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그녀들 - 아르베 회당(2)
( -- 루나 -- )
"모두 정숙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르베 교단의 수녀님이 가운데 연단에 들어선 후 중급반 여성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수다를 떨어대던 여성들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나 또한 릴리언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멈추고서는 수녀님에게 집중했다.
"오늘도 이렇게 대천사 아르베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신 자매님들께 진실한 사랑과 행복이 찾아오기를"
(진실한 사랑과 행복이라...)
어릴 때, 엄... 그 여자가 나를 버린 그 순간부터 수녀님의 저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나는 매주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필기까지 해가면서 아르베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라왔다. 이러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 여자가 아빠와 내 곁으로 돌아와 다시 행복한 나날로 돌아갈 거라고.
(아니지, 그 여자는 우리들이랑 살면서 단 한번도 웃지 않았었지 참)
어린 나는 엄마의 미소 한 번 받고 싶어서 갖은 방법을 써가면서 그녀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 쓰레기 같은 년은 절대로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슬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해도 꾹 참고 항상 그녀 앞에서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언젠간 내게 미소를 지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가 우리들 곁을 떠나면서 내 연기도 끝이 났다. 아빠는 자신을 자책하며 내게 미안해했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런 아빠를 외면한 채 마음을 굳게 닫아걸었다. 말하기도 싫었고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친구들은 하나 둘 나를 떠나갔고,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오빠를 만났다. 꾀죄죄한 몰골에 험악한 말투인 오빠를 처음에는 무서워했었다. 여관을 소개시켜달라고 물어왔을 때에는 그냥 무시할까도 생각했지만, 장사가 안돼 내게 죄인처럼 행동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우리 여관을 말해주었다. 안내까지 해주었다.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방문을 여니 오빠가 잠꼬대를 하면서 잠들어 있었다. '마야'라는 여자의 이름을 불러대며 눈물을 흘려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내 모습과 겹쳐보여지면서 동정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오빠는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답을 요구해왔다. 도대체 어디서 살다왔길래 이런 일반적인 것까지 모르는거지 하고 의문이 들었지만 누군가가, 그것도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지는 남성이 날 필요로 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내가 또래애들한테서 엄마 없는 년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할 때마다, 넓은 등으로 날 지켜주었다. 아빠에게도 사근사근하게 잘 대해주고, 망해가는 우리 여관을 살리기 위해 손수 발 벗고 나서주기까지 했다. 그럴때마다 점점 오빠의 대해 부정적인 마음이 생겨났다.
우리 가족을 거지새끼로 여겨 불쌍한 마음에 도와주는거라고.
단기간만에 모험단 내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재능많은 남자가 왜 별 볼일 없는 우리 가족을 도와주는거지? 이런 생각이 쌓이고 쌓여 결국 폭발해서는, 오빠에게 따져 물었다.
[아저씨, 왜 저희 가족한테 이렇게 잘 대해주는 거에요?]
[응?... 그야 내가 여기서 지내고 있으니깐 그런거지]
[그리고 난 여기가 좋거든, 망해버리면 갈 곳도 없다고]
[거짓말... 나랑 아빠를 거지새끼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등신새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오빠가 먹고 있는 접시 위에다 돈 주머니를 던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오빠는 내 이런 무례한 짓에 대해 일절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그게 무슨 소리야?!]
[난 절대로ㅡ 절대로 그런 적 없어! 믿어주라, 루나야!]
[거지새끼들한테 적선하니깐 좋아? 막 자기가 뭐 되는 줄 아나본데 어림도 없다고!]
[이 돈 필요없어! 이거 가지고 가서 다른데서 자거나 하라고!!]
[옆에 우리 여관보다 더 좋은 여관 있잖아? 거기 가서 자면 되겠네!!]
[모험가 주제에... 집도 가족도 없는 주제에!!]
