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71화. 구원 (71/106)



〈 71화 〉71화. 구원

"남편, 남편! 일어나봐!"


"왜... 뭔 일이라도 있어?"

랄라의 외침에 비몽사몽한채로 물었다. 초점이 흐려진 눈빛으로도 그녀의 긴장된 얼굴표정이 느껴졌다.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워졌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볼에 차가운 액체가 툭하고 떨어졌다.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저 너머 하늘을 쳐다보니 그곳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볼에서 이번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개의 액체가 툭툭툭하고 떨어졌다.

"비가 올려나...?'

내가 상체를 일으켜 아내들의 가슴팍에 기대는 순간 말은 실체가 되어 움직였다. 장대비가 우수수하고 떨어졌다. 착잡한 분위기에 비가 내리니 완전 초상집이 따로없다. 초상집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목이 말랐다. 입을 벌려 빗물을 받아마셨다. 내게 젖을 물리려는 델타를 한참동안이나 어르고 달랜 후에야 편히 빗물을 받아마실 수 있었다. 병사들이 쓴 투구의 독수리 부리에서 물이 뚝뚝하고 떨어져내렸다. 매달아놓은 깃대의 묶인 천들은 비에 젖어 추욱 늘어졌다.


지원군이 오면 모를까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보였다. 4군단의 3개 대대는 커녕 백인대도 아직 복귀를   상태이다. 기대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하피들은...  올 것이다. 아니, 반드시 와야만 된다.


우르르르 쿠쿵ㅡ! 쿠구쿵ㅡ!

목책에서 번개가 여러번 내려치더니, 결국 불이 붙고 말았다. 연달아 목책 너머로 괴물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전투가 다시 시작됐다.

(크으윽.. 갈비뼈 씨발!)


신음이 새어나오지 않게 볼을 이빨로 잘게잘게 씹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그녀들과 같이 목책으로 달려갔다.


빗방울이 눈썹에 달라붙어 시야 분간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서, 교국에서 기다릴 아내들을 위해서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운채 검을 내질렀다. 괴물들은 이제 대규모가 아닌 소규모로 쉴새없이 공격해댔다. 분명 우리들의 피를 말릴 속셈이다.

다 물리쳤다 싶으면 숲속에서 다시 소규모의 괴물들이 달려나와 공격을 가했다. 병사들은 목책 위에서 빗물에 몸이 차갑게 식어갔고, 퀭한 눈빛으로 녀석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방벽은 이런 일들이 매일매일 벌어지는건가?)


지금 이 풍경이 방벽의 모습과 연관되어보였다. 아마 그곳의 모습이 이곳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식량은 점점 떨어져갔으며 사방에서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채 빗물을 받아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단장이든 대대장이든 백부장이든 장교든 병사든 상관없이.

교국과 근방의 제국 도시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서구를 띄운지 며칠이 지났건만 깜깜무소식이었다. 이러다가는 싸워뒤지기보다는 동사하거나 굶어뒤지는게 더 빠를 것이다.


갈비뼈에 대한 고통도 이제는 익숙해진 것인지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태가 심각해졌다는 소리일 것이다. 아니면 저절로 나았거나. 아마도 전자의 경우가  것이다. 수녀들은 더 이상 치유를 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체내 에너지의 무리한 소모로 인한 고열로 죽은 수녀가 몇몇 됐다.


치명상을 입은 병사들은 그저 땅바닥에 엎드린  죽음을 기다렸다. 비가 계속 쏟아져 내렸다. 생사의 기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 -- 82. 구원 -- >




침묵으로 뒤덮인 숙영지.
불현듯  하늘 멀리에서 날개짓 소리가 들렀다.
하피들이 발톱에 뭔가를 잔뜩 짊어진 채 날아오고 있었다.


"발리스타!!"

백부장의 소리없는 아우성에 망루 위에 병사들이 안간힘을 써대며 대형석궁에 화살을 장전시켰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로  하피들을 쳐다봤다. 무리의 선두에서 델타와 같은 외형의 여성이 보였다.


"잠깐만!! 쏘지 말아주십시오!!!"


미친 사람처럼 반디트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그가 2대대 4백인대 백부장 쿠리오를 불러 확인한 연후 공격을 중지시켰다.


