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27화. 쾨스 호수
릴리가 뛰쳐가자 그레이슨은 한바탕 크게 웃더니 자리에 앉고서는, 메인디쉬인 토끼구이를 발라먹었다. 그는 입술에 기름칠을 묻혀가면서 너털거렸다.
"저런 애새끼 같은 년이 정말 스무 살이라고?"
"그래 씨발새끼야, 니는 나이가 몇인데 어린 여자를 울리는거냐? 참 한심스럽다"
그의 물음에 나는 까칠하게 답하면서 뛰쳐나간 그녀를 걱정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넘쳐났던 그녀로서 이번 일은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남겼을 것이다. 나는 토끼구이의 다리를 하나 잘라내어 그녀가 뛰쳐간 숲속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그가 소리쳤다.
"과감한 고.레오, 다리는 왜 들고가냐?"
"이 참에 릴리 씨한테 점수 좀 따보려 한다, 왜?"
"어린 년이 취향이었냐? 성적취향 한 번 독특하구만"
그의 마지막 말을 무시한 채 나는 숲속에서 쭈그려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토끼다리를 건넸다.
"릴리 씨, 다리 드실래요?"
"... 안 먹어요"
그녀는 내 손에 쥔 노릇노릇한 토끼 다리구이를 한 번 바라보더니 까탈스럽게 대답하고서는, 다시 나뭇가지로 땅바닥을 긁어댔다.
"저 녀석이 한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원래 이 바닥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고.레오 씨는 저 남자가 한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팽개친 그녀는 일어나서는 그대로 자기 텐트로 걸어가더니, 날 한 번 쳐다보고서는 그대로 들어가버렸다.
"다리는 내가 먹어야겠네"
토끼 다리를 입안에 쑤셔넣으며 나는 케이크 모험단이 있는 모닥불로 걸어갔다.
-
"좋았어!"
불침번 순번 정하기에서 촛번에 걸린 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번 불침번에서는 자다가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너무 좋았다.
"에라이!"
말번에 걸린 그레이슨은 뽑은 제비를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투덜투덜댔다. 그러다가 내 다음 번인 릴리의 제비를 쓰윽 쳐다보더니 그녀에게 제안을 했다.
"네크로맨서 씨, 저랑 바꾸시겠습니까?"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모닥불로 걸어가서는 부서져있는 뼈들을 주머니에 주워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에 그는 씨부렁대며 텐트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뼈들을 주숴담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쓸쓸해보여 거들어주기로 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저녁식사때는 죄송했어요, 일부러 가져와주셨는데..."
"뭐 별로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 이 바닥에서 오래 있다보니 모든 일들에 무신경해지더군요"
"부러워요, 저도 고.레오씨처험 모든 일들에 무신경해 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이렇게 상처 입을 일도 없을텐데..."
꼬르륵ㅡ
"혹시 배고프신거... 괜찮으십니까?"
자신의 배에서 소리가 나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뒤돌아서 달려가다 엎어지고 말았다. 엎어지면서 기껏 주머니에 담아둔 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코피를 흘린 채 재빨리 뼈들을 주숴담기 시작했고 나 또한 거들어주었다. 다 주숴담은 뒤 그녀가 텐트쪽으로 달려가려 하자,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같이 밤이나 구워서 먹을까요?"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나를 따라 모닥불 근처에 앉았다. 군장에서 꺼낸 밤들을 모닥불에 던져넣으며 나는, 어색한 상황을 풀어보고자 그녀에게 대화를 신청했다.
"릴리 씨는 메리온 교국에 오신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이틀 전에요... 그 전까지는 데르트 제국의 수도에 있었어요"
"철 동전이신걸 보면 제국수도에서 모험가 일을 하시다가 이쪽으로 전향하신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목에 걸린 자신의 철 동전을 매만지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수도에서 안좋은 일을 겪어서 교국으로 전향한거에요"
(모험가들 사이에서 불화를 겪은건가?)
모험가 조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에 적응하고 융화되어야 비로소 살아갈 수가 있다. 그렇지 못한다면 모험가들 사이에서 소외돼고 무시당한채 철처지 버려지게 된다. 분명 그녀의 성격상 모험가 세계의 적응을 못해 교국으로 전향 온 것이 틀림없다.
