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2화. 삼파전
< -- 59. 삼파전 -- >
점점 걸을수록 날은 어두워져갔고, 다시 되돌아가기에도 이미 늦어버렸다. 한참을 갔는데도 랄라가 말한 피냄새의 행방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깊게 들어갈수록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랄라 씨, 정말로 피냄새를 맡은거 맞나요?"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만 끄덕일 뿐 일절 입을 떼지 않았다.
(꼬리를 만지면 입을 열지 않을까?)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될까요?"
뒤를 돌아보니 유하연은 얼굴에 땀이 범벅인 된 채로 가쁜 숨을 물아쉬고 있었다.
"조금 쉬었다 가는게 좋을 것 같은데, 랄라 씨는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녀의 끄덕임과 함께 어제와 똑같이 커다란 나무구멍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하아..... 힘들구만"
경계수색을 하면서 강행군을 하니 심적으로 피로가 몰려왔다. 몸이야 이보다 더한 피로도를 겪어왔으니 괜찮았지만, 설마 이대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채 다시 돌아가게 될 경우를 생각하니 몸보다는 마음이 불편했다.
피로에 찌든 눈으로 그녀들을 쳐다보니 랄라는 바닥에 옆으로 드러누워있었고, 유하연은 수통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랄라 씨, 출발하면 깨워드리겠습니다"
자상한 마음을 담아 말을 건냈으나 이번에는 끄덕임조차 없었다. 대신 그녀의 흔들거리던 꼬리가 바닥에 추욱 늘어졌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아무래도 단단히 미움털이 박혀버렸나 보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싸움으로까지 번질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서야 생각이 들었는데, 그녀는 내가 자신의 꼬리를 쳐다보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껴서 그런 식으로 행동했던 것일테다.
유하연의 말대로 만약 그녀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제 일은 그녀에게 큰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오늘따라 그녀의 어깨가 작아보였다. 힘이 쎈 것뿐이지 그녀의 체형은 나처럼 우락부락한 체형이 아닌 가녀린 체형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다시 한 번 사과해볼까?)
"랄라 씨 어젯 밤 일은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
"랄라 씨, 잡니까?"
그녀의 등너머로 새액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서는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이러고 있으니깐 착잡했던 마음이 좀 가라앉는게 느껴졌다.
(될 대로 되라지)
"......저기..... 잠시 밖에 좀 나갔다 와도 될까요...?"
눈을 감고 있던 도중 유하연의 소심한 목소리에 눈을 뜨고서는, 그녀를 쳐다봤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모습이 생리현상이 왔나보다.
"갔다오세요, 괴물들이 나타날 수 있으니 멀리 가시지는 말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재빨리 밖으로 나가버렸다.
(많이 급했나 보네)
다시 눈을 감으려던 그때 불현듯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고보니 용사를 죽이라는 반디트의 의뢰가 떠올랐고, 지금이 바로 최적의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랄라는 자고 있고, 유하연은 볼일보러 여기서 멀리 간 상황이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녀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물 탓에 이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볼일을 보고 있을 것이다.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지)
비아데나르의 발자국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면서 정작 그녀의 발자국은 바스라진 나뭇잎과 흙바닥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이게 비아데나르의 것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것은 내가 이제 죽이려고 하는 유하연의 것이다.
발자국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는 그녀가 볼일을 다 본것인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었다.
검집에서 검을 살짝 뺀 후 그녀를 쳐다봤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는 자신이 볼일 본 장소를 흙으로 덮고 있었다. 발로 바닥을 긁을때마다 다량의 흙이 그 장소에 덮어져갔다.
(죽여야 돼....... 죽여야지만 사랑하는 아내들을 다시 볼 수 있어, 결혼식도 올릴 수 있고 말이야)
(애초에 반디트한테 들었을때 부터 그녀는 나한테 죽을 운명이었던 거야, 신경쓰지말자)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발걸음을 뗄려고 했지만 쉽사리 떼어지지가 않았다. 지금 발걸음을 떼고 그녀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아니 반드시 죽여야 된다.
