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36화. 좌절과 희망
< -- 47. 좌절과 희망 -- >
감옥에 갇혔을 때 마야와의 만남은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마야가 있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았었고, 여기서 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야는 내가 탈출했던 것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래서 아직까지 마야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소녀의 얼굴이 기억나지도 않는다. 마치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손가락 마디 뼈와 손톱이 있으니 존재는 했을것이다.
하피를 만났고, 구해줬다. 그리고 델타는 나를 구해줬다. 하지만 나는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녀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지극정성으로 대해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왔고, 소녀는 내게 은반지와 얼굴의 난 긴 흉터를 주었는데,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녀를 버렸다. 흉터는 왜 새겨줬는지 아직까지 이해가 안간다.
멜레나를 만났다. 어린 소녀는 최선을 다해서 내 목숨을 살려줬다. 그래서 나 또한 최선을 다해서 소녀를 그 지옥과도 같은 전투지에서 구출해줬다. 지하동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함께 리치도 물리쳤다. 그리고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올해로 15살이니 만나러 갈 수 있을텐데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연으로만 여기며 만나러 가질 않았다.
레인번 반디트를 만났다. 그 새끼는 정말이지 미친 새끼다. 하지만 내가 커즐린의 저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자책하고 있을때, 많은 도움이 된 사람이다. 그자에게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그냥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본받았다. 난 잘못이 없다고, 다 커즐린의 저주때문이라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겠는가라는 식의 생각도 같이 했다. 그자들은 커즐린의 힘을 강화시키는 놈들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옳았고, 때문에 나는 살아야만 했다.
그가 성문에 자신을 커즐린에게 팔아넘긴 여성의 머리를 효수했을때, 나는 항상 의뢰를 마치고 돌아오면,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과연 이자는 죽어 마땅한 년인가, 아님 그냥 커즐린에게 놀아난 가여운 년인가. 결국 나는 이 년은 죽어 마땅한 년이라고 결론을 도출했다. 그래야지 내 학살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괴물에게 도움을 준 년은 죽어야 한다.
지구에서도 그렇고 이세계에서도 그렇고, 나는 살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으려고 별의별 짓을 다했다. 그 결과 나는 완벽히 모험가 생활에 적응했다. 모든 것에 무관심해졌다. 옆에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눈이 미친듯이 깜박거리고 있다. 내가 앉아있는 이 공간에 그녀의, 릴리의 시체가 있다. 이 미친 상황이, 지금의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고 있다.
테라스가, 루카스가, 테스와 미세가, 조라가 나를 위로해줬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지금 내가 왜 이세계에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모험가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릴리를 구하려 한건지 모르겠다. 그게 정말 모르겠다.
(씨발... 누가 좀 알려주라고)
바닥에 물이 떨어졌다. 눈을 만져보니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모험가 일을 한 뒤로 상처와 공포로 인한 눈물은 흘린 적이 있지만, 누군가가 죽어서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죽지 않았으니깐 된거라고.
내 몸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위를 올려다봤다. 조라가 나를 슬픈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그녀는, 내 얼굴을 자신의 가슴팍에 끌어안아주었다. 늘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싶다, 안기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런 상황에서 안기니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왔던건지 의심이 들었다. 혹시 잘못 살아왔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된다면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삶은 전부 부정당하는데, 이 일을 어떡하면 좋지?
누군가가 나한테 잘 살아왔다고, 너는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그러니깐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제발 그래줬으면 좋겠다.
덜커덩ㅡ!
그 소리에 나는 그녀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고서는, 소리가 들린 마룻 바닥을 쳐다봤다.
덜커덩ㅡ!
마룻 바닥의 한 부위가 들썩였다. 재빨리 뛰어가 확인해보니 그 나무판만 틈이 많이 벌어져 있었다. 다시 들썩거리자 나는 그 나무판을 들쳐냈다. 그 속에는 릴리가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으로, 나무판을 들쳐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릴리 씨?"
그녀는 옷 한벌 입지 않은 알몸상태로 갓난아기를 꼬옥 끌어안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의 옷을 포대기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목재집의 바닥두께가 상당했다. 지면과의 거리가 계단 5칸 정도의 높이는 되었다. 손을 짚어야지 들어갈 수 있는 높이였다.
서둘러 주변에 있던 놈들에게 나무판을 떼보라 했다. 역시나 바닥은 지하공간이었다. 수많은 남녀노소가 알몸으로 쭈그린 채 앉아있었다.
