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6화. 쓸모 없는 용사
< -- 51. 쓸모 없는 용사 -- >
"용사를 죽이라니 그게 무슨...?"
반디트는 투구를 닦던 천을 내려놓고서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데르트 제국에서 용사를 소환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겠지?"
3년 전, 리베왕국에서 용사소환이 성공함에 따라 다른 나라들도 미친듯이 용사소환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데르트 제국 또한 마찬가지로 군사력 증강과 방벽 수호에 보탬이 되고자 리베왕국에게 압박을 가해 용사소환에 관한 기술들을 터득한 뒤, 용사들을 주구장창 뽑아댔다. 하지만 결과는 대 실패였고, 소환된 자들은 그 즉시 몸이 터져나가거나 사지가 잘려져나가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용사소환은 매우 성공률이 희박하여 지금까지 수십 차례 정도 이루어졌지만, 성공한 경우는 페르디난드를 포함한 불과 몇 명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제국의 발톱이라 불리우는 '아레미안 마니우스'로 지금 데르트 방벽에서 맹활약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우리 데르트 제국에 유일한 용사이자 제국민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마니우스... 근데 사실은 그 자말고 또 다른 용사가 있어"
"바로 '유하연'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년이지"
(유하연? 나랑 같은 한국 사람인데...)
"그 유하연이라는 용사를 죽이라는 소리군요"
"맞아"
그의 말에 입안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이름이 안알려진걸 보면 제국내에서 철저히 숨기고 있다는 소리인데, 그런 용사를 죽이라고 시키는걸 보면 필시 모종의 이유가 있을것이다. 이런 뒤가 께름칙한 일은 맡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
"혹시 그 용사가 뭔가 잘못이라도 저지른겁니까?"
"아니... 잘못은 없어, 그저 도움이 안되니깐 죽이려는거야"
"용사는 마왕에게 독약과도 같은 존재라고 들었습니다만, 왜 도움이 안되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용사들이 가진 고유 능력에 비해 그년이 가진 능력이 쓰레기이기 때문이지"
그는 그 말을 한 후 서랍에서 인형을 꺼내고서는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년의 능력은 이 솜인형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능력이야, 광대들이 즐겨하는 인형극하고 별반 다를게 없지"
"이런 년을 전장에 내보냈다가는 제국의 위상을 크게 실추시킨단 말이지"
(인형술사인가...)
"그래도 그녀의 능력은 확실히 저희 세계의 능력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국은 광대놀음과도 같은 능력을 원하는게 아니라 전장에서 검을 맞부딪히며 싸우는 전사를 필요로 한다고"
"물론 그년이 전설급 주문을 구사한다면 상관없지만 인형극이라니... 전장에 내보냈다가는 제국의 위상을 크게 실추시킴은 물론, 같은 용사인 아레미안의 자질을 의심받을 여지가 있어"
"차라리 네크로맨서를 용사로 삼는게 더 나을 정도라고"
확실히 인형술사보다는, 다양한 저주 주문에 뼈만 있다면 스켈레톤들을 창조할 수 있는 네크로맨서가 더 효율성이 좋다. 생각에 잠겨있는 내게 그가 솜인형을 바닥에 내던지면서 물어왔다.
"그래서 할텐가?"
(빌어먹을 새끼... 그런 기밀을 말해놓고 '할텐가?' 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할 수 밖에 없잖아)
"입막음만 없다면 하겠습니다"
"입막음은 없어, 내 장담하지"
"'에흐리스'께서도 윤허하신 일인데다 수뇌부 이외에는 그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어, 게다가 이 일의 책임자는 나야, 한 마디로 자네와 나만의 무덤까지 가지고가야 할 비밀인 셈이지"
'에흐리스'는 신성하고 존귀한 자라는 뜻인데, 황제를 존칭할 때 부르는 말로서 그 지위가 대천사와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흐리스의 자녀들을 존칭할 때 남자는 '혼라리스'로 여자는 '임라리스'로 지칭하는데, 신성하고 존귀한 자의 씨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처형하면 되는일 아닙니까?'
"그리고 애초에 그런 중차대한 일을 암살조직한테 맡기지 않고, 왜 저한테 맡기시는 겁니까?"
"우리 마음 약하신 '임라리스'께서 극구 반대하시니 제국내에서 처형하는건 무리야, 그러니 임무 도중 전사했다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는 손톱을 들여다보고서는 덤덤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암살조직은 일을 시키면 뒤를 캐려하니깐 안돼, 병사들한테 맡기는 것은 더더욱 안되고 말야. 그러니 믿을 만한 모험가한테 일을 맡기는게 제격 아니겠는가? 자네하고 나는 보통 인연이 아니니깐 말이야"
(확실히 보통인연이 아니긴 하지, 개새끼 같은 놈)
"그녀는 현재 여기 있습니까?"
