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3화. 발각
(제 2왕녀라고?!... 아니 그것보다 날 나가게 해준다고?)
내 놀란 표정에 유르베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띄우며 나가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후후후, 내가 밤중에 여기 뒤에 서있는 기사를 보낼테니 너는 이 자만 따라가면 돼, 간단하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구요? 어디로 가는건지 물어봐도ㅡ"
"아 존나 귀찮게 구네?!!"
소녀는 내 물음에 잔뜩 성질을 부리더니 이내 내 귓가에 나지막하게 알려주었다.
"워프... 위험부담이 크긴한데 이것 말고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유르베는 그 말을 끝으로 서둘러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는 멀어져 가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씨발... 그래, 여기서 가만히 앉아있다 뒤질바에는 뭐라도 시도해보고나서 뒤지는게 낫지)
불안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 -- 6. 발각 -- >
탕! 탕! 탕!
"아저씨..."
철창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마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벌떡 일어났다. 마야는 손에 꽃 한송이를 쥐고 있었다.
"어 마야야... 근데 그 꽃은 뭐니?"
소녀는 수줍게 철창 너머로 손을 집어넣어 꽃 한송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저씨... 선물... 없어... 꽃"
(꽃 밖에 줄게 없다는 건가?)
마야와 42일간 대화를 나눈 나는 소녀의 단답형 단어를 유추해 문장을 완성하는 재주를 익힐 수 있었다.
"정말 예쁜 꽃인데? 고맙다, 마야야"
고맙다는 말에 소녀는 이제까지 지었던 미소 중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 앞에서 나는 소녀가 슬퍼할 만한 이야기를 전해줘야만 했다.
"마야야 할 말이 있는데 귀 좀 가까이 대줄래?"
소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귀를 철창에 가까이 댔다. 나는 그런 소녀의 귓가에 오늘밤 이곳을 나간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말을 다 전한 뒤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떠나지마... 여기있어"
소녀는 내 다 헤진 셔츠를 오른 손으로 꽉 붙잡고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떠나... 나 혼자... 싫어... 흐흐흑"
"마야야..."
나는 소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녀의 울음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려내렸다. 42일간 이 소녀에게 정말이지 정이 많이 들었다. 나도 이런데 이 어린소녀라고 오죽하겠는가...
소녀는 한참을 울다가 이내 울음을 그치고서는 힘을 주며 간신히 말했다.
"고...고맙스..습니다, 아...안녕하세요"
"계...계속 연습...할거야"
"그래... 우리 마야 장하다"
터벅- 터벅- 터벅-
"마야야, 아저씨 갈게, 나중에 하수도로 만나러 갈게!"
계단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나는 마야와 작별인사를 했다. 소녀는 연신 뒤를 쳐다보더니 이내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고마웠다 마야야... 너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훔친 뒤 계단을 쳐다보며 유르베 공주가 말한 기사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후 후드를 뒤집어쓴 기사가 발소리를 내지않으면서 내쪽으로 다가오더니 철창문을 열어주었다. 철창 문이 열려지자 나는 42일만에 밖으로 나왔다. 갇혀진 곳의 바로 코앞으로 나왔을 뿐인데도 공기의 냄새가 새로웠다.
"이게... 이게... 자유의 냄새인가"
"빨리 따라와라"
공기를 마셔대고 있던 나는 기사의 독촉에 서둘러 계단을 향해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뒤를 쳐다봤는데 철창 안에 갇힌 죄수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새끼들... 잘있어라, 그동안 좆같았고 다시는 보지말자 씹새끼들아)
-
지하감옥을 나온 뒤 나는 기사의 꽁무늬를 쫓아가며 나무와 풀이 가득한 정원을 달렸다. 밤하늘에 뜬 달에서 나오는 빛이 리베왕국의 궁전에 음영을 드리워주고 있었다.
(이렇게 웅장한 궁전 밑의 그런 더러운 곳이 있다니, 아이러니컬하구만)
나는 높다랗게 선 궁전을 감탄의 눈빛으로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발검음을 놀렸다.
