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34화. 불안
< -- 44. 오크 부락으로 -- >
"좀 쉬었다 갑시다"
부락까지 8마일 정도 남은 상황에서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수녀들을 고려하여 말했다. 하루빨리 오크부락으로 가서 릴리를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무리하게 강행군을 하다가 어디선가 괴물들이 튀어나와 공격해올 경우를 생각해봤을때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휴식이라는 말에 보노는 서 있는 자리 그대로 바닥에 철푸덕 앉더니, 허리춤에 찬 물주머니를 입에 갖다 대었다. 조라 역시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물주머니를 쭈욱 들이키고 있었다. 옆에서 그녀들의 배낭을 대신 매고 있는 테라스 성당기사만이 유일하게 아무 표정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큼지막한 돌바위에 앉아 오크부락이 있을 방향을 노려봤다. 그런 내게 루카스가 찾아와 말을 건넸다.
"형님, 릴리라는 여성분은 형님의 연인 인겁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3년 전 있었던 마야의 일에 대한 속죄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의 말대로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거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어떤 식의 표현이 맞는건지 모르겠다.
불침번때 느꼈던 그녀의 열정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내가 만났던 마야나 멜레나의 모습과 겹쳐져서 보인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호감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의뢰가 끝난 이후에는 그녀를 꽃뱀 취급하며 쌀쌀맞게 굴지 않았던가?
"몰라, 나도 잘 모르겠다"
"형님, 이러니까 형님이 아직까지 애인 하나 없는 동정인겁니다, 좋다면 좋다 싫다면 싫다 딱 정해놔야지 사귀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그 나이가 돼도 동정입니까? 부끄러운 줄 아셔야 됩니다"
"씨발새끼가, 그럼 니는 그걸 너무 잘해서 조이 씨한테 고백도 못하는거냐?"
내 말에 그는 황급히,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서는 조이를 쳐다봤다. 이 새끼 행동을 보아하니 그녀는 이 놈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상황인것 같다. 지도 이런데 감히 어따대고 훈계질인지 원.
"형님, 그건 제가 비밀로 해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내가 소근거리면서 말했잖냐? 왜, 큰소리로 말해줄까?"
그는 입을 벌리려던 나를 황급히 제지하고서는, 애걸복걸 해댔다.
"제발 형님, 죄송했습니다,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동정 새끼를 건드리면 큰 코 다친다고, 알겠지?"
내 말에 그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저 멀리서 수녀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다시 행군을 감행해도 좋을 듯 싶다.
"이제 출발합시다"
앞으로 8마일 지점만 가면 그녀가 잡혀있을 오크부락이 나온다.
-
산등성이에 도착한 우리들은 저 아래에서, 여러개의 조잡한 가죽으로 만든 천막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천막들 주변에는 오크들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댕기고 있었다, 돼지코에다가 눈은 살덩이에 파묻혀있고, 입술이 없어 잇몸을 환히 드러내는 추악한 얼굴을 보니 오크가 맞았다.
"규모가 좀 되는데?"
더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저 목재집 앞에 휘파람꾼 오크가 있는 걸 보면 필시 오크 저주술사도 있겠군"
나는 피부색이 온통 붉은 색에다 눈구멍이 없는 거대한 체구의 오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휘파라꾼 오크는, 오크의 돌연변이종으로써 태어날때부터 눈구멍 없이 태어나 오직 후각과 청각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녀석들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오크들에 비해 온 몸에 신경이 매우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어 침입자의 접근을 휘파람 소리를 내며 알린다. 이런 탓에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휘파람꾼 오크라 불리어지며, 발달된 신경 탓에 오크 저주술사들의 호위병 역할을 맡는다.
"저기 오크 족장 아닌가?"
테스가 가리킨 곳에는 온 몸의 문신을 새기고 있는 큰 체구의 오크가, 자신보다 작은 체구를 가진 다른 오크들을 때리고 있었다. 저 행동을 보아하니 정말 오크족장이 맞는 것 같다.
"오크족장 오크 주문술사, 휘파람꾼 오크까지... 일반오크들의 숫자도 꽤나 많은게 마을 하나를 약탈 할만한 수준의 규모구만, 크흠"
"이정도 규모라면 아무래도 전력을 분산시킨 다음에 공격하는게 좋겠어"
베르크의 말에 미세가 대안을 제시했다.내가 생각해도 무작정 놈들의 부락으로 뛰어가는건 자살행위였다. 놈들의 전력을 나눠야지만 이길 승산이 컸다.