검 손잡이를 잡았던 손이 덜덜덜 떨려왔고,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고.레오 이 새끼야, 저 여자애는 너랑 똑같은 지구인임은 물론이거니와 너하고 비슷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눈 딱 감고 죽이면 그뿐이야)
(고.레오, 커즐린 때하고는 달라, 너는 이번에 어떤 저주도 걸리지 않은 채로 저 아무 잘못 없는 여자를 죽여야만 한단 말이야)
(너가 지금 하게 될 행동은 살인마하고 진배가 없다고!)
숨이 턱 막혀왔다. 이 세상에 오직 그녀와 나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적갈등이 심하게 몰려왔다. 결국 검을 집어넣고 나무에 기대어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녀가 내 손에 죽을 이유같은건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죽인 놈들은 죽어도 싼 개새끼들 뿐이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인건 커즐린 때 말고는 한 번도 없었다.
반디트 그 개새끼랑 엮이면 꼭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 동메달이고 나발이고 의뢰를 받는게 아니었는데...
다시 검을 살짝 뽑았다.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어차피 내가 죽이지 않아도 그녀는 반드시 죽게된다. 그러니 나는 살고 그녀가 죽는게 훨씬 수지타산이 맞았다. 그런거다.
다 덮은 그녀는 로브 끝자락을 탁탁 털은 후에 옆 나무에 쭈그리고 앉아 인형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예의 그 인형술을 통해서 말이다. 곰인형은 아장아장 걸으며 그녀에게 안겨들었고, 그녀는 인형을 꽉 안아줬다. 달빛에 비춰진 유하연의 얼굴은 기뻐보이면서도 어딘가 외로워 보였다.
(눈 딱 한 번감고 휘두르면 모든게 끝나 있을 거야)
결심을 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그 순간, 앞 숲속에서 왠 흉갑을 착용한 남성이 로브를 뒤집어 쓴 정체불명의 사람과 검을 맞부딪힌 채 튀어나왔다. 벗겨진 후드로 드러난 그의 민머리는 달빛을 받아서 그런지 더욱 눈에 띄었다.
갑자기 벌어진 돌발상황에 나는 검을 빼든 채로 상황을 주시했다. 민머리는 로브 차림의 사람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유하연은 그런 그들을 보며 움직이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저 새끼들은 뭐야? 모험가는 아닌 것 같고...)
숙영지에서 저런 차림의 모험가를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검은색의 흉갑이라니... 마치 성당기사의 갑옷색과 똑같았다.
(설마! 비아데나르인가!!)
비아데나르는 전신을 칠흑색의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자들로 새해행사때 몇 번 본적이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들은 민머리라고 했었다.
(저 녀석이 비아데나르면 로브를 쓴 놈은 모험가가 틀림없어, 합세해서 놈을 생포해야겠다)
검을 치켜든 채 재빠르게 달려가 맞부딪혔다. 그는 내 등장에 적잖이 당황한 것인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방어자세를 취했다.
"누구지?"
그와 대치중이던 사람이 여성의 목소리를 내면서 물어왔다. 갸름한 얼굴에 날렵한 눈매를 한 그녀는 나를 경계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같은 모험가입니다"
"모험가?"
"너도 한패구나!!"
갑자기 그녀의 검이 내쪽으로 향했다.
(뭐야! 이 여자가 비아데나르였던거냐?!!)
"씨발..... 너 누구야?"
"너희들을 죽이려 하는 사람"
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 내게 검을 휘둘렀다. 휘둘러진 검은 내 가슴팍을 향해 날라왔다. 검으로 가까스로 막았지만 연속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현란한 검술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검은 바닥에 나뒹굴어졌고, 엉덩이는 땅바닥에 닿은 채로 얼굴은 그녀를 향했다.
