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72화. 마왕
< -- 83. 마왕 -- >
검은색 인간의 등장에 병사들은 일동 침묵에 휩싸였다. 군단장들은 거의 사색에 잠겨있었다. 체사레 사령관과 반디트만이 의연한 표정으로 놈을 쳐다보았다.
놈은, 마왕은 목책에 가까이 다가와서는 우리들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놈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서움이 느껴졌다.
"투척 준비!!"
사령관의 명령에 병사들이 일제히 투창을 집어들고서는 놈을 향해 겨누었다.
마왕은 흐물거리는 손가락으로 체사레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색 구가 형성됐다.
쿠웅ㅡ!
체사레가 벼락같이 날린 투창이 놈의 손가락 끝을 꿰뜷었다. 투창과 검은색 구가 맞부딪히면서 굉음을 냈다. 연기가 가라앉은 자리에는 큼지막한 웅덩이가 그곳에 만들어졌다.
바닥에 액체처럼 쏟아져버린 놈의 육체는 다시 아까의 형태로 돌아가기 위해 점점 뭉치더니, 이내 제 모습을 되찾았다. 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놈의 몸이 삽시간에 부풀기 시작하더니 이내 큼지막한 민달팽이 모양으로 변해버렸다. 표면에는 여성의 유방과 남성의 성기가 무수히 많이 달려있었다. 머리부분에는 여성의 성기가 쫙 갈라져서는 그 사이로 검은색 동공이 희번득하게 떠있었으며, 턱으로 보이는 부분에는 남성의 고환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가히 꿈에 나올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넋이 나갔고, 체사레는 바삐 수녀들에게 명을 내렸다.
"아르베의 수녀들이여, '대천사의 전율'을 거행하라!!"
목책 아래에서 그녀들은 원형으로 빌 둘러 앉은 뒤, 서로 손을 맞잡고서는 기도문을 외워댔다. 원형의 한 가운데에는 나신의 여성이 선 채로 두 손을 가슴께에 올리면서 기도를 읊조리고 있었다.
(무슨 의식이라도 하는건가?)
"저 수녀님들 도대체 뭐하는거야?"
랄라의 물음에 나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델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앵ㅡ 쾅!
고막이 찢어져 나갈듯한 굉음에 앞을 쳐다보니 사령관과 군단장들이 놈이 초인적으로 내지르는 촉수들을 검으로 튕겨내고 있었다. 몸에서 뿜어지는 검은 덩어리들은 그런 그들을 노리면서 날라갔고, 대대장과 백부장들, 병사들이 방패로 막아내면서 군단장들을 엄호했다.
반디트를 엄호하던 병사들이 검은 덩어리에 목책 밖으로 튕겨나갔다. 촉수들을 막기에 여념이 없던 그는 날아오는 검은 덩어리들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아무리 밉고 마음에 안드는 새끼라지만 지금은 그의 능력이 절실했다. 랄라와 델타를 남겨둔 채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때마침 검은 덩어리가 반디트, 그를 향해 날라들었다.
나와 그의 거리 차는 꽤 됐다. 도착했을때에 그는 이미 공격을 받은 뒤일 것이다. 체내 에너지가 발현되면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제발! 제발! 체내에너지야 제발!)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줘가면서 달렸다. 그러면 혹시라도 체내 에너지가 발현될까 하는 마음에.
감정이 격해지면 체내에너지가 발현되곤 했었다.
지금이 딱 그 상황인데 왜 발현이 안된다는 말인가?
그러고보니 팔에서 발현됐지 다리에서 발현된 적은 없었다. 혹시 나는 팔에서만 발현되는 것인가? 아니면 숙련도가 그것밖에 안되서 그런건가?
(씨발! 몰라!!!!)
(반디트 이 좆같은 새끼! 왜 맨날 나한테 이런 개거지 같은 일만 하게 만드는거야!)
저 새끼를 살리려고 이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열이 뻗쳤다.
(병신 같은 새끼, 커즐린을 죽이라고 시켰으면 그에 대한 주의사항도 말해줘야 될 거 아냐?! 모자란 새끼같으니라고)
(씨발! 씨빨! 저 새끼때문에 죄없는 사람들을 내 손으로 죽였다고!!!!)
반디트에 대한 분노가 들끓어 오르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다리에서 느껴지는 뻐근함만이 내가 지금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덩어리가 그에게 날라들기 직전이었다.
"비켜어어어어어!!!!!!!!"
다리에 폭발적인 힘이 생겨났다. 쏜살같이 달려가 날라드는 덩어리를 검으로 강하게 튕겨냈다.
파앙ㅡ!
검과 덩어리가 맞부딪히면서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이내 덩어리는 괴물들의 무리속으로 날라가버렸다. 갑작스레 날라들어온 그것에 의해 괴물들 한 무리가 그대로 즉사했다.