나는 얼른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이내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대로 그녀를 지상으로 끄집어냈다. 그녀는 밖으로 나온 뒤, 손으로 중요부위를 가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입고 있던 서코트를 벗어서 걸쳐주었다. 걸쳐준 뒤에는 껴안았다.
"고,고.레오 씨?!"
그녀는 내 갑작스러운 껴안음에 당황했는지, 놀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를 더 꽉 껴안았다. 그녀의 왜소한 체구가 내 품에서 따스하게 느껴졌다. 앞으로는 절대, 이 여자를 위험에 처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 여자로 삼아서 내가 평생 지켜줄 것이다.
그녀를 안으니깐, 내가 그녀에 대해 느꼈던 의문점들이 마침내 풀렸다. 나는 그녀에게 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놀림받고 외로웠던 지구에서의 내 모습과 그런 삶속에서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그녀에게서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알게모르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내 삶 전반에 걸쳐서 괴롭혔던 외로움을 없애주고 사랑을 주고 싶었다.
나는 한참 동안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안전하게 감싸주었다. 그녀는 내 품속에서 가만히 안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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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다행입니다, 릴리 씨가 살아있어서요"
루카스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던, 내게 말을 건넸다. 그의 말에 나는 덤덤히 답해주었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형님 답지 않게 왠 진지한 표정을 짓고 계신겁니까?"
"새끼는 꼭 분위기 흐트리는데 뭐 있다니깐"
"사람이 위로를 해줘도 꼭 이러신다니깐!"
그는 툴툴대며 조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씨발 저 새끼가 조이한테 고백 안한다에 내 손모가지를 건다.
"후우ㅡ 존나 피곤하네"
"야, 마셔라"
갑자기 얼굴에 가죽주머니가 날라왔다. 누가 던진건가 하고 보니 미세가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내 얼굴 위에 떨어진 가죽주머니를 집어들고서는 마시기 시작했다.
"마시라고 해놓고서는 지가 다 쳐먹고 앉았네?"
"주인이 먼저 입을 댄 다음에 주는게 이치에 맞는 것 같아서"
그는 입을 소매로 스윽 닦은 뒤, 가죽주머니를 내게 건넸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은 뒤, 가죽 주머니에 든 포도주를 들이켰다. 포도주의 달콤쌉싸름한 맛이 혀에서 느껴지면서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더니, 이내 화끈한 열기를 뿜어냈다.
"캬아~! 좋다! 역시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포도주가 최고지!"
"크크크크크, 어느새 모험가가 다됐군"
"그러게 말이다, 모험가 조합에 등록한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다.
"저 릴리라는 년은 이제 어떡해 할 셈이냐? 니 여자로 삼을거냐?"
"그래, 그러니깐 앞으로 이년 저년 하지마라"
"드디어 네놈도 동정을 떼겠군"
그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보이며 음흉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지도 않았는데, 벌써 축배를 들 수는 없지"
(루나의 일도 있고 말이야... 이참에 여관에 돌아가고나면 루나에게 내 마음을 확실히 말해줘야겠어)
"이보게 고.레오!! 테라스 성당기사가 널 찾는군!!"
테스의 외침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테라스가 서 있는 휘파람꾼 오크의 시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도착하니깐 그는 내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이 괴물을 당신이 쓰러뜨리신 겁니까?"
(이런 젠장... 뭐라 말하지?)
동메달레스트도 잡기 어려운 휘파람꾼 오크를 철동전이 잡았으니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게 말이죠, 그러니깐... 그 뭐냐..."
(내가 권능을 사용해서 잡았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으니 무슨 말로 얼버무려야 되지?)
"정수리에 구멍이 뜷린 걸 보면, 필시 놈이 엎어진 틈을 노려 검을 찔러넣은 거겠군"
"맞습니다! 이 새끼가 갑자기 넘어진 틈을 노려 죽였습니다"
옆에 있던 미세가 한 말에 얹혀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것인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이상하군요, 이 오크는 신경에 매우 예민하다고 알고있습니다, 예민한만큼 지형지물에 민감하게 반응할터인데"
병신새끼가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지, 하여튼간 기사 이 씨발 새끼들은 존나 콧대가 높다. 철동전인 내가 죽인것이 그렇게 아니꼽나?
