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57화. 찬바람 (57/106)



〈 57화 〉57화. 찬바람

< -- 66. 상징 정하기 -- >




'세른'에서 내뿜어지는 초록색의 은은한 빛에 반사되는 그녀의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랄라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설마 그녀가 내 품에 껴안긴  곤히 잠들 줄 누가 알았을까?


새삼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나한테 쌀쌀맞게 굴었던 그녀가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덜컥 내게 아내가 되겠다고 말하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만약 랄라가 그때 팬티만 안벗었다면... 근데 팬티는 갑자기  벗으려 한거지?)
(혹시 계획된 행동이었던건...)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계획에 꼼짝없이 걸려든 셈이다. 분하지는 않다. 오히려 내게 과분할 정도다.


"하암~... 벌써 불침번 시간이야?"


잠에서  그녀는 귀를 쫑긋거리면서,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널부러진 팬티와 바지를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내가 대신 설테니깐 푹 자"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젖자, 강제로 그녀를 눕히고서는 담요를 덮어주었다. 덮어준 뒤에는 엉덩이를 손바닥 가득 움켜쥐고서는 말했다.

"남편  들어"


"이제 자기 여자 됐으니깐 챙겨주는거야?"


"흐흐흐, 물론이지"

풍만한 그녀의 가슴을 한 번 움켜쥔 뒤, 나갈 채비를 하였다. 준비를 다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간 후 다시 배낭으로 구멍을 막아놨다. 어느 누구도 내 여자의 알몸차림을 보게 둘 수는 없다. 담요를 덮고 있다고해도 말이다.


"고.레오 씨, 말번 아니십니까?"

랄라를 깨우러 걸어오고 있던 아르도의 물음에 거짓으로 답했다.


"랄라 씨하고 바꿨습니다, 특이사항은 없습니까?"

"특이사항 없고, 모닥불 꺼지지 않게 주의해주십쇼"


"알겠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수고하십쇼"


교대를 무사히 마친 후 모닥불 근처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옅어진 어둠 속으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뿜어내는 빛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조용하면서도 차분했다. 이러고 있으니 어젯밤 있었던 일들이 마치 꿈인 것마냥 느껴졌다.

"아내가 세 명이라...  많은 남자구만, 고.레오"

모닥불에 장작을 넣으니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길이 거세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뭇가지를 들고 땅바닥에 긁었다.


"가문의 상징으로 삼족오를 골랐으니깐... 얼핏 이런 느낌?"


TV드라마에서 봤었던 삼족오를 떠올리며 대충 윤곽선을 잡아보니 얼추 비슷해보였다.

(그대로 배끼는 건 좀 그렇군... 변형을 주는게 좋겠어)
(발을 네개로 할까? 아님 머리를 두개로....... 못하는구나)


가문의 상징을 정할 때에도 제한된 사항이 있었는데, 나라의 국기를 그대로 배끼거나 유사하게 따라하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기면 반역죄로 잡혀간다. 귀족들이 쓰는 상징도 이에 해당한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그때, 불현듯 머릿속에서 뭔가가 스쳐지나갔다. 대천사 이퀼리브리오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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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고군대, 내가 아까 '이 행성의 균형유지를 위해 힘써달라' 라고 부탁을 했었었지, 사실 그건 핑계고 누군가 한 명은 나의 존재를 알고 나의 권능을 써줬으면 싶었어]
[그래야지 내가 이곳 세계에서 대천사였다는 것을 남길 수 있지 않겠나?]

"대천사님..."


[그래서 고군대, 내 부탁을 들어주겠는가?]

"... 까짖거 힘써주기만 하면 되는  아니겠습니까? 들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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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사였다는 것을 남긴다라....... 그러고보니 다른 대천사들은 다 상징이 있는데 그 분만 없네)
(이참에 내가 독자적으로 만들어서 가문의 상징으로 삼아야겠다)

혼을 담아서 땅에다 열심히 창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됐다.

균형의 권좌에 앉아있던 대천사였기 때문에 정의의 여신상을 참고하여 한 손에는 저울추를, 다른 한 손에는 모험가인  직업을 고려해서 검을 쥐게 했다. 육체는 까마귀의 얼굴에 다리가 세 개인, 사슬갑옷에 서코트를 입은 남성을 그렸다.