오빠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돈주머니를 들고는 여관을 나갔다. 그 모습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이내 몸을 무너뜨리고서는, 대성통곡을 해댔다. 시장보고 온 아빠가 화들짝 놀라서 달래주었다.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속으로 오빠한테 잘못했다고 미안했다고 용서를 빌어댔다.
이틀동안 오빠는 여관에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그 이틀간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리고 삼일 째 되는 날 저녁, 오빠가 자기 조합의 친한 모험가들을 데리고 와서는 크게 한 턱 쏘겠다고 외쳐댔다.
오빠의 등장에 반갑기도 하면서 부끄럽기도 했고, 이 상황에 대해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으면서 따져물었다.
[아저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루나야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묻는 말에나 답하세요]
[... 일단 나가서 얘기할까?]
술판을 벌이고 있는 모험가들을 뒤로 한채 오빠를 따라 여관 밖으로 나갔다.
[이제 답해주시죠]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야, 루나 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납득이 가더라고]
[아는 수녀님인 크레아고 교단의 조라 수녀님이라고 있거든?]
[그 수녀님한테 물어보니깐 내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미안]
[........]
[유리창관에서 일하는 조이라는 여자가 조언해줬는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ㅡ]
[유리창관?]
[오빠, 그런데 가요?]
갑자기 열이 확 뻗쳤다. 남은 마음고생하고 있는마당에 자기는 그런 저속한 데를 갖다오다니... 거침없이 내쏘아주니 오빠는 세상잃은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서있었다.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갈때 자위하고 있었던 오빠의 표정, 그리고 나를 쳐다볼때의 표정, 그 표정이 지금 그 표정과 흡사했다.
[도대체 그런 데를 왜 가는거에요?!!]
[그런데를 가니깐 이날이때까지 결혼을 못하시는 거라구요!!]
매음굴에 사는 그 더러운 년들이 오빠 옆의 찰싹 달라붙어 알랑방귀를 뀌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속이 뒤집혀졌다. 한참가량을 내쏘다가 문득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너무 꺾어놓은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들었다. 오빠를 바라보니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 한 마리가 거기 서있었다.
[...... 제가 말이 너무 심했네요]
[그래도 악의로 그런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걱정돼서]
[고맙다, 루나야]
[역시 나 걱정해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아저씨... 저한테 화 안내요?]
[그... 저번에 욕하고 그런거.......]
[딱히 화 낼 이유가 없지 않나?]
[아까도 말했잖아, 나도 잘못한게 있다고]
[그러니 없던 일로 치자고]
[... 저 사람들은ㅡ]
[네가 준 돈 있잖아, 생각해보니 그렇게 주는 것보다는 이 방법이 훨씬 더 나을것 같아서 말이지, 여기 돈]
오빠는 내 손에 강제로 돈주머니를 쥐여주고서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루나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갑자기 여관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고.레오 이 개새끼 어디갔어?! 설마 도망친건가?!!]
[개씨발새끼!! 그런거면 내 손에 뒤졌다!!]
오빠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좆같은 새끼들, 하여튼간 믿음이 없어요]
[고.레오 이 좆같은 새끼, 지금 우리들 욕하는 것 같은데?!!!]
[지금 귀 존나 근질근질한데?!!]
[씨발놈들, 감은 뒤지게 좋아가주고]
한숨을 크게 푹 쉬며 여관으로 들어가는 오빠의 등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그날부터 오빠에 대한 연정을 품어왔다. 오빠에게 보답할 방법은, 내가 오빠의 아내가 되어 가족을 만들어주고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집이 되겠다고. 물론 내 사심이 한 90% 정도 되지만 말이다.
"루나야, 무슨 생각하길래 그렇게 멍때리고 있어?"
옆에서 랄라 언니의 물음에 생각을 멈추고나서 아무것도 아니라며 답해줬다. 연단에서는 수녀님이 결혼의 책임에 대해서 얘기해주고 있었다. 지금은 수녀님의 앞서 말했던 말을 믿는다.