"언제 철 동전으로 올라가신 겁니까?
"접수처에 네크로레임의 수석 졸업생이라고 말하니깐 철 동전으로 바로 올려주던데요"
술사들 같은 고급인력을 모험가 세계에 잡아두기 위해 암묵적으로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들었었다. 아마도 그녀는 이런 혜택의 수혜자인것 같다.
(나는 이 년동안 죽을둥 살둥해서 올라갔는데... 이래서 기술을 배워야 되는건가?)
씁쓸한 마음에 나는 모닥불에 던져넣은 밤들을 꺼내어 까기 시작했다. 양모 장갑너머로 군밤의 후끈함이 느껴졌다. 초겨울이어서 그런지 밤 공기가 쌀쌀했다.
그녀도 나를 따라 모닥불에 밤을 꺼내어 까기 시작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것인지, 손에 움켜 쥔 채로 까다 만 군밤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에 나는 다 깐 밤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가,감사합니다"
"릴리 씨, 궁금한게 있는데 네크로맨서들은 왜 스켈레톤한테 이름을 붙여주는 겁니까?"
내가 건넨 군밤을 호호 불어대면서 먹고있던 그녀가 답해주었다.
"자신이 창조한 언데드에게 고유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속박의 저주를 걸어, 다른 네크로맨서들에게서 통제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에요. 리치가 자신의 이름을 타인에게 말하면 통제권을 상실하는 것과는 반대로 네크로맨서들은 창조한 언데드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통제권을 빼앗길 수 있죠"
"그렇군요... 그런데 릴리 씨는 네크로레임의 수석졸업생이라고 했죠? 왜 모험가가 되신겁니까? 더 좋은 직업도 있을텐데"
"저주술사인 네크로맨서는 전통이 깊은 명문가이거나 뛰어난 스승의 직계제자가 아니고서는 좋은 직업을 얻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저 같이 가족도, 연줄도 없는 평범한 네크로맨서는 모험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만 하죠"
"가족은... 혹시 다 돌아가신 겁니까?"
그녀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또 건네 준 군밤을 받고서는 말했다.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는 제가 여섯 살때 할머니한테 맡기고서는 한 번도 찾아오질 않으셨어요, 분명 절 버린거겠죠"
"그래서 네크로맨서이셨던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할머니처럼 네크로맨서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해서 디트리런의 네크로레임에 입학했죠"
"할머님은 살아계십니까?"
"제가 학교에 입학하고나서 얼마 안있어 돌아가셨어요"
그녀는 군밤을 우물거리다가 돌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앞을 가린것인지 소매로 눈가를 슥슥 비벼대고서는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사람의 노력을 모욕할 수 있는거죠? 정말 무례하고 몰상식해서! 모험가들은 원래 다 그런건가요? 고.레오 씨도 그런건가요?"
갑자기 화살이 내쪽으로 날라왔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그녀의 울분을 들어주었다. 숱한 시련을 겪은 나로서 그녀의 울분을 이해못하는바는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모르면서 비웃고 깔보고... 모험가 조합에 있던 다른 모험가들도 똑같아!! 쪼끄맣다고 무시하고 욕하고... 어딜가도 항상 똑같아!!"
그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것인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서는 울어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흠칫 떨었지만 점차 내 토닥임을 잠잠히 받아들였다.
한참을 울다 지쳐 잠이 든 그녀를 대신해 나는, 그녀의 몫까지 불침번을 서주었다.
< -- 34. 쾨스 호수 -- >
짹짹짹
텐트 밖에서 들려오는 참새 소리에 나는 피곤에 쩌든 눈을 뜨고서는, 주변을 확인하며 오늘도 좆같은 하루가 시작됐음을 알았다.
"어우 야... 대신 서주는게 아니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더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며 나는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늘은 베스티어 악어를 인어 년마냥 불태워 죽이는 날이다. 무장을 갖춘 후 텐트를 나가니 벌써 케이크 모험단은 무기들을 정비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레이슨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젯밤에 네크로맨서 년 몫까지 서줬다매?"