"고맙네"
엄청난 속도로 내지르는 촉수들을 초인적인 속도로 막아내던 그는, 나를 곁눈질하면서 감사함을 표했다. 이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새끼와 싸울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예.. 뭐ㅡ 크윽!!"
다리에서 끓어질 듯한 통증이 들더니 검을 든 팔이 저려왔다. 왠만하면 참겠지만 이 고통의 세기는 절로 신음이 날 정도였다.
다급히 올라온 병사들이 다시 그를 엄호하게 되면서 잠시 뒤로 물러나 통증을 가라앉히려 하였다. 그때 진지내에서 엄청나게 밝은 순백색의 빛이 하늘로 뻗어올라갔다. 어찌된 영문인가 하고 쳐다보니 원형의 중앙에 서있었던 나신의 여성에게서 커다란 날개 형상의 빛무리가 솟구치고 있었다.
날개는 공중으로 뻗어서는, 접혀졌던 날개를 활짝 폈다. 그 크기가, 그 밝음이 진지내를 가득 채웠다.
[끼야아아아악!!!!!]
듣기만해도 공포심이 밀려오는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마왕이 몸을 쪼그라뜨리면서 떨어대었다. 여성기에 갈라진 틈새가 닫혀져서 눈이 보이지 않았으며 몸에 난 유방과 남성기에서는 정체모를 끈적끈적한 검은 액이 분출되었다.
구역질이 밀려나올 정도의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반면에 주변의 괴물들은 멀뚱멀뚱 마왕만을 쳐다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몸부림치는 놈의 발작에 밑에 있던 괴물들 몇몇이 비명 한 번 못지른 채 그대로 깔아뭉개졌다.
그 순간 비명이 멈추었다.
슈웅ㅡ!
놈의 여성기에서 돌연 촉수가 눈에 안보일 정도로 쏜살같이 꿰뜷고 지나갔다. 이에 병사들은 물론 지휘관들도 한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몰랐다. 뒤에서 수녀들의 비명이 들리게 되면서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놈의 촉수는 원형 중앙의 빛을 뿜어내고 있는 수녀의 배를 향해 꽂혀져 있었다. 촉수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르더니 서서히 수녀의 몸을 갉아먹었다. 앞의 상황을 보니 마왕의 몸이 서서히 축소되어가는 중인데, 아마도ㅡ
"놈이 우리의 진지로 들어올려 한다!!"
"수녀들이여 막아라!! 보조병, 가서 막아!!"
체사레가 목책 아래의 대기중이던 보조병에게 지시를 내렸다.
수녀들은 뒤로 물러나서 지팡이를 놈에게 겨눈채 '신성한 세례'를 날려댔으며 기병들은 말의 돌진력을 통해 밀쳐내고 베어내었다. 앞쪽도 마찬가지로 발리스타와 투창, 화살을 줄어드려 하는 놈에게 퍼부었는데, 괴물들의 공격으로 상황이 불리해져가만 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진지 내의 놈의 팽창은 멈추어졌다. 사령관은 다시 한 번 지시를 내렸다.
"4군단, 모험가, 하피들은 내려가서 녀석을 토벌하라!"
반디트는 휘하병력을 이끌고 아래로 급히 내려갔으며 나와 랄라, 델타는 모험가들과 같이 내려갔다. 하피들은 공중을 선회하며 발톱으로 녀석을 위협해댔다.
병력이 목책 아래로 내려오고, 4군단장은 병사들에게 방원진을 명했다. 이에 그들은 방패를 앞으로 둔채 녀석의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포위하는 식의 진형을 갖추었다. 보조병들은 큰 타격을 입은 채 병사들이 비켜준 틈으로 후퇴했으며 수녀들은 지친 몸을 이끌며 진형을 이탈했다.
"녀석이 이 진형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해야한다!"
"백부장! 라르스를 선두로, 전투를 개시한다!"
"라르스 앞으로!! 신병들은 맨 뒤로 빠져라!!"
진형에서 재정렬이 이루어진 뒤, 다시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는 동안 한가운데에서 꿈틀거리던 놈은 이내 병사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생긴 눈두덩이 속에는 시뻘건 붉은색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콰직ㅡ!
하피가 떨어뜨린 돌덩이에 몸이 찌부러졌다.
돌덩이를 꿰뜷고 내질러진 촉수는 바로 위에서 날고 있던 하피의 목젖을 그대로 관통했다.
떨어진 하피의 시체를 놈이 몸에 흡수하더니 이내 가슴팍에 넘실거리는 유방이 생겨났다.
남성기가 우뚝 솟은 하체와, 상체에는 유방이 달린 괴이한 형태.
손으로 유방을 어루만지고 있던 놈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녀석의 공격이 시작됐다. 마른 침을 삼키고 있던 병사들은 방패를 단단히 쥔 채 녀석의 방향성 없는 공격을 받아내며 꿋꿋이 버티어냈다. 녀석이 방패를 잡고, 그것을 쥔 병사를 멀리 내던져버리면 그 빈자리를 또 다른 병사가 채워갔다.