"그럼, 저는 이만 릴리한테 가보겠습니다"
그가 더 꼬치꼬치 캐묻기 전에, 나는 황급히 릴리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 사실 릴리가 잘 치유받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때, 그녀는 조라에 의해 상처가 난 부분에 힐을 받고 있었다. 아직 내가 벗어준 서코트를 입고 있었다.
"릴리 씨, 괜찮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옷을 단단히 여미기 시작했다. 알몸에 달랑 서코트만 입고 있는것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야영지에 가면 제가 담요 하나 드릴테니, 괜찮다면 그거라도 걸치시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뭐랄까... 그녀에 대한 감정을 깨닫자마자,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할지 모르겠다. 지금 머릿속에 든 생각이라고는,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는 것과 부드러운 조갯살에 내 자지를 밀어넣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씨발...... 모쏠 동정 아다새끼는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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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걸을 힘 조차 없는 릴리를 내 등에 업은 채 야영지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내 목에 가녀린 팔을 두르고 있었다. 그렇게 걸어가던 도중, 그녀가 내게 소심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조라 수녀님한테 들었어요, 저를 구할려고 은화 80닢의 거금을 지불하셨다고..."
"제가 모아둔 돈도 있고, 어차피 그 돈은 릴리 씨를 버린 이알이라는 놈의 돈입니다"
내 입에서 이알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녀는 몸을 흠칫 떨었다. 아무래도 이알 이 새끼가 자신을 버렸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나 보다. 나는 그녀에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이알 그 망할 새끼가 릴리 씨를... 오크들한테 미끼로 던져줬다고 들었습니다"
내 목에 두른, 그녀의 팔이 미친듯이 떨려왔다. 그게 답변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침묵한 끝에 입을 열고서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블린 부락 토벌의 미끼역할로 갔었어요... 그런데 정작 가보니깐 고블린 부락이 아니라 오크 부락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안하겠다고 하니깐 그 사람들이... 그 망할 새끼들이!"
내 등에 그녀의 눈물이 전해졌다.
"흐흑...흐흐흑..... 위협하면서 억지로 시켰어요, 안하면 겁탈하겠다고.. 그래서, 그래서 무서운 마음에 했는데...... 상황이 악화되니깐.. 흐끅.. 저를 버리고 갔어요"
"살려달라고 했는데... 히끅... 제발 도와달라고 외쳐댔는데도..."
"그만 말하셔도 됩니다"
나는 그 말만을 하고서는, 그 이후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지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야영지에 도착해보니 동굴은 무너져있었고, 그 옆에는 더크와 베르크가 오크 족장의 시체를 배게로 삼은 채 누워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수녀인 보노와 주문술사인 비나리 쌍둥이 자매가 서 있었다.
동굴을 무너뜨려 놈들을 처리한다는 작전이 성공했나보다. 동굴의 무너진 잔해 속에는 불에 그을려진 오크의 시체와 쿵다닥의 시체가 보였다. 쿵다닥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 꼴이다.
나는 릴리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앉혀놓은 뒤, 담요을 덮여주었다. 그러고나서는 발바닥 모험단에게 걸어갔다.
"더크, 이 자식 목숨줄 한 번 길구만"
내 말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나를 흘깃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모험가 경력만 몇십년째인데,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고 새꺄"
"솔직히 오크놈보다 이 년들한테 뒤질 뻔했지, 조준을 하고 쏘는건지 막 쏘는건지... 크흠"
베르크가 쳐다보고 있는 비나리 조이와 비나리 비안을 보자, 그녀들은 볼이 붉어져 있었다. 그러다 돌연 조이가 입을 열었다.
"쳇ㅡ 안 뒤졌으면 됐지, 그걸 가지고 지랄이야 정말!"
고개를 숙이는 비안과는 반대로 그녀의 언니인 조이는 되려 화를 냈다. 그 모습에 더크는 이마를 손으로 두들겨대며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씨발, 저 년 저거 제발 누가 좀 죽여줘봐봐ㅡ 존나 죽여버리고 싶네?"
"젖비린내 나는 애새끼가 하는 말에 뭘 그리 화를 내나? 어른인 우리가 너그럽게 받아줘야지, 크흠"
"존나 별꼴이야!"
그들의 말에 조이는 성을 내며 루카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루카스는 왜 저런 미친 년을 좋아하는건지 모르겠다. 나 같으면 연신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을 표하는 비안을 좋아할텐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