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는데 아마도 내가 그녀의 불침번 몫까지 서준것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너 그러다가 호구 되는거 한 순간이다"
"내가 누구한테 호구당할 놈으로 보이냐? 내 여자가 된다면 모를까"
"벌써 네놈 여자가 된건 아니고?"
"염병 그만하고, 릴리 씨는 아직 자는건가?"
인상을 찡그리면서 그는 그녀의 텐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망할 꼬마년 같으니라고, 그렇게 쳐잤으면서 아직까지 안일어나는 것 좀 봐"
"너는 씨발 화 좀 줄여라"
씩씩대는 그를 뒤로 한 채 나는 그녀의 텐트로 향했다. 아직까지 안 일어난 것에 대해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언짢기는 했다. 텐트 앞에 도착한 뒤 그대로 입구를 열어젖혔다.
안에는 그녀가 속옷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 나이대에 어울리는 어른스러운 속옷을 입고 있었지만 체형을 생각했을 때는 괴리감이 상당했다. 나는 한참을 쳐다보다가 덤덤히 말했다.
"..... 빨리 나오세요"
"......."
그녀의 당황한 표정과 침묵을 뒤로 한 채 나는 그대로 열어젖힌 천을 내렸다. 22살 여성의 속옷차림을 봤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항상 후드를 쓰고있어서 보지 못했던, 그녀의 긴 흑발머리만이 떠올랐다. 홀딱 벗은 좆달린 새끼들을 보는 것보다는 느낌이 남달랐지만 그게 끝이었다. 무덤덤하게 걸어오는 내게 그레이슨이 다가오더니 궁금한 어조로 물어왔다.
"그 년은 일어났냐?"
"일어났더라고"
"근데 씨이발! 왜 안 쳐 기어나오는 거야?!!"
그녀의 텐트를 향해 달려가려는 그를 막으면서 나는 조금 있으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있었으니까 조금 있음 나올것이다.
내 예상대로 그녀는 얼마 안있어 옷을 갈아입은 채 텐트 밖으로 나왔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그녀는 나를 무섭게 째려봤으나 애써 무시했다. 그레이슨은 그런 그녀에게 또 한바탕 난리를 칠려고 하는 것을 내가 막았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땅에 박은 채 묵묵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식사를 마친 뒤 그레이슨은 내게 호수를 조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나는 릴리와 같이 가기 위해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자고 일어난 침구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릴리 씨, 저하고 같이 호수에 조사 좀 하러 갑시다"
"......."
그녀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했다. 이에 내가 다시 말하자 그녀는 나를 째려보고서는 표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저한테 뭐 하실 말 없어요?"
(아직도 화가 나있는건가? 그럴만 하긴 하지)
"죄송합니다, 인기척을 냈었어야 되는건데"
"잘 아시네요, 그런데 왜 그러신거였어요?"
"정말로 죄송하ㅡ"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면 속옷 차림의 여자를 마음껏 봐도 되겠군요? 왜, 그때 덮치지 그랬어요, 그러고나서 죄송하다고 하시면 되잖아요?"
(이 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아무래도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겠군)
"그 눈빛 뭐죠? 설마 저를 덮치려시는 건가요? 한 번 해보세요, 어디 한 버ㅡ"
나는 그대로 그녀의 양 팔을 손으로 붙들어 맨 채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체중으로 그녀의 몸을 압박했다.
"그럼 진짜로 덮칠까요?"
그녀는 내 밑에 깔린 채 젖은 눈빛으로 겁먹은 아기새마냥 몸을 떨어댔다. 내가 그녀의 가랑이에 하체를 밀어넣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더니 잘못했다고 말했다. 나는 울고있는 그녀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난 뒤, 화해의 악수를 청했다.
"죄송했습니다, 릴리 씨"
내가 내민 손을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손을 내밀며 잡았다. 이걸로 화해한 것일테다.
"릴리 씨,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팔로 가슴께를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나는 텐트를 빠져나왔다. 그녀의 속옷차림은 욕정이 일지 않았지만 막상 몸을 겹치고 나니까 하체가 무거웠다.
"씨발... 가기전에 한 발 빼고 와야지"
마침 몸을 가릴만한 큰 나무가 근처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