"용사 신분에서 모험가 신분으로 탈바꿈 시켜놨지, 수색임무 도중 아무도 모르게 죽여. 자네한테는 쉬운 일이겠지?"
"돈만 두둑히 챙겨주십쇼"
"돈 걱정은 하지말라고, 집 한채 살 정도 값은 주지. 대신 비밀은 무덤에서 몸이 썩어문드러질 때까지 지켜야 할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집 한채 살 정도 값을 준다면 신혼집 마련은 문제없다. 오래간만에 칼날 좀 갈아갸겠다.
-
천막을 나가니 랄라는 병사들의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서 있었다. 우리들을 데려온 병사는 숙소로 안내하겠다면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저기 묶여있는 년놈들은 누굽니까?"
걸어가던 도중 맞은편 넓은 한복판에 말뚝에 묶어져있는 남녀 한쌍이 있었다. 그들은 온 몸에 피멍이 들었고 바로 아랫바닥에다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간통을 저지른 남녀들이다"
"이곳에 왜 그런 년놈들이 있는겁니까?"
"다리오 백부장의 간통을 저지른 아내와 그 내연남으로 저 년놈들 이외에도 몇 명 더있는데, 그 년놈들은 우리 처형자 군단의 전통 의식을 위한 제물로 삼기 위해서지"
"아하~ 새해마다 하는 액막이 행사 비슷한 거군요"
"맞아, 기왕 말한 김에 한 번 하고오라고, 돈은 안받으니깐 말이야"
"참 여자 얼굴은 때리지 마, 다리오가 얼굴만은 망가뜨리지 말라고 했거든"
부정을 저지른 남녀를 때리면은 아르베 대천사가 보답으로, 재액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매년 새해마다 아르베 교단은 헌금을 한 사람들의 한해서 이런 행위를 시켜주곤 한다. 안그래도 이번 임무에서 몸 다치지 않고 아내들 곁에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대천사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랄라 씨는 안하십니까?"
"저딴 더러운 걸 어떻게 만져?!!"
아까 전의 일로 아직까지 분이 풀리지 않은 것인지 그녀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
"누구부터 때리지?"
각각 말뚝에 묶여있는 남녀 한쌍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제일 먼저 남자를 때리기로 했다. 남자는 미약하게나마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아르베 대천사님한테 들릴 정도로 크게 쳐볼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파각ㅡ!
타격음이 크게 들림과 동시에 재빨리 마음속으로 기도드렸다.
(아르베 대천사님, 이번 임무에서 제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기도를 마치고 연이어 여자의 배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옆에 있던 남자보다는 타격음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어찌됐든지간에 기도드렸다.
(메리온 교국에 있을 제 아내들이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참고로 딴 놈들이 얼씬도 못하게끔 막아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휴우~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네"
개운한 마음으로 때렸던 년놈들을 쳐다보니 바닥에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분명 아르베 대천사님도 이 모습을 보시면서 내 정성에 감복해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끝났으면 빨리 가자고"
병사의 재촉에 나는 그에게 달려가, 다시 숙소로 걸어갔다.
-
"여기다"
병사가 멈춘 곳 앞에 놓여진 숙소는 다른 천막과는 다르게 색이라든가 형태가 달랐다. 대부분 짙은 밤색 계열의 대형 천막인 반면 앞에 있는 숙소는 색이 다 빠진 밤색의 자그마한 천막이었다. 딱 2명정도는 들어갈 정도의 크기다.
"여기가 저희 숙소입니까?"
"불만이라도 있나?"
"그럴리가요, 아주 좋습니다"
귀찮게 텐트 칠 필요가 없어서 너무 좋았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이 미친 년이랑 같이 몸을 부대껴서 자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설마 이 인용 텐트는 아니겠지?"
"왜? 여관방이라도 기대한건가?"
그녀와 병사가 서로 눈빛싸움을 하고 있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그에게 질문을 걸었다.
"저희들에게 배정된 조는 어디입니까?"
"2대대 1백인대에 편재됐다, 아까말한 다리오 백부장이 지휘하는 부대지"
"오늘하고 내일 시간 날때마다 들러서 친분 좀 쌓으라고"
"그쪽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왜?"
"여기까지 안내해주셨는데, 성함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2대대 4백인대의 백부장 쿠리오다"
그는 이름을 밝히고서는 바쁜일이라도 있는것마냥 뒤도 안돌아보고 돌아갔다. 같은 직책이여서 아까전에 백부장 이름을 함부로 부른거였구만.
"랄라 씨 어디서 주무실겁니까, 왼편? 오른편?"
"젠장!!"
그녀는 매고 있던 군장을 집어팽개치고서는 어딘가로 가버렸다.
(씨발년이 성질머리 하고는)
내 군장과 그녀가 내팽개친 군장을 천막 옆에 세워놓고서는,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장작도 옆에 있으니 불피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게 모닥불을 피워놓고서는, 한참동안을 생각에 잠긴 채 불을 쳐다보았다.