나는 오빠.. 남편 고.레오를 평생 사랑할 것이다. 오빠의 아내가 되어 오빠를 평생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예전에는 아빠가 내게는 세상의 전부였다. 이제 고.레오가 내 삶의 전부다.
( -- 릴리 -- )
"결혼이란 신성한 것이며 대천사 아르베 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 있어 시작점과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독학으로 공부만 해왔는지라 수녀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혼자 끙끙 앓고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이제는 그런 일들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흥분됐다.
"수녀님, 여쭤볼게 있습니다"
앳되보이는 소녀가 손을 들고 발언을 요청했다. 수녀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발언할것을 허락해주었다.
"수녀님께서는 결혼을 하는 것이 시작점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순결을 지키는 것이 시작점이 아닌가요?"
"만약에 아니라면 저희들이 지금까지 지키고 행해왔던 모든 것들이 대천사 아르베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아닌가요?"
소녀는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찬 표정을 지으며 항의했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같이 억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수녀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었다.
"대천사 아르베님의 행적을 쫓으며 순결을 지키는 것은 가르침을 받기 전 몸을 정갈하기 위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 또한 이와 마찬가지죠"
"순결한 몸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난 뒤, 비로소 대천사 아르베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매님께서 지금까지 지키고 행해왔던 그 모든 것들은 전부 아르베 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그,그런건가요?"
"후후후, 그런거랍니다"
"충분한 대답이 되셨는지요?"
"예... 감사합니다, 수녀님"
볼이 빨그레해진 소녀는 자리에 얌전히 앉았고, 수녀님은 끓겼던 내용을 이어서 말했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 부부의 탄생입니다. 정을 나누면서 아이를 잉태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 가정의 탄생입니다"
"부부는 아르베님이 강조하신 진실된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행위이며, 가정이란 아르베님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는 길입니다"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으며 진정한 사랑은 아이의 탄생으로 인해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언제 완성되는 것인가?"
이 대목이 중요하다.
"사랑의 끝은 없습니다"
"사랑은 매일매일 차곡차곡 벽돌처럼 쌓여가며 더욱 견고해집니다, 하지만 정해진 층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쌓여가는 것입니다"
"자매님들께서 아르베 님을 가르침을 계속 배워나가고 있듯이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편에 앉아있던 소녀가 물어왔다.
"벽돌이 무너질수도 있지 않나요?"
"벽돌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거죠?"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대천사님들이 세우신 방벽도 무너지는데, 벽돌이라고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방벽은 오랜시간을 무너졌다 쌓여졌다를 반복해왔습니다, 벽돌도 이와 마찬가지죠. 사랑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속할 수는 있습니다"
좋은 말이다. 가지고 온 종이에 받아적어야겠다. 물어온 소녀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어서 말했다.
"저희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늘 싸우세요"
"사랑이 없는데 지속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거죠?"
"사랑이 없다라... 분명 자매님의 부모님들께서도 사랑이 있었기에 부부의 연을 맺었고, 사랑이 있었기에 자매님을 낳으신 것이겠죠"
"하지만 지금은 사랑이 없다라... 앞서 제가 말했다시피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말했었죠?"
"예, 그치만 부모님을 보고 있으면 사랑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으실거라 생각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자매님의 부모님은 서로 사랑을 했던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이 존재하는 한 사랑은 지속될 것입니다, 죽을때까지 말입니다"
"지금은 벽돌이 무너져가고 있는 단계입니다,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이 석회역할을 하면서 벽돌을 다시 쌓여가게끔 할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결혼은 아르베 님의 주관하에 이루어지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의식입니다"
"사랑을 불신하고, 사랑을 배신한 자는 아르베 님의 천벌이 내려집니다"
"자매님의 부모님도 이를 아실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실테고, 다시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맘이 편해졌어요"
"자매님의 마음이 편해졌다니 저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수녀님은 강의를 계속했고, 그때마다 소녀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사실 수녀님의 강의보다 소녀들이 하는 질문에, 수녀님이 답해주시는 말들이 더 값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나중에 그 종이, 나한테도 보여줄 수 있어?"