쉬지않고 달려 정원을 빠져나온 기사는 앞에 있는 화려한 양식의 건물의 붉게 칠해진 높다란 문을 열고서는 들어갔다. 이에 나도 따라 들어갔다. 들어간 곳은 내가 소환됐던 장소와 모습이 똑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중앙에 거대한 문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족히 5m는 되보이는 높이의 기다란 문이었다.
기사는 그 거대한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덤덤히 말했다.
"여기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된다"
"열고 들어가면 저는 어디로 가는겁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ㅡ"
다급하게 내 몸을 문에 밀어넣으려던 기사는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머리를 맞고서는 바닥에 쓰러졌다. 화살이 꽂힌 기사의 머리에서 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뭐야?!!!!"
눈 앞에서 사람이 죽은 것은 물론 사람의 시체까지 보자 나는 패닉에 빠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서둘러 일어나서 문으로 들어갈려 했지만 다리의 힘이 풀려 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뒤에서는 활로 날 향해 조준하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시나?"
은빛 갑옷의 금발머리, 페르디난드가 검을 쥐고서는 나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얌전히 감옥에 갇혀있으면 좋았을것을..."
그는 점점 나를 향해 다가왔고 이내 내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왜 너를 살려두는 건지 이해가 안된단 말이야"
"멈춰주십시오, 용사님!"
높이 들어올린 검을 곧장 나를 향해 내리치려던 그는 뒤에서 리베 공주의 부름을 듣고 행동을 멈추었다. 공주의 옆에는 나를 감옥에 집어넣은 말락이 동행해있었다.
공주는 빠르면서도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오더니 그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지금 이 자를 죽이시면은 안됩니다"
"왜입니까, 공주님? 이자는 능력도 없는 용사도 뭣도 아닌 자입니다!"
"이 자는 다음 있을 용사소환에 필요한 제물입니다"
그녀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옆에 서 있는 말락을 쳐다보았고 말락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읽고 그에게 추가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용사님의 말씀대로 이 자는 용사도 뭣도 아닌 자입니다만은 이세계에서 소환된 자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나중에 있을 용사 소환에 제물로 삼으면 필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질 것입니다"
말락의 말에 페르디난드는 내게 다시 검을 치켜들고서는 말했다.
"용사는 저 혼자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또 용사를 소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용사님... 검을 거두어주시겠습니까?"
그는 무뚝뚝한 리베 공주의 표정과 뒤에서 검을 빼들고 있는 기사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검을 거두었다. 권력의 무서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 공주님의 명이시라면"
"감사합니다, 용사님"
그녀는 감사를 표한 뒤 용사의 곁을 스쳐지나가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당신의 탈출을 도와준 자가 누군지 말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꿀꺽"
그녀의 온화한 미소 뒤에 감춰진 위압적인 태도에 나는 입이 떨어지질 않아 침묵만을 유지했다. 그러자 그녀는 옆에 죽어있는 기사의 머리를 들어올려 얼굴을 확인했다.
"제 여동생의 직속 호위기사군요... 이렇게 깜찍한 짓을 할 수가... 당신에게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겠군요"
그녀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것 마냥 잡았던 머리를 휙 놓더니 다시 내 앞에 다가오고서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의 귀여운 꼬마친구한테는 들을 얘기가 있을 것 같네요"
"뭐...?"
나는 귀에 들려오는 말에 한순간 사고가 정지되더니 그녀가 뒤를 돌아 걸어가자 빠른속도로 사고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귀여운 꼬마친구?... 마야... 마야!!!)
"리베 공주님!! 리베 공주님!!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그녀의 등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제발 그 아이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거야 꼬마친구에 대답에 따라 달라지겠죠"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유유히 걸어가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가 거꾸로 솟기 시작했다.
"씨바아아아아알!!!!!! 건들지 말라고, 그 애한테 털끝하나 건들면 내가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너도 여기있는 놈들도 전부!!!!!"
"닥쳐!"
용사 페르디난드가 날린 주먹에 얼굴을 맞은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 -- 7. 페르디난드 -- >
"끄으으윽......"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지하감옥으로 돌아와 있었고 머리가 어지러워 바닥에 실컷 토악질을 해댔다. 바닥에 쏟아진 토사물은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감옥의 악취와 더해져 더욱 역해졌다. 그 역한 냄새에 나는 다시 한 번 토악질을 해댔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철창 너머에 용사 페르디난드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너... 너는?"