"일단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이만 돌아가서 작전을 짠 뒤, 내일 공격하든가 하세"
테스의 말에 우리들은 서둘러 산등성이를 내려갔다. 내려간 후에는 비탈면에 난 동굴 속에 들어가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야영준비를 하던 도중 더크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쿵다닥이 있는데?! 이 좆같은 새끼들, 여기다 살림살이를 차렸구만!"
그의 말에 가보니 진짜로 동굴 끝에 쿵다닥이 반질반질한 윤기를 가진 돌맹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3년 전에 봤었던 쿵다닥의 모습과 똑같았다.
"3년 전 절벽울타리 동굴 이후로는 처음보는구만, 크흠"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베르크가 놈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본 것이라 감회가 남다른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었다. 나 또한 3년 만에 이 놈들을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쿵다닥은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은데다, 서식지도 깊은 지하동굴에서만 서식한다.
(깊은 지하동굴?)
"이녀석들 뒤에 공간이 더 있는건가?"
"아마도 그렇겠지,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기 하지만 도박은 할 수 없지, 크흠"
"쿵다닥이 뭐에요?"
놈들을 보고 있는 우리들 곁으로 조라와 보노가 다가와 물었다. 그녀들로서는 처음 보는 신기한 놈들이니만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어오는건 당연할 것이다. 나는 그녀들에게 자연의 신비로움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시,신기해요!! 여러개체가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서 생활하는 괴물이 있다니!!"
보노는 큰 눈망울로 자연의 신비로움을 눈동자에 가득 담으면서 말했다. 조라 또한 마찬가지로 놀란 목소리를 내며 내 몸에 달라붙어왔다. 그녀는 항상 나만 보면, 내게 몸을 밀착시키곤 한다. 이성과의 접촉이 부분적으로 허용된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의 접촉은 너무 과하지 않나? 가뜩이나 가슴도 큰 그녀이기에 팔에 부드러운 감촉이 자꾸 닿아 하체가 뻐근했다...
"고.레오 씨는 이 녀석들이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예?!.... 아아, 그... 본 적 있습니다"
(가슴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네)
"정말요? 제게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무,물론이죠"
방방 뛰고 있는 그녀의 웅장한 가슴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한 번 쎄게 움켜쥐어보면 소원이 없겠다)
이성과 본능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내 마음은 모른 채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 -- 45. 불안 -- >
저녁식사를 마친 뒤 우리들은 둥그렇게 둘러 앉아 내일 있을 오크부락 토벌전에 대한 작전을 짜기로 했다. 맨 먼저 내가 오크부락의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부락의 중심에는 커다란 목재집이 있고, 그 주변으로는 스무 개의 가죽 천막이 세워져 있었고, 경비로는 오크 열 마리와 목재집 앞의 휘파람 꾼 오크 한 마리가 서 있는데다..."
나는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고, 이윽고 주변의 지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루카스가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형님, 존나 잘 그리시네요!!"
(당연하지, 내가 지적도 등본을 얼마나 많이 뗐는데, 하다못해 직접 그리기까지 했어, 씨발 그때만 생각하면 토가 나올려 한다)
중앙에는 오크부락을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우리가 서있었던 산등성이와 현재 우리가 야영지로 삼은 동굴을 그렸다. 이렇게 보니 놈들의 부락과 우리가 머무는 동굴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
"놈들의 부락하고 지금 이 동굴하고 길이 평탄하게 쭉 이어져 있구만?"
테스의 말에 미세가 추가적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놈들을 여기로 유인하는 작전도 가능할 것 같아"
"그래, 누군가가 미끼가 돼서 놈들의 절반가량을 이곳으로 끌고 오면 아주 좋을 것 같아"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왔다.
"제비뽑기로 정하자구, 크흠"
베르크는 손에 움켜쥔 여러개의 나무막대기를 내밀었다. 역시 이런 일에는 제비뽑기 이외에 탁월한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 고르라구, 크흠"
그의 말을 시작으로 우리들은 하나 씩 막대기를 뽑았다. 수녀 2명과 금은보화 모험단의 여성 주문술사 2명은 예외이므로 뽑지않았다. 다 뽑은 뒤 결과를 확인해보니 더크와 베르크의 손바닥에 가장 짧은 길이의 나무막대기가 놓여져 있었다.
"이봐! 베르크, 자네하고 나는 천생연분인가봐?"