"물론이지, 말만 해"
"역시 언니야! 고마워!"
"내가 밤에 안마 많이 해줄게!"
(안마?)
저번에 그녀가 안마라면서 내 가슴을 마구 만져댔던 일들이 떠올랐다.
"가슴은 안만질거지?"
"....... 당연하지!"
못미덥긴하지만 귀여운 여동생이 하는 말이니 믿을 수밖에.
( -- 루나 -- )
수녀님의 강의가 끝난 뒤, 고민 상담의 자리가 마련됐다. 이 자리는 연단에서 소녀, 여성들이 자신들의 질문을 말한 후 주변의 있는 여인들에게 의견과 조언을 구하는 자리이다.
첫 번째로 나온 사람은 눈 밑이 거무스름한 여성이었다. 같은 여자가 봤을때도 꽤 귀여운 얼굴을 한 여성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비네' 옷가게 주인의 딸인 '메리체'라고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다름아닌 남자문제에 관해서 조언을 구하고자 나왔습니다"
남자문제라고 하니 주변이 술렁거렸다, 남의 연애문제만큼 재미난 것도 없다.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남자를 만나게 된 계기는, 그 남자가 옷을 사러오게 되었을 때입니다"
"저는 그 남자에게 한 눈에 반했고, 그 남자 또한 저에게 한 눈에 반한 눈치였습니다"
"그 남자는 매일매일 저희 가게를 들르면서 물건을 사갔습니다, 주로 양말이었죠"
(이 년이 지금 자기 자랑할려고 나온건가?)
아니꼬왔지만 더 들어보기로 했다. 난 어차피 결혼할 남자가 있으니 상관없다.
"그렇게 저희들은 연인관계가 됐습니다"
"저는 그 남자를 만날때마다 기대를 품었습니다"
"언제 제게 청혼을 해올지... 하지만 그 남자는 계속 제 눈치만 보며 결혼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더군요, 그렇게 눈치를 줬건만"
(혹시 유부남인건가?)
주변의 있던 여자들도 나와 생각이 일치했는지 웅성웅성거렸다. 수녀님의 '엄숙해주십시오'라는 말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렇게 점점 울분이 쌓여갔고, 그러던 어느날 창문에서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그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린 채 창틀에 매달려 있더군요"
(제국에서 유행하는 구혼의식인가보네? 부럽다...)
(오빠한테 한 번 부탁해볼까? 그치만 위험하기도 하고... 그래도 받아보고는 싶고.. 한 번 뿐인 구혼의식이니깐...)
하지만 내 고집으로 오빠에게 그런 위험한 짓을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다. 그깟것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빠하고 결혼한다는게 중요한거지.
(아니 근데 잠깐.. 저 여자는 왜 여기 중급반에 있는거지?)
말을 하던 여성의 목소리에서는 떨림이 전해졌다. 이 부분부터 중요한 대목인가보다.
"처음에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제국에서 유행하는 구혼의식을 내가 받게 되는 날이 오다니 하고..."
"그 남자는 제 방에 넘어와서는, 무릎을 끓고 반지함을 열어 보였습니다, 안에는 동으로 된 불품없는 반지가 있더군요"
(불품없는 반지라고? 저년이 돌았나?)
"화가 나서 그만 그가 들고있던 반지함을 내팽겨쳤습니다"
그 말의 주변의 있던 여자들이, 옆에 있던 자신의 친구들에게 귓속말을 하는 횟수가 증가했다. 확실히 그녀의 이번 말은 좀 충격이었다. 미친년인가?
"그한테 막 따졌습니다, 이딴걸 들고 청혼하러 온거냐고, 내가 사람을 봐도 한참을 잘못봤다고"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저 미친 년이 뭐라 지껄인건지 이해가 안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인식한 것인지 그녀는 재빠르게 변명을 토해냈다.