"드디어 정신을 차린건가? 오래도 기절해있는군"
"씨발... 마야? 마야는 어떻게 했어!!!"
"마야? 아~ 그 꾀죄죄한 여자애의 이름이 마야였었나?"
"이 씨발새끼!! 마야한테 무슨 짓을 했어!!!!"
그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더니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잉글랜드 블랙번 대가문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지, 사생아가 뭔지는 알고 있겠지?"
"우리 어머니는 소작농의 딸로 매우 아름다운 분이셨지, 그러던 어느날 성에서 열린 대연회에서 내 아버지가 하녀 일을 하고 있었던 내 어머니를 보고서는 권력을 이용해 수 차례 겁탈한 뒤 어머니는 원치 않게 나를 낳게 됐지... 결혼도 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결국 갓난아기였던 나와 함께 집에서 쫓겨났고 그 길로 자신을 겁탈한 남자의 저택을 찾아갔지"
"겁탈한 남자는 겁탈했던 여자와 여자가 안고있는 갓난아기를 쳐다보더니 노발대발하며 가차없이 내쫓았지, 하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어, 어린 나를 살리기 위해서 추운 겨울날 저택 앞에서 버티고 앉았지... 그러다가 결국 동사하시고 말았지, 죽은 어머니의 품에서 울고있던 나를 우연히 지나가던 신부님께서 발견하시고는 성당으로 데려간 덕분에 나는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게 되었지"
"여기서부터는 흥미로운 내용이 펼쳐지니까 집중해서 들으라고, 나는 그렇게 성당에서 자라면서 신부가 되고자 노력했지, 그런데 어느날 성당에서 기사들이 찾아오더니 나를 데리러 왔다고 그러는거야,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고 그렇게 내 아버지를 만나게 됐지... 처음에는 뛸 듯이 기뻤어, 천애고아인줄 알았는데 가족이 있었다는 것에,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준다는 것에, 하지만 그 기쁨은 얼마 못갔지, 내 아버지가 나를 찾은 이유는 나를 본처 사이에서 낳은 자기 아들 대신 전장에 내보내기 위해서였지, 갔어, 가서 찌르고 베면서 죽을 힘을 다해 살아 돌아왔지"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는 손안에서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씨발 새끼가 말을 존나 많이 하니까 안그래도 기분 좆같은데 더 좆같아졌다 .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서 살아돌아왔는데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차디찬 시선이었지, 아마 내가 전장에서 죽기를 바랬었나봐... 그 뒤부터는 말 안해도 알거야, 완전 없는 사람 취급당했지, 그런 생활속에서 나는 착잡한 마음에 아버지가 소유한 토지를 둘러보다가 어떤 소문을 들었지, 아버지가 겁탈한 소작농의 딸이 아이를 배서 집에서 쫓겨났다고... 예감이 좋질 않았지, 그리고 결국 그 소작농의 딸이 우리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
"그 날 미친듯이 술을 퍼마셨지, 그리고 그 후부터는 미친듯이 권력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 하지만 돌아온 건 사생아인 나에 대한 멸시와 조롱뿐... 그러다가 우연히 리베 그년의 목소리를 들은거야, 우리 세계에 넘어오면 부와 권력을 주겠다고, 그래서 소환에 응했지"
그는 손안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것을 철창 안으로 던져 넣고서는 말을 마쳤다.
"그러니 나는 부와 권력, 그 모든것을 반드시 손에 넣겠어, 아무리 더러운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말이야"
나는 그가 던진 것들을 주숴들었다. 조그마한 이빨과 자그마한 손가락 마디였다. 아이의 것이었다.
"너... 이거 어디서...?"
"대답을 안하길래 이빨을 뽑았고 우물쭈물 거리길래 손가락 마디를 잘랐더니 그제서야 말문을 열더라고, 참 성가신 꼬마애였어"
"이 씨이이이이발!!!!!!!!!"
나는 철창을 주먹으로 미친듯이 쳐대며 고함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