(유하연이라... 반디트 말로는 모험가 신분으로 왔다고 했었지)
주변을 둘러보니 다 남성 모험가들 밖에 없었으며 여성 모험가는 저 멀리 호수 근처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는 미친 년이외에는 없었다.
(모험가 신분이면 가명을 쓰고 있을텐데... 씨발! 그걸 안물어봤네)
(임무 도중에 죽이라고 한걸보면 같은 조에 소속되어 있겠지 뭐)
생각을 마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리오 백부장을 만나기 위해 길을 물어봤다. 수색이 시작되기 전의 남는 시간을 활용해서 미리미리 친분을 쌓아놔야 임무수행에 있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군대는 자고로 줄을 잘 타야 생활이 편리한 법이다.
수소문끝에 겨우겨우 당도한 천막 앞에는 두 명의 병사들이 부동자세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군기가 바짝 든 것을 보니 제국의 군사력이 왜 최강인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십니까?"
병사 한 명이 물어보자 나는 신원을 밝혔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간 병사에게서 들어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후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구석에는 위에 네 개의 발톱이 놓여진 독수리 투구가 걸려있는 갑옷거치대와 깨끗이 손질된 무기들,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고 그 앞에는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내게 검은색 짧은 머리칼에 까칠한 수염이 난 중년남성이 물어왔다. 보아하니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아보였다.
"자네가 내 백인대에 편성된 모험가로구만"
"아침의 모험가 조합 고.레오라고 합니다"
고개를 약간 숙인 내게 그는 앞의 놓인 의자에 앉으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앉자마자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요 앞의 말뚝에 묶여진 년놈들을 보았는가?"
"봤습니다, 듣기로는...... 백부장님의 아내분이라고 하던데..."
"맞아! 맞아! 내 아내 였었지, 지금은 그저 창년일뿐이지만 말이야"
"그래서 때리고 왔나? 설마 그년 얼굴을 친 건 아니겠지?"
그의 희번뜩 떠진 초록색 눈동자를 보고서는 얼른 답했다.
"남자놈만 얼굴을 쳤을 뿐 일절 손 하나 대지않았습니다"
"좋아, 좋아! 그년의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얼굴을 절대로 망가뜨리면 안된다고............ 고.레오, 자네는 배우자가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생각이고 자시고간에 부정을 저지른 자들은 대천사 아르베님의 이름으로 모두 죽여야 됩니다."
"만약에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있다면?"
"그건.......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내 답변에 그는 웃음을 크게 터뜨리더니 앞 접시에 놓인 사과를 집어들고서는,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그리고는 과육이 섞인 침을 튀겨가며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이지, 노예시장에 내다 팔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네"
"예?"
"부정을 저지른 자와 사랑을 나누면서 생긴 아이가 아닌가? 아르베 교단의 교리에는 이런 말이 있지, 부정을 저지른 자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을 해서도 안되며, 평생을 죄인처럼 살면서 속죄해야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죄인처럼 살라고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군요"
"그래 맞아, 이해가 빠르군"
말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어딘가 모르게 황폐하고 슬픔에 젖은 눈빛을 띠고 있었다. 필시 그는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였을 것이다. 이제는 모든게 무너져 내렸지만 말이다.
"재혼하실 생각은 있으십니까?"
그는 눈을 꿈벅꿈벅 뜨기만 할 뿐 아무말 없이 잔에 포도주를 따르더니, 이윽고 쭈욱 들이키고나서야 입을 열었다.
"재혼이라... 이런 일을 겪고나니깐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정을 가진다는게 무서워졌어"
"내가 아이들을 노예시장에 내다판게 옳은 행동이었는지도 확신이 잘 서질 않아... 수도원에 보내는 선택지도 있었을텐데..."
비워진 그의 술잔에 나는 묵묵히 술을 따라주었다. 이럴때에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푸념을 들어주는게 답이다.
천막 안에까지 어스름이 몰려오자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은 채, 곯아떨어진 그를 내버려두고서는 밖으로 나왔다. 교대했는지 낮에 봤던 그 병사가 아니었다. 병사는 내게 무뚝뚝하게 말을 건냈다.
"백부장님 신세한탄 들어주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예, 뭐... 다리오 백부장님께서는 꽤나 애처가여셨던 모양입니다"
"틈만 날때마다 저희들한테 아내와 딸들 자랑을 길게 늘어놓으시곤 했죠"
그 말을 들으니 불현듯 마음 한 켠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릴리와 루나도 내가 없는 사이에 그의 아내처럼 부정을 저지르면 어쩌나하고... 그녀들은 그녀들이지 절대로 그의 아내처럼 부정을 저지르는 여자가 아니라는걸 알지만서도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다.
(빌어먹을... 친분 쌓으려 왔다가 괜히 기분만 잡쳐버렸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부정 핀 년놈들 때문이다.
(존나 패고 와야지)
그래야지 기분이 좀 풀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