허리에 혁대를 다시 차고서는, 생각에 들어갔다. 생각이고 나발이고 온 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나가기도 전에 열기에 의해서 숨 막혀 질식사 할 예정이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아내들과 늙어 죽을때까지 살고 싶었다. 더군다나 아내들을 임신시켜주지도 못했는데, 나와 그녀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도 보지 못하였는데 이런 곳에서 뒤질 수는 없었다.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살아야만 되는 이유가 있어 눈물을 흘릴 사치스러운 시간이 내게는 없었다.
돌덩이들을 살펴봤다. 한참가량을 뜷어지게 쳐다본 결과, 돌덩이들은 징검다리마냥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졌는데 아마도 화산으로 향하는 다리인 것 같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쉰 뒤, 맞은 편 돌덩이로 몸을 날렸다. 안착한 뒤에는 다시 숨을 고르고서는, 크게 몸을 날렸다. 그것을 반복하고 반복했다. 점점 화산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무심코 발을 헛디뎌 용암에 신발이 닿았다.
"으아아악!! 씨발!!!"
황급히 발을 빼내고서는, 불이 붙은 신발을 벗어 용암에 던져버렸다. 던져버린 신발은 용암의 표면에서 잠시동안 머물러 있다가 서서히 빠져들어갔다.
대장간에서 보았던 쇳물과는 다른, 밀가루 반죽같은 용암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쇳물같은 같은 액체였다면 그대로 신발과 함께 발바닥 피부까지 녹아내렸을 것이다.
신발을 잃게 된 왼발. 왼발에서 바닥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아까처럼 실수로 발을 헛디디게 되는 그 순간 발바닥의 피부가 타버릴 것이다. 한층 더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돌덩이를 넘어갔다.
어찌저찌해서 겨우겨우 화산에 당도했다.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용암 줄기 속에서 한 군데만이 유일하게 내가 걸어갈 수 있어보였다. 그 길을 따라 올랐다.
점점 가파라지면서 몸이 덜덜덜 떨려왔다. 뒤를 쳐다보니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경치를 확인해보니 이 화산과 똑같은 봉우리들이 군데군데 솟아나있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매혹적인 여성의 까만 눈동자와 몸에 새겨진 문신들이 생각났다. 그 씨발 년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기필코 죽여버릴 것이다.
발가락이 아파왔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가락 끝으로 지탱해나가며 올라가서인지 고통이 상당했다. 근처에 우두커니 박혀진 돌덩이에 올라 앉아 휴식을 취했다.
발가락을 주무르면서 다시 한 번 경치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임이 틀림없다.
"하아... 씨발, 여기서 어떻게 나가냐?"
"어쩌면 환각일지도"
볼을 꼬집었다.
"죽으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도 몰라"
까마득한 절벽을 내려다봤다. 만약에 아니라면 그냥 개죽음이기 때문에 그만뒀다. 결국 답은 계속 올라가거나 올라가는 중간에 발견되는 출구가 있기를 바라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마음을 다 잡고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내 등을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그것도 압도적인 힘으로 끌어 당겨지고 있었다.
"뭐,뭐야?!!!!!!!!!!"
그 힘이 나를 분화구를 향해 끌고 올라갔다. 등 뒤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화산재와 검은 흙 밖에 안 보였다. 일단 끌려가지 않기 위해 검을 흙에 꽂아넣었지만 역부족이었고, 실수로 검 손잡이를 손에서 놓치게 되었다.
맞춤주문 제작한 검이 산비탈을 굴러 용암으로 빨려들어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안돼에에에!!!!!!"
"씨발!!!!!!!!!"
검과의 추억. 큰 맘 먹고 내 체격에 맞춰 주문제작해서 만든 내 검. 그 검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수 많은 사선과 수 많은 괴물들의 피를 뒤집어쓰는 나날들을 함께 치뤘다. 그런 검이 이 좆같은 곳에서 허망하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그 검은 내 노총각 시절에 오른 손과도 같은 동반자이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거침없이 분화구 쪽으로 끌려갔다. 손톱으로 흙을 긁어대면서 끌려가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손톱이 부서지면서 생긴 고통만 가중 될 뿐이었다.
후우웅ㅡ
압도적인 힘이 사라짐과 동시에 몸이 허공을 붕 떴다. 무슨 일인가 했다. 내 몸이 분화구 한 가운데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릴리, 루나, 랄라, 델타, 라우라 그녀들을 냅두고 여기서 죽으ㅡ)
뜨거움이 온 몸을 뒤덮었다.
< -- 117. 타나펠 -- >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온 몸을 뒤덮었던 뜨거움이 별안간 차가움으로 물들여져 갔다.
어쩌면 죽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차가움이 곧 내 몸이 죽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화르르륵ㅡ!
감은 눈꺼풀 너머에서 강렬한 눈부심이 비춰졌다. 차가워졌던 몸도 다시 온기를 되찾더니 이내 활력이 샘솟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눈을 떴다.
후드를 뒤집어 쓴 머리 위로, 엄청난 크기의 검은색 손이 붕붕 떠있는 거인이 내 눈 앞에 서있었다. 거인의 턱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고, 눈에는 그 자신이 내뿜는 선홍색의 불꽃과는 다르게 검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대... 대천사?!)
날개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날개가 뜯겨져 나가 있었는데 아주 흉한 몰골이었다.