(역시 비아데나르인가... 존나 강하네)
"죽어라!"
그녀가 검을 내리찍기 직전에 민머리 남성이 달려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남성은 기습공격으로 당황하고 있는 그녀에게 맹공을 퍼부으며 몰아부쳤다. 나도 재빨리 검을 집어들고서는 그녀에게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검술은 우리 두 사람을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허억ㅡ 허억ㅡ"
"자네 어디 모험가 소속인가?"
남성의 물음에 아침의 조합이라고 말했다. 그는 돌연 내게 검을 휘두르며 견제를 했다.
(이 새끼가?!!)
검을 피한 뒤 재빨리 자세를 고쳐잡고 그와 여성을 번갈아 쳐다봤다. 씨발 그냥 서로서로가 다 적인것 같다.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에게 소리쳤다.
"같은 모험가끼리 이러기 있기냐?!!"
"모험가? 나는 모험가가 아니야, 제국에게 빌빌대는 모험가는 더더욱 아니지"
"씨발 새끼... 너 비아데나르구나?"
"날 잡으러 온거냐? 제국의 똘마니"
두뇌회전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이 놈이 비아데나르면 이 년 정체는 도대체 뭐야?)
(일 존나 꼬여버렸네!)
우리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던 도중 그녀가 다시 난입을 하면서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한 죽음의 무도였다.
그녀가 남성을 몰아부치고 있으면 나는 그녀를 공격했고, 그녀가 내게 반격을 가하고 있으면 남성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가 몰려왔고, 이마에서 흐르는 땀은 눈에 스며들어왔다.
나, 그, 그녀는 서로 숨을 껄떡인 채 노려보았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 중에서도 내 손이 가장 많이 떨려왔다. 아무래도 이들 중에서 내가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으니, 죽게 된다면 나부터 죽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한 놈만 패야겠어, 이대로 있다간 나부터 뒤질 가능성이 크다)
"야 너, 나랑 합세해서 이 새끼 좀 기절시키자"
첫 번째 권능을 씀으로써 그녀는 내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인 후 나와 함께 그에게 돌진했다.
"이 새끼들이 다구리를!!!"
우리들의 갑작스러운 동맹에 그는 고함을 질러대며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던 그에게 이번 공격은 막기가 버거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녀에 의해 손에 쥔 검을 떨궜고, 나는 이 틈을 노려 그의 배에 검 손잡이를 꽂아넣었다. 헛숨을 토해낸 그는 바닥에 무릎을 끓었다. 그의 관자놀이에 다시 손잡이를 꽂아넣어 기절시키는데 성공했다.
남은건 그녀 한 명뿐이다.
"뒤돌아 줄 수 있어?"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르면서, 그녀는 내게 등을 보여준채로 섰다. 이 년만 기절시키면 상황종료다.
"끝이ㅡ"
"안돼요!!!!"
유하연이 내 앞에 서더니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그녀는 눈물 젖은 눈으로 날 쳐다보며 애원했다.
"안돼요, 죽이지 말아주세요"
그녀가 앞에 있는 지금이 죽이기 좋은 기회다. 침을 꿀꺽 삼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눈 딱 한 번 감고 휘두르는거야)
검을 고쳐쥐고서는 앞을 향해 치켜들었다. 그녀는 내 행동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채 다리를 사시나무 떨듯이 떨어댔다. 아니... 그녀는 내 행동이 아니라 내 눈빛을 보고서는 겁을 먹은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 눈빛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건대 필시 그리 좋은 눈빛은 아닐것이다.
(씨발 하라고!!)
검을 위로 치켜들어올리고서는 그대로 베려고 하는 그 순간, 옆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야?"
멈추고 고개를 돌리니 랄라가 무표정을 유지한 채 서 있었다.
(젠장...)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난감해하던 그때 등을 보인 여성이 갑작스럽게 그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모험가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