하늘에서는 하피들이 돌덩이를 날리며 녀석의 정신을 흩뜨려 놓았다. 수녀들은 기병들의 말에 올라타 신성한 세례를 퍼부었다. 일 대 다수의 전투방식은 항상 다구리가 답이다.
녀석은 몸을 구부리더니 이내 활짝 폈다. 그러자 뾰적하고 긴 촉수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 촉수는 각각 방향의 1열을 꿰뜷어 궤멸시켜버렸다. 나와 내 아내들이 속한 열은 바로 그 옆이었다. 이래서 줄을 잘서야 한다.
"단숨에 몰아붙쳐라!!"
"녀석이 공격을 날리기 전에 무너뜨려야 된다!!"
그 광경에 반디트는 성난 목소리로 외쳐대며 전진 명령을 지시했다. 백부장의 고성에 맞춰 병사들은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자 놈은 아까의 그 공격을 다시 한 번 사용하고자 했으나 위와 맨 뒤에서 방해를 가해오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선두가 들고 있는 방패는 수녀들의 주문으로 인해 한 층 강화된 상태였다.
[꾸웨에에엑!!!]
촉수를 내질러도 주먹으로 두들겨봐도 놈의 공격은 헛수고에 불과했다. 이대로만 된다면 녀석은 이제 끝장난것이나 진배없다.
"반디트!! 병사들을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라!!"
상황이 잘돌아가고 있는 상황인데 느닷없이 뒤에서 사령관이 뜬금없는 지시를 내렸다. 오우거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고나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거구의 체구가 병사들을 짓뭉갰다.
"진형을 풀어라!!"
"분대 대형으로 싸운다!!"
"분대 대형!!"
놈의 남성기가 점점 솟구쳤다.
대형이 와해되면서 풀려난 놈은 다시 아까의 그 기술을 사용해 병사들을 해치워가며 진지 내부를 혼란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천막에서 나온 부상병들도 합세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와 내 아내들은 녀석의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녀석에게 싸움을 걸기에는 너무나도 무모했다. 그렇게 요리조리 피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엿보던 그때 녀석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하는 것을 눈치챘다.
녀석의 시선은 목책 위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는 체사레 사령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몸에서 촉수가 꿈틀거리며 튀어나오기 일보직전이었다.
쏘아졌다.
"야 이 비겁한 새끼야!!"
"정정당당하게 싸우라고 새꺄!!"
속사포로 말을 뱉어내며 두 번째 권능을 발현했다. 녀석의 공격이 어떤 힘으로 이루어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뱉고 봤다. 사령관이 죽으면 그날로 이 전투는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우두머리가 잡히면 집단은 혼란에 휩싸이기 마련이니깐.
녀석이 내지른 촉수는 권능의 발현과 함께 힘을 잃고 추욱 늘어졌다.
이에 놈은 크게 당황한 것인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봤다.
순간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눈도 없는 놈인데도 불구하고, 놈의 불타오르는 시선이 몸으로 느껴졌다. 몸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으아아악!!!ㅡ 우웨에엑!!"
몸이 미친듯이 떨려왔다. 머리가 안개로 뒤덮인 것 같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으며 배속에서는 역겨운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팔과 발에서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느껴지는 부위는 이 상황속에서 이상하게도 우뚝 솟아있는 음경뿐이었다.
마치 녀석의 남성기와 상태가 똑같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두 번째 권능은 싸우고자 하는 상대와 동일한 신체조건을 가진 상태로 만들어준다.
권능은 발현됐고, 나는 녀석과 대등한 힘을 가지게 됐다.
에너지가 없는 오직 힘만의 대결이다.
놈은 달려드는 병사들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나를 향해 화살같이 날라들었다.
침이 질질 흘러내리는 상황에서 마왕, 이 새끼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바닥에 떨궈진 투창을 집어들어야 했다. 어느샌가 투창이 내 손에 들려져 있었다.
"씨이이이발!!!!!"
놈의 머리에 투창을 날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녀석은, 손바닥과 함께 자신의 얼굴까지 관통되게 되어버렸다. 입에서 침이 피로 바뀌며, 투창을 날렸을 것으로 짐작된 팔은 어깨에서 덜렁덜렁거린채 힘없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두 다리를 바닥에 쓰러뜨린 놈은, 나를 혼란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녀석이 쓰러졌다!!"
"섬멸하라!!!"
중기병들이 창을 꼬나쥔 채 녀석의 몸에 구멍을 송송 내주며, 수녀들은 놈의 몸에 세례를 퍼부었고, 병사들은 마왕의 몸에 칼자국을 깊게 새겨주었다.
마왕의 눈두덩이에 담긴 시뻘건 붉은색이 점점 흘러내리더니, 결국 눈두덩이는 공허함만이 남았다.
반디트가 내지른 참격에, 놈은 몸이 여러등분되면서 재가 되어 공기중으로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목책 위에서 병사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