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5화. 조우
< -- 9. 조우 -- >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나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챘고 그녀도 나의 존재를 알아챘다. 이런 상황에 나는 이마에 식은땀을 줄줄 흘려대며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감옥에서 죄수들과 욕배틀을 할때에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물론 그건 두꺼운 벽이 놈들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지금은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벽이 없었다.
결국 고심 끝에 나는 검을 움켜잡고서는 하피에게 다가갔다. 하피는 내가 다가오자 발버둥을 치는 것이 꼭 겁을 집어먹고서는 도망칠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려는 하피의 앞에 섰다.
하피는 검을 치켜들고 있는 내 모습을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팔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날개만 크지 체형은 완전 마야하고 똑같잖아?)
순간 하피의 작은 체구가 마야에 빗대어 보여졌다.
"씨발...... 이러면 죽일 수가 없잖아"
마야 생각에 나는 치켜든 검을 내리고서는 그대로 뒤돌아 걸어갔다. 아무래도 하피를 죽이는 일은 못할것 같다.
[끼이이이이.....]
등 뒤에서 하피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내가 이대로 가버린다면 저 쬐그마한 하피는 분명 죽을 것이다. 기적적으로건 뭐든 간에 반드시 죽는다. 나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 하피에게 다시 다가갔다. 내가 다시 다가가자 하피는 아까 전에 보여졌던 행동을 똑같이 하며 몸을 움츠렸다.
나는 하피의 다리를 지그시 쳐다봤다. 하피의 왼쪽다리가 기이한 각도로 부러진 채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건지"
나는 그대로 시체가 두르고 있던 망토의 일부분을 검으로 잘라낸 후, 하피의 부러진 다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대고 칭칭 동여매 고정시켰다. 이게 지금 게임이었다면 이 애의 피부에 손을 대는 순간 HP가 깎여나갈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것은 현실이지 게임이 아니었다.
하피는 내 행동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가 자신을 안아들자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끼이이! 끼이이!]
"얌마! 너 도와줄려고 그러는거니까 가만히 좀 있어라!"
하피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발버둥을 멈추고서는 내 품에 조용히 안겼다.
[끼이]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걷고 있던 내게 하피가 울음소리를 내었다.
[끼이, 끼이]
"미안한데, 난 네가 뭘 말하고 싶은건지 못 알아듣는다구"
[끼이]
하피는 자신의 붕대가 감겨진 다리를 날개로 가리켰다.
(왜 구해줬냐고 물어보는건가?... 마야와의 대화가 이런식으로 활용될 줄은 몰랐는데)
마야도 말하고 싶은 단어를 모를때에는 이 하피처럼 손가락으로 말하고 싶은 것을 가리켰다. 나는 그걸 통해 소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유추해야만 했었다.
"그대로 두면 죽을것 같아서 구해줬다, 왜? 구해주지 않는게 좋았어?"
[끼이]
하피는 내 물음에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런 귀여운 모습에 나는 피식하며 숲속을 걸어갔다.
-
[끼야아아아악!!!!!!!]
얼마만큼 걸었을까 운좋게도 하늘에서 귀청이 뜯겨져 나갈 듯한 비명이 들리더니 저 멀리 하늘에서 커다란 체구의 하피들 두 마리가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붉은 색 날개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하피야 저기 있는 언니들 너네 가족 맞아?"
[끼이, 끼이]
하피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붉은 머리칼에 붉은 날개면 빼박 가족이겠지, 이대로 못찾으면 얘를 어떡해야 하나 존나 고민했었는데 다행이군)
나는 안고 있던 하피를 바닥에 내려둔 뒤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저기 있는 너희 언니들 들리게끔 울부짖을 수 있지?"