몸에 두른 무장은 내 모습을 본딴 것이며 까마귀의 얼굴에 다리가  개인 것은 삼족오의 특징을 빌려온 것인데, 사실 다리가 세 개가 아니라  개의 다리에 나머지 하나의 다리는  남근을 표현한 것이다.

다리를  개로 하는 건 너무 배낀 것 같은 마음에 의미를 다르게 매기고자 했다. 내 남근이 워낙 커서 사실 다리 세 개로 봐도 아무 문제 없다.


"이게 뭐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랄라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왔냐고 물으니 잠도 안오고 해서 나왔다고 답하면서 내 곁에 착 달라붙은 채, 아까했던 질문을 다시 물어보았다.

"이게 대체 뭐야? 뭔가 독특해보이는 그림인데?"


그녀의 말에 땅바닥에 그렸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확실히 독특하긴 했다. 그림은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은 채로 머리는 측면에다 어깨와 몸통은 정면을, 다리와 발은 머리와 똑같은 측면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집트 벽화의 회화 양식과 비슷했다.


(어쩌면 난 예술의 소질이 있을지도)


"뭐냐니깐? 무시하는거야?"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면서 노려보고 있는 그녀의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는 답해주었다. 덤으로 꼬리를 만져주어 화를 풀게끔 해주면서 말이다.

"내 가문의 상징이야"


"남편의 상.. 흐윽... 거기, 거기 기분좋아"

"여기가 좋아?"

꼬리 끝부분을 만져주니 다리를 배배꼬더니 이내 혀를 내밀면서 더운 입김을 토해냈다. 꼬리 만지기를 중단한 뒤,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으면서 얘기를 이어나갔다.

"이번 임무가 끝나는 대로 바로 결혼식을 올릴거니깐 미리미리 정해둬야지"

"꼬리... 꼬리 더 만져줘"

"랄라는 꼬리 만지는 거, 싫어하는  아니었어?"
"저번에 나 때리고 그랬잖아?"


"그때는 남편한테 화가 많이 났었으니깐"
"유하연 그년한테만 잘해주고, 나한테는 쌀쌀맞게 굴고 말이야..... 그러면서 야릇한 시선이나 보내고..."
"그때 정말이지 죽여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고"


(뒤질 뻔 봤네)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는걸 보면 나를 어지간히 좋아하긴 했었나 봐?"


"너무 으스대지 마, 나 쉬운 여자 아니니깐"


"흐흐흐흐"


그녀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은 뒤, 가슴을 주무르며 미소지었다. 그리 싫지만은 않은것인지 그녀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잘 만질 수 있게끔 팔을 들어올려줬다.


"남편이 만약 그때 내 다친 손 치료안해줬다면 완전히  떨어질 뻔했다구, 알아?"

침묵을 지키며 그녀의  뒤로 가 앉아, 껴안으면서  손으로 가슴을 주물러댔다. 그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내 여자가 됐으니깐.


 젖꼭지를 잡고 쭈욱 잡아당기니 그녀의 입에서 교성이 터져나왔다. 재빨리 입술을 포개어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끔 했다.





< --67. 찬바람 -- >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나는 병사들을 깨웠다. 깨워난 병사들은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뒤, 곧바로 본대 합류를 위해 행군을 서둘렀다.

단 한 번의 휴식 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모험가 생활로 단련된 체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길을 개척해가며 나가는 강행군은 아무리 그래도 좀 버거웠다. 고개를 뒤로 돌려 랄라를 쳐다보니, 그녀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걷고 있었다.

"랄라, 힘들지 않아?"


"별로"


내 물음에 그녀는 짧게만 답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얼굴에는 땀이 흥건해 있었다. 그 모습에 앞에 있던 신병에게 앞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물었다.

"글렌다 씨, 점심은 안 먹습니까?"


내 물음에 그는 덤덤하게 답해주었다.

"오늘 안에 본대에 합류해야 되서 점심은 없습니다"
"본대에 도착하고 난 뒤에야 점심 겸 저녁을 먹을겁니다"

(미쳤네...)
"안 힘드십니까?"


"제국의 군단병에게 행군이란 일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하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하며 걸음을 놀렸다. 걷는 동안 자주자주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귀가 축 처진 채 걷고 있던 그녀에게 배낭을 대신 들어주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완강히 거부하며 자신이 짊어지고 가겠다고 했다. 귀를 한  쓰다듬어 주고서는, 다시 다리를 움직이는 것에만 집중했다.