델타가 속한 하피 무리들은 마왕군에 거센 저항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유유히 하늘을 배회하다가 숙영지에 무사히 안착했다. '하피의 어머니'가 군단장들에게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들을 내어주니, 그들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환호의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병사들은 오래간만에 주린 배를 채웠으며, 3군단의 군단장이자 이번 임무에 사령관 역을 맡은 '제니오 체사레'는 '하피의 어머니'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번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며 에흐리스께 자네들의 공을 치하해달라고 말씀을 올리겠다고 했다.

숙영지 내에 생기가 되돌아오고 있던 도중, 델타의 어머니가 내게 비밀스럽게 다가와서는 귓속말로 속삭였다.


"딸의 수컷,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냐?"

"맞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제국에게 빚을 지게 했으니 그들은 반드시 갚아줄 것입니다, 장모님의 부락도 숲 밖으로 나와 마을을 이루며 살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그렇구나..."
"만약 그때가 오면 날 임신시켜주겠느냐?"

"예?"


어느새 그녀의 손이 내 고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나는 네게 많은 것을 내주었다"
"딸도 제국에 대한 복종도, 심지어는 도움까지 말이다"
"그러니 내게도 뭔가 하나를 줘야 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딸의 어머니 되시는 분께 어떻게 임신을..."

"정말 뻔뻔하구나!"
"내가 많은 것을 바란것도 아니고, 그저  임신시켜달라고   뿐이거늘!"
"비겁하고 나약한 수컷이었군, 내가 잘못봐도 한참을 잘못봤어!"


표독스러운 눈빛을 내게 보내면서 그녀는, 몸을 격하게 떨어댔다. 난감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횡설수설 말을 뱉어냈다.


"장모님은 알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해봤자 임신도 안될텐데.. 그러니깐"

"그건 당연히 거짓말이다"
"문제 될 것 없다"

"그럼 딸에게 거짓말을 하신겁니까?"


"그렇다"


당당하게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ㅡ"

"됐다!"
"어차피 늙은 내 몸뚱아리가 수컷들의 마음에 들리 만무할테지"
"가서 딸애의 젊은 육체나 실컷 탐하거라!"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는 뒤돌아서서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늙은 몸뚱아리라고? 저게 어딜봐서 늙은 몸뚱아리인거지?)

그녀의 뒷태는 가히 예술이었다. 탱탱한 허벅지와 토실토실한 엉덩이, 넓은 골반, 잘록한 허리, 등에 치렁치렁 흔들리는 붉은색의 긴 머리칼, 요리보고 조리봐도 젊은 여성의 육체에 비견될, 아니 뛰어넘을 정도의 육체였다. 얼굴은 거의  아내들과 비견될 정도의 미모를 자랑했다.


(그녀에게  씨를 넣는다라)
(하지만 그녀는 내 장모님인데...)

음습한 마음과 함께 배덕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장모님과 사이가 틀어진채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숙이고 봐야겠다.


"어머님이 어딜 봐서 늙은 몸뚱아리 이십니까?"
"제 눈에는 델타와 비견될 정도의 몸을 가지셨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서는, 나를 쳐다보며 살며시 물어봤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생각하고 자시고간에 그녀의 몸매는 뭇 남성들의 음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바라만봐도 자동으로 발기가 되버리는 그런 몸매였다.


"그렇습니다"
"수컷들의 음심을 자극하는 몸매임이 틀림없습니다"


"너도 그러하냐?"


"...... 예"

"날 임신시켜줄 것이냐?"

"그건 좀..."

"됐다!!"

"아.. 알겠습니다!"
"일단 이 사태를 끝내고 난 연후에... 자리를 잡고  이후에..."

"그 말 맹세할 수 있느냐?"
"너희가 믿는 아르베? 그 대천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느냐?"
"듣자하니 대천사 아르베는 배맹자에게 엄한 처벌을 내린다고 들었다, 맹세할  있느냐?"


(꿀꺽)
".... 매,맹세합니다"


"좋다! 이제야 내가 인정한 수컷답군!"

(일 내버렸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델타나 다른 아내들에게는 뭐라 설명하면 좋을지...

"델타한테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그 애라면 내가 잘 말해놓을테니 걱정말거라"

"...... 일단 장모님, 옷부터 입으시는게 어떻겠습니까"
"남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다 벗고 다니시는것은"

"흐음~?"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서는 날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내 암컷이 됐으니 다른 수컷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이냐?"