목이 타들어갔다. 여기서 대천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지구에서 온 고군대]
대천사가 내 본명을 말했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그의 활활 타오르고 있는 로브자락만 쳐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그 말 한 마디에 내 수그린 고개가 빳빳하게 치켜올려졌다.
내 눈이 그의 눈빛과 마주보게 되었다. 검은 불꽃으로 일렁이는 두 눈.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온 몸을 지배해온다.
[안심해라, 나는 너를 죽이지 않는다]
"...... 누,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일단 뭐라도 말을 해서 이 상황을 파악해보고저 했다. 애초에 대천사들은 내 머리 속을 읽을 수 있다.
[힘의 권좌에 앉아있었던 대천사라 하면 알아듣겠나?]
"타,타... 나.......... 페,펠?"
창자가 꼬여들어갔다. 긴장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왜 갑자기 여기서 타나펠이 나온단 말인가? 그는 벌써 죽었을텐데, 왜 여기 내 눈 앞에 서 있단 말인가?!
[바이벨에서는 내가 죽은 걸로 기록되어 있을테지]
"......."
[안 그런가, 고.레오?]
[사람이 말을 했으면 대답을 해야지.. 분명 유하연한테 그렇게 말했었지?]
"죄,죄송합니다! 갑작스러워서 그만..."
고개를 숙이려 했으나 숙여지지가 않았다. 내 몸인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조금만 기다려봐. 금방 움직이게 해줄테니깐]
[대화를 나누려면 일단 대화를 나눌 공간이 필요하니...]
타나펠 님이 손을 스윽 하고 흝어내렸다. 어두컴컴했던 공간이 일순 햇빛이 일렁이는 정원으로 바뀌어졌다. 그와 동시에 내 몸도 움직여졌다.
저벅저벅저벅
발걸음의 근원지를 쳐다봤다. 인간의 체구로 변신한 타나펠 님이 정원 한가운데에 놓여진 정자를 향해 걸어가고 있음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한참을 걷던 도중, 그가 내게 등을 보인채로 말을 건네왔다.
[너가 소환된지 올해로 몇 년째지?]
정원을 걸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져왔다. 그 탓에 어느정도 진정이 가라앉아 차분하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3년 됐습니다]
[3년이라... 꽤 됐군]
[그래, 이 세계는 지구와 비교해봤을 때 지낼만 한가?]
지구라.. 편의성 면에서는 지구가 압도적이었지만 이세계에는 나의 가족들이 있었다. 아내들과 나중에 태어날 내 아이들. 그 존재들만으로도 나는 지구보다 여기 이세계가 더 좋다.
[너는 가족이라는 존재를 소중히 생각하는군]
[수 년을 가족 없이 홀로 지내온 탓에 그런건가?]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내가 무엇보다 가족이라는 존재를 소중히 생각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를 여의고나서부터이다. 가족도 친척도 없이 지구라는 거대한 행성에 홀로 남겨진 기분은 고독 그 자체였다.
[그래... 고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지]
[더군다나 있어왔던 것이 어느날 갑자기 없어지면서 생겨난 소외감은 나도 잘 이해하는바야]
"타나펠 님도 누군가를 잃으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많지... 많았어... 콕 집어서 한 명 말해보자면 이퀼리브리오를 들 수 있지]
"이퀼리브리오 님 말씀이십니까?"
타나펠 님의 목소리는 뭔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자와 오랜 친우였다. 같이 이 세상에 창조됐고, 서로 생명체 창조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곤 했었지]
[하지만 그 친우는 이제 존재하지 않지]
이퀼리브리오는 소멸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소멸되기 직전 권능을 물려받았다.
[그에게서 세 개의 권능을 물려받았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면서 말하는 타나펠 님께 답해드렸다.
"맞습니다. 첫 번째는ㅡ"
[말할 필요 없어,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깐]
손사레를 치면서 그는 다시 앞을 본 채로 걸어갔다. 다시 그의 물음이 날라왔다.
[어때, 쓸 만한 권능이던가?]
"처음에는 그저 그랬는데, 쓰다보니깐 꽤나 유용했습니다"
"만약 이 권능이 없었더라면 저는 지금까지 살아있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럴테지, 자네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21세기를 살았었으니깐 말야]
[그 시대에 비교해볼 때 우리 세계는 너무 혹독하지 않은가?]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이 상황이 매우 편안했다. 어쩐지 모르게 집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까지 느껴져왔다.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다보니 큰 저수지가 나타났다. 저수지 한 가운데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었고, 그 정자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그 하나밖에 없는 길을 나는 타나펠 님의 뒤를 쫓아가며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저수지에 가득 찬 물을 들여다보았다. 티끌 하나없이 맑았다. 저수지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깨끗했고, 내 얼굴이 마치 거울에 반사된 것 마냥 맑고 순수했다. 점점 시선이 물에 빠져들어갔다.
그러다가 점차 물이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내 모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내 모습 주변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형상이 보여졌다.
그 사람들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내 어깨를 붙잡으며 달라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바닥에 무릎끓고서는, 두 손을 목에 갖다댔다. 숨이..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끄어어어ㅡ 끄어어어ㅡ"
흐릿해져가는 눈동자가 물 속에 비춰진 내 눈과 맞닿았다. 내 눈이 검게 물들어져가고 있었다. 내 모습이, 내 눈이, 내게 달라붙어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서웠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배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더니 위로 올라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