-



(씨발... 뒤지겠네)


다리가  다리가 아닌  같았고, 뇌가 다리를 움직이는게 아니라 다리가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위에서 무섭게 내리쬐고 있는 강렬한 햇빛 공격에 정신이 날라가기 일보 직전이다. 문득 그녀가 걱정됐다.

"랄라, 괜찮아?"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이마를 훤히 드러내놓고서는, 입을 벌리면서 걷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녀 뿐만 아니라 나 또한 뒤질 것 같아 맨 앞에서 걷고 있던 알도에게 잠시 쉬었다 가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려던 그때였다.

[꾸웨에에에에엑!!!!!!]


양 측면에서 고블린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알도의 고성과 함께 병사들이 검을 빼들고 맞서기 시작했다.

나도 재빨리 검을 빼들고 병사들과 합세하려 했지만, 합세하기도 전에 상황이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병사들은 칼에 묻은 피를 녀석들이 입고 있던 누더기 옷에 스윽 닦고는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들의 발치에는 머리가 두동강 나고, 배속에 내장을 쏟아낸 고블린들이 즐비했다.

"존나 지루했는데 이렇게 떡하니 즐길거리를 주다니"

"밀로, 애들 시켜서 시체 묻어라"
"겁도 없이 덤벼온걸 보면 여기 부근의 놈들의 서식지가 있는 모양이야"

알도의 명에 그는 궁시렁대며 후임들을 재촉해댔다.  중에서 아르도와 글렌다는 어젯밤에 있었던  때문인지 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땅을 파댔다. 삽이 땅으로 빠져나올때마다 거대한 흙 덩어리가 공중을 날라다녔다. 막내라고 치기에는 힘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랄라를 나무그늘에 앉혀둔 뒤, 그들을 도우러갔다. 내 도움에 밀로는 잇몸 미소를 지으면서 걸걸하게 말했다.

"형씨, 행동이 빠릿빠릿한게 딱 군대체격인데?"
"이 참에 우리 군에 입대하지 않겠수?"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지껄이는거야!)
"하하하, 저는 천성이 모험가 체질입니다"

"뭐, 모험가 생활 질리면 언제든지 입대하슈"
"아 맞다... 그러고보니 형씨는 교국출신이었지, 애초에 안되는 거였구만"

데르트 제국의 군단병은 오직 자국민 남성만이 입대할 수 있으며, 제국 이외의 국적을 가진 남성은 입대가 불가능하다. 그는 무안했는지 자기와는 다르게, 앞에서 땀을 뻘뻘흘리며 작업하고 있는 후임을 방해해댔다. 그러다가 돌연 내 뒤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기 저 포루로 여자는 형씨 애인이요?"


"그렇습니다, 이번 임무 끝나고나서 바로 결혼식을 올릴려고 합니다"

혹시 그녀에게 흑심을 품을까봐 얼른 방어막을 걸었다.

"씨발! 내 말이 맞았지? 빨리 돈 내놔라"

언제 내기를 걸었는지, 그들은 낙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각자 품에서 꺼낸 동화 2닢을 그에게 건네줬다.


"자식들이 말이야, 내가 짬밥이 얼만데"
"눈치로만 이  이때까지 뒤지지않고 산게 바로 이 몸이란 말이야"


"끄응... 어제 처음 만났을때만 해도 서먹한 분위기 같아보였는데"


"에라이 병신아, 그러니깐 니가 안되는거야"
"겉을 보지말고 속을 보라고, 속을"

돈을 따서 기뻐진 그는, 지오를 한참동안 놀려댄 후 막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말을 걸었다.

"야, 막내, 니 애인 사귀여 본 적 있냐?"

"없습니다!"

"새끼가, 누가 삽질 그만하래?"

"죄송합니다!"


대답하기 위해 멈춰졌던 그의 손이 다시 분주히 움직여대기 시작했다.

"막내! 니 동정이지?"


"맞습니다!"

"꼬추달려있는거 맞냐?"


"죄송합니다!"


"새끼 어리바리한게 여자 맛을 못봐서 그런거였구만"
"이번 작전 끝나고 형이라 같이 매음굴 가자! 가서 니가 진정한 남자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지"
"자고로 사내란 여자를 품어봐야지 비로소 남자가 되는 법이라구"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인줄 알아, 이런 기회 흔치 않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묵묵히 고블린 시체를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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