[끼이]
"그래, 그럼 간다, 잘 지내라, 다치지 말고"
나는 그렇게 하피와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저 하피도 사람들을 죽였을거 아니야?... 씨발 몰라)
존나 쿨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
하피들이 있는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던 나는 앞에서 들리는 말밥굽 소리에 나무뒤로 몸을 숨겼다. 슬쩍 고개를 내밀고 확인해보니 켄타우로스 여러마리가 서있었다. 하체는 말에 상체는 인간, 한 마디로 켄타우로스 그 자체다.
(하아ㅡ 아무래도 괴물들이 살고 있는 한복판에 떨어진 것 같은데, 큰일났네 이러다 뒤지는 거 아니냐?)
계속해서 나타나는 괴물들에 의해 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놈들이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맞은 편 나무 뒤에 숨어있는 너덜너덜힌 갑옷을 입은 한 남성을 발견했다. 남성도 내 존재를 눈치챘는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남성의 눈에는 공포가 잔뜩 배여있었다.
그 남성과 시선이 맞닿으면서 나는 알게모르게 남성에게 동료애 비스무리한걸 느꼈다. 이 거지같은 상황에서 우리 둘 다 공포에 떨고 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동료애 비스무리한걸 느끼게 해줬던 남성은 뒤에서 날라온 창에 의해 뒤통수에서 입까지 꿰뜷려지면서 죽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숨어있던 나무에 빠른 속도로 창이 날아와 깊게 박혔다.
"이런 미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창이 날라온 반대편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슈웅! 슈웅!
달리면서 스쳐지나가는 주변 나무들로 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연거푸 꽂혔다.
"허억ㅡ 허억ㅡ 미친!! 미친!! 미친!!"
나는 미친듯이 달렸다. 폐가 터질 것 같아도 꾹 참고 악착같이 달렸다. 달리면서 토악질을 했지만 바닥에 얼굴을 떨군 채 하지 않았다. 달리면서 그대로 토악질을 했다. 지금 내게는 그런 매너있는 행동을 할 여유가 없었다.
슈웅ㅡ!
불현듯 창이 날라오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지더니 온 몸에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그리고서는 그 창이 내 팔뚝을 스쳐지나갔다. 스쳐 지나간 팔뚝에서는 피가 잔뜩 흘러나오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나는 팔에서 느껴지는 타들어갈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며 몸의 중심을 잃고서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근데 하필이면 엎어지면서 내려다본 풍경은 나뭇잎이 무성한 흙바닥이 아니라 아래로 길게 뻗어있는 낭떠러지였다.
"빌어ㅡ"
나는 그대로 추락하며 그 후 정신을 잃었다.
-
"끄으으으...."
나는 눈을 뜬 뒤 엎어진 상태 그대로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낭떠러지를 굴러서 아래까지 추락했나보다. 눈이 떠진 걸 보면 뒤지지는 않은 것 같다.
"끄으으으ㅡ"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뚝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온 몸이 멍이 든것 마냥 욱신거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으며 눈에서는 눈물이 질질 뽑아져 나왔다.
"흐으으윽... 그냥 나 뒤질래, 이렇게는 못살겠어"
이세계에서 소환되었던 날부터 지금 여기 흙바닥에 엎어진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평화로운 지구에서 살았던 평범한 남자인 내게는 이세계 생활에 버티기 위해, 살기 위해 발버둥쳤던 나날들이 매우 좆같게 느껴졌다.
"씨발새끼가... 크크크크... 발버둥치기는 개뿔, 이세계에 와서 거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쳐 자빠져 있었구만, 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나는 스스로의 생각에 자조하며 미친듯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비관하고 병신 새끼마냥 악착같이 살아온 자신의 그 모든 노력들에 대해 욕질을 해댔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고 사진으로만 봤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으며 나의 지구에서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생 때 사고로 돌아가셨다. 유치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나는 애들에게 엄마가 없다고 놀림받았다. 아버지는 날 어릴때부터 강하게 키우면서 내가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나는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날 놀리는 녀석들을 미친듯이 패고 다녔다. 아버지는 매일 학교에 불려와 내가 때린 놈들의 부모새끼들한테 용서를 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내게 그 어떠한 책망의 말도 하지 않으셨다. 대신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러다 빨간색 신호인데도 불구하고 만취상태로 길을 건너시다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이후부터 나는 알바를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학교를 자퇴할까도 생각했지만 선생님의 조언과 격려에 계속 다니기로 하였다. 알바를 하면서 좆같은 새끼들을 많이 만났고 그런 놈들과 오질라게 싸워대기도 하였다.