"재수없는 소리 하지말라고, 크흠"
더크의 너털웃음에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미끼역할은 발바닥 모험단이 당청되었으니 이제 동굴 조와 모험 조로 나누어서 작전을 짜면 될 것이다.
밤이 깊어갔다.
-
"씨발 말번이라니"
불침번 순번에서 말번에 당첨된 나는 우울한 마음으로 취침 준비를 시작했다. 그래도 거지같은 말전번보다는야 낫지만. 그렇게 촛번인 주문술사 비세리 조이만을 남겨둔 채 우리들은 모두 취침에 들어갔다. 내일은 빡셀 예정이므로 일찍 자두어야 한다.
"고.레오 씨... 고.레오 씨"
귀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옆에 조라가 양털 담요 위의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조라 씨, 안자고 뭐하시는 건지...?"
"혹시 잠이 잘 안오시나요?"
방금 전까지 잠들려고 했었지만 이렇게 말하면 그녀가 미안해할까봐 그냥 그렇다고 답했다. 조라는 내 말에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따뜻한 손의 촉감에 나는 당황한 채로 물었다.
"지금 뭐하시고 계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원기 회복'의 주문이에요, 3년 전 저랑 같이 첫의뢰를 했을때 해드렸었는데, 기억나세요?"
"기억납니다만... 왜 굳이 지금 하시는건지?"
"피로를 풀게 해줌으로써 잠이 잘 오시게끔 도와드릴려고요, 이럴게 아니라 제 무릎에 머리를 배고 계시겠어요? 그래야 주문이 더 잘 걸리거든요"
(이 수녀아가씨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지?)
머리로는 이해가 안됐지만 몸은 이해가 됐는지, 빛보다 빠른 속도로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배였다. 그녀의 허벅지는 수녀복으로 막혀져 있었지만 내 뒷통수로는, 그녀의 탄력있는 허벅지가 느껴졌다.
(지상낙원이 따로 없네)
"후후후, 어떠신가요 제 원기회복 주문이?"
"최곱니다"
그녀의 가슴이 얼마나 큰지 얼굴이 보이지를 않았다. 일식 현상마냥 가슴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미쳤다, 서버렸다)
다행히도 양털이 담긴 침낭을 덮고 있기 때문에, 내 우뚝 속은 자지를 그녀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는 주문이 끝나자 이번에는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마야가 쓰다듬어 준 적외에는 누군가가 내 머리를 쓰다듬은 적이 없었던 나로선, 그녀의 이런 행동은 정말이지 뜻밖의 행운이었다.
"릴리 씨는 분명 무사하실거예요, 그러니 편안히 주무세요"
그녀의 미성을 자장가 삼아 나는 이내 잠이 들었다.
-
아침이 밝아오고 오늘 있을 작전을 위해 함정을 설치하고 있던 내게, 조라는 환한 미소를 지여보였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로 나는 그저 어색하게 미소를 흘린 채 애써 그녀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새끼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있는거지?"
"신경 꺼라 새꺄"
더크의 말을 무시하며 나는 서둘러 하던 일을 마무리지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우리들은 다시 산등성이로 올라가 오크 부락을 주시했다. 놈들을 횃불을 들고서는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여성 주문술사들인 조이와 비안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그녀들은 지팡이를 높이 쳐들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들의 지팡이 끝에서 각각 거대한 불덩어리와 돌덩어리가 생겨났다, 그녀의 주문들은 체외에너지를 이용해 물, 불, 흙, 바람의 정령을 불러모은 뒤 그들의 힘을 빌려 주문을 부리는 종류의 것이다. 나는 그녀들에게 공격신호를 내렸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내 신호와 함께 그녀들의 지팡이 끝에 있던 덩어리들에서 자그마한 돌덩이들이 떨어져나가서는, 부락을 향해 날라갔다. 하늘에서 불덩이와 돌덩이가 날라오니 오크들은 혼비백산 하기 시작했고, 이에 오크족장이 괴성을 내지르며 놈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목재집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오크 저주술사는 목재집에서 안전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역시 우리들의 예상이 맞아들어갔다.
"이제 우리들 차례군!"
오크 저주술사가 나오지 않자 더크와 베르크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서둘로 산등성이를 내려가 놈들의 부락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에 대고 조라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저희 보노를 잘 부탁드려요"
보노 수녀는 이 자리에서 없었다. 그 소녀는 지금 우리들이 머물렀던 동굴 근처에서, 소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매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