"여러분도 화나지 않나요? 한 번뿐인 구혼의식인데 그런 싸구려 반지를 들고 오는게?"
"나사빠진 년아! 네가 무슨 귀족년이라도 되냐?!"
"촌년주제에 바랄걸 바래야지!!"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여성이 대뜸 일어나서는 그녀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수녀님이 말리자 그제서야 자리에 앉아서는 입을 다물고, 씩씩댔다. 보통의 남성들이 구혼할 때 반지는 동반지가 보통이다. 결혼한 후 나중에 되어서야 은반지나 금반지를 끼워준다. 재료에 상관없이 반지 그 자체만으로도 가격이 상당했다.
엄... 그 여자도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아직도 금반지를 끼고있다면 그 낀 손가락을 분질러버려서 금반지를 가져가버릴 것이다. 창년!
또 다른 곳의 앉아있던 여성이 그녀에게 물어왔다.
"그래서 그 남성 분하고는 어떻게 됐는데요?"
"예?... 아아...... 그는... 저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더군요, 대금을 아직 못받아서 이것밖에 못준다면서, 대금만 받으면 바로 금반지를 끼워주겠다고"
"여기 있다는 소리는 그 남성분과의 결혼이 파토났다는 것이겠군요"
"예... 제가 그의... 구혼을 거절했습니다"
"당신과의 결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자매님은 그 남성 분에 대해서 얼마나 아셨는지요?"
"그 남성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아시고 계셨나요?"
"어... 무슨 수선공이라고 한것 같았는데... 아마도 옷?"
"...... 자매님은 아직 결혼을 하기에는 이르신 것 같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 남성 분께서 자매님과 결혼을 안 한 것에 대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죠?"
그녀는 도끼눈을 뜬채 여성을 노려봤다.
"여성은 결혼을 하고 난 뒤, 남편을 보조하며 재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만?"
"...... 남편이 될 남성 분의 직업도 정확히 모르시는 자매님이, 한 가정의 재산을 책임지고 관리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안 될것도 없죠"
"........... 그 남성 분하고는 현재 어떻게 되셨나요?"
"그 일이 있은 직후 저와 헤어지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대금을 받았냐고 물어보니깐 무시해 버리더라구요"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평생 같이 살아갈 사람한테 그 정도도 못해주나요?"
"자매님의 사랑에 대한 관념, 잘 봤습니다"
"더 이상 자매님과 말할 가치도 없군요!"
"뭐라구요!"
"내가 살다살다 저런 개 또라이같은년은 처음보네!!"
"정신 나간 년아! 개소리 하지말고 그냥 여기서 꺼져!!"
"여자 망신 다 시키네!!"
아까 욕지거리를 했던 여성은 벌떡 일어나서는, 다시 욕지거리를 해댔다. 저 여성이 안했다면 내가 했을 것이다. 저 년은 귀가 장식인지 아르베 회당에서 배운 가르침을 한 귀로 듣고 아세레우한테 갖다 바쳤나보다. 창년같은 년.
수녀님도 뭐라 제지를 하지 않았다. 워낙에 미친년이라 감싸주고 싶지도 않나보다.
"그래 나갈게 나간다고!!"
"창년같은 년들이 지들이 뭐 되는줄 아나?"
메리체는 발소리를 크게내며 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갈때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저 년이 일하는 옷가게 이름이 분명 '비네'였지?
하늘에서 대천사가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그곳에서 옷을 사지 않을 것이다.
미친년이 사라진 직후, 그제서야 고민 상담이 제대로 이루어졌다. 하나같이 지극히 정상적인 고민들이었고 내게도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이 많이 나왔다.
마직막 고민 상담자로 가녀린 체구의 여성이 쭈뼛쭈뼛되며 걸어나왔다. 체구만큼이나 목소리도 가녀렸다.