존나 정신없이 일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대학교까지 졸업했다. 빌빌기면서 겨우겨우 직장까지 구하는데에 성공했다.
그런데...그런데 이 씨발 개좆같은 이세계에 영문도 모른 채 소환당한 뒤 감옥에 갇히고, 어린 여자애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마물에게 쫓기다 낭떠러지에 떨어져서는 현재 이렇게 무기력하게 엎어져있다. 정말 기분이 참 엿같다. 눈물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수가 없다.
"....... 아버지가 제게 바라신대로 여태까지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왔거든요. 근데 이제 더이상 그렇게는 못살겠습니다... 너무 고단하고 지쳤습니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나는 문득 마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보다 훨씬 불우한 환경에서도 자랐는데도 열심히 살아가던 소녀, 만약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다면 딱 그 정도 나이대의 아이였을 8살의 어린 소녀. 그런 아이를 내가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죽게 만들었다.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그건 너무 무리한 바램이라는것을 나 자신도 마음 깊은곳에서는 깨닫고 있었다.
"마야야 미안하다... 페르디난드 그 개새끼... 엘베 그 썅년... 유르베 욕해서 미안했다, 도와줘서 고마웠다... 기사 선생님, 죄송합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씨발! 씨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좆같은 아들새끼 낳을려다 돌아가시게하셔서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흐흐흐흑..."
나는 연신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다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이쪽은 다 정리가 된 모양이군"
남성은 켄타우로스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매우 흡족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멜레나야 이리 와보거라"
"예!"
멜레나라 불린 자구마한 체구의 여자아이는 가슴에 지팡이를 꼭 끌어안은 채 남성에게 달려갔다.
"허억ㅡ 허억ㅡ"
대주교라 불린 남성은 뛰어오느라 호흡이 가빠진 멜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손가락으로 켄타우로스를 가리켰다.
"멜레나야, 저 켄타우로스의 시체에 "신성한 세례"를 써보겠느냐?"
"예?!....예!"
멜레나는 황급히 지팡이를 고쳐쥐고서는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소녀의 손에 쥔 지팡이에서 밝은 색의 빛이 뿜어져나오더니 그대로 켄타우로스의 시체를 녹여버렸다. 마치 강렬한 햇빛에 아이스크림이 녹는것 마냥 녹아 내렸다.
그 모습에 대사제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멜레나는 대천사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것 같구나, 어린 나이에 이만한 실력을 보이다니 말이야"
"헤헤헤, 가,감사하,하,합니다"
소녀는 대사제의 칭찬에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한 켄타우로스의 녹아내린 시체를 자랑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뒤편에 난 낭떠러지에서 어떤 형상이 보였다. 이에 소녀는 낭떠러지 근처로 가 그 형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형상은 허리춤에 검을 찬 사람이 쓰러져있는 모습이었다.
"대,대사제님!!! 저,저,저기 사,사,사라,람이!!!!"
멜레나는 화들짝 놀라더니 대사제를 크게 불러대며 손가락으로 쓰러져 있는 남성을 가리켰다. 대사제는 소녀가 가리킨 남성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필시 어제 전투에서 죽은 병사일것 같구나... 성당기사단이여! 저 낭떠러지에 떨어져있는 모험가의 시체를 가져와주시게!"
대사제는 뒤에 서있던 기사들에게 명을 내린 뒤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근방에 리치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시체들은 다 불태워 없애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