"내,내 암컷이라니! 그,그건..."

뭐랄까 그녀를 임신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녀에 대한 소유욕이 미친듯이 샘솟았다. 이것이 아세레우가 남자들에게 걸어놓은 독점욕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지구인인데......


어쨌든간 그녀의 알몸이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진다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더 나아가서는 그녀의 안에 씨를 뿌린 남자에게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후후후ㅡ  안다"
"씨받이 수컷이 막상 자신과 교미한 암컷이 다른 수컷에게 가니 분노에 차오르는 그 눈빛을 본 적이 있다, 대다수의 수컷들이 그러더군"

"끄응..."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딸애를 지켜보면서 나도 죽기전에 수컷과 그런 사랑을 나눠보고 싶었다"
"너 이외의 수컷은 쳐다보지도 않을테니 분노하지 말거라, 날 임신시켜준 수컷은 사랑한 적이 없으며  손으로 죽여버렸으니  또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그 말을 들으니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나는 아내들이 네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편협한 마음이 드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화가 풀리지 않는것이냐?"
"그럼 어쩔  없지, 너가 아닌 다른 수컷에게 임신시켜 달라고 말하는 수밖에..."

"그건 안됩니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품에 확 끌어안아주었다. 편협하든 말든 이제 그녀는  여자다. 다른 남자에게 내주는 생각만으로도 오장육부가 뒤틀릴 지경이었다.

"수컷의 독점욕이란.. 암컷에게 우월감을 주는구나"
"델타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아"

델타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그녀가 이제 내 여자가 됐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딴 놈에게 마음품지 못하도록  끌어안았다.

(내 여자다!  여자! 나만의 여자! 오직 나만이 탐할 수 있는 여자!)


"...  아프구나"


아파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끌어안는것을 그만뒀다.

(뭐지?... 방금 전의 그 기분은 대체)


"나에 대한 너의 독점욕은 충분히 느꼈다"
"기쁘구나, 네 바램대로 옷을 입어야 겠구나"
"옷을 줄 수 있겠느냐?"


"예?... 아ㅡ 여기서 기다려, 내가 금방 갖다줄게"

"자신의 여자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렇게 바뀔 수가 있다니, 놀랍군"

천막을 뛰쳐나가면서 그녀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그때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됐다. 그녀에게 여분의 옷을 건네주고, 랄라와 델타의 곁에서 음식을 집어먹을  불현듯 이해가 갔다. 아내들한테 하던 말투를 그녀에게 했던 것이다.

잠시후 하피의 어머니는 딸에게 우리가 나눴던 맹세를 말해주었다. 델타는 팔짝 뛰며 극구 반대했으나 이미 나눠버린 맹세를 무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체념했다.

대신 조건을 걸었으니 델타 자신이 아이를 낳은 후에 가지라는 조건이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자신은 몇 년이 걸리더라도 참고 기다릴 수 있다며 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랄라는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델타에게 너도 결국은 내 말에 수긍한 것이냐며 비웃었다.

한바탕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 미리 그녀들을 와락 끌어안아 두었다.


-

기운을 차린 수녀들은 다시 환자들에게 치유를 걸기 시작했고, 이에 나도 미루지 않고 그녀들에게 치유를 받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걸리적거리는 듯한 느낌이  사라졌다. 그리고 답답했던 숨통도 확 트였다.

사령관의 명으로 하피들  몇몇이 제국군의 옷으로 갈아입고 제국의 국기를 꼬나쥔 채, 장교 몇명을 데리고 근방의 있는 제국 도시에 지원을 요청하러 떠났다. 소강상태에 들어선지 얼마 안되어 녀석들은 또 다시 산발적으로 공격을 해왔으며 병사들은 예전과는 다르게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살 수 있다는 희망, 마왕군을 토벌하고 마왕을 죽일 수 있다는 희망이 팽배했다. 마왕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쾅!!!!!!


저만치 숲에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날라오더니 그대로 망루를 박살내버렸다. 마왕군도 병사들도 모두 침묵에 휩싸였다. 검은색 인간의 형체가 흐느적거리며, 괴물들이 양옆으로 비켜서면서 만들어진 길을 걸어나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