"저기... 저는 빵집에서 일하는 '에이미'라고 합니다"
"제 고민은 다름아닌 아이문제때문인데요.."
(아이라고?)
여성들의 얼굴이 앞으로 쑤욱 내밀어졌다. 중급반에서 아이문제가 나오다니... 과연 얼마나 충격적인 일을 얘기해줄지 사뭇 흥미가 샘솟았다. 이런 반응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채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침묵에 사로잡힌 장내라 개미만한 목소리도 크게 울려퍼졌다.
"주변사람들이 어릴때부터 저한테 아이를 낳기 어려울 거라고 말들이 많았어요"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요, 태어날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거든요..."
그녀는 갑자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결혼하게 된다면 남편이 두 번째 아내를 두어서 애를 가져야만 한다고..."
"올해 결혼하는데... 저는 남편이 새로 아내를 두는것이 싫어요..."
"애를 낳기 어려운 저보다 애를 낳을 수 있는 그 여자를 더 좋아하게 될까봐 겁이나요... 그,그 여자가 저를 밀어내고... 나,남편을 독.. 차지할까봐 겁이 나요"
수녀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울고 있는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기며 위로해주었다.
"자매님, 사랑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본처와 후처 사이도 다를 것이 하나 없습니다"
"본처인 자매님은 아르베 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후처가 될 자매님 또한 아르베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이실 겁니다, 분명히요"
"아내들 사이의 관계에서 시기와 질투는 해악이며 죄악입니다, 서로 도와가며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르베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입니다"
"나,남편은요?"
"남성은 아세레우로 인해 독점욕이 생겨났습니다, 어찌보면 남성들이 수많은 여성들을 아내를 삼으려는 마음이 드는 것도 이 아세레우로 인해 그런것일테죠"
"하지만 이로 인해 자매님은 고민을 한시름 덜게 됐습니다"
"왜,왜죠?"
"남편은 아내들의 사랑을 독점할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남편이 아내를 차별하거나 그러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남편에게 있어 자매님이나 후에 생길 자매님이나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평생 독차지하려들 아내들일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문득 오빠가 떠올랐다. 릴리 언니와 나에게, 본처인 언니와 후처인 내게 차별없이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어 주지 않았는가?
잠자리를 나눌때에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차이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들이 실신할때까지 해주었다. 오빠와의 성교를 떠올리니 아랫배가 화끈거렸다. 오빠가 복귀하는 즉시 이 끓어오르는 내 성욕을 아낌없이 분출해줄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 남편이 저를 계속 좋아해줄까요?"
"물론입니다, 만약 남편분께서 아르베 님의 가르침을 어길시 언제든지 교단에 말해주세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게 해줄테니... 그러니 아무 걱정 마세요"
"예.. 감사합니다, 수녀님"
그녀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쓱 훔친 뒤, 수녀님에게 감사함을 표하고나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옆에 있던 그녀의 친구들이, 친구의 가녀린 등을 쓰다듬으며 격려해주었다.
그녀들이 있는 한, 대천사 아르베 님이 계신 한 그녀의 남편이 감히 그런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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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상담의 자리가 끝난 후 고발의 자리가 찾아왔다. 이 자리는 주변에서 간통과 같은 대천사 아르베 님의 가르침의 저해되는 행동을 한 여성들을 밀고하는 자리이다.
보통 그런 짓을 하는 여성이 별로 없었으므로, 언제나 짧은 시간안에 끝이 난다. 이번에도 아무 일 없이 끝나려는 찰나였다.
저기 저 편에서 분홍색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여성이 손을 살며시 들었다. 수녀님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아르베 님께 맹세코 거짓을 고할 시 엄벌에 처하겠습니다, 그래도 고하시겠습니까?"
"예"
살벌한 말에 평온한 어조로 답하다니, 엄청 독한 년인게 틀림없다.
"고하시죠"
"저의 친언니 '비나리 조이'가 결혼 서약의 맹세를 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