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181화 - 폭풍 후 맑음
"이런 빌어먹을 놈이!!!"
이안이 맞을때마다 당장이라도 난입하고 싶었던 난 카이산의 종아리에서 실날같이 스며나오는 핏물과 함께 쓰러지는 이안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을 위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스스로를 희생하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니 남편에게 반했을 때 처럼 가슴이 터질 것 처럼 뛰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안의 앞을 가로막은 나는 얼굴에 핏대가 잔뜩 선채 씩씩 거리는 카이산을 바라봤다.
뿌득 뿌득 이를 갈던 카이산이 나에게 말했다.
"비켜라... 여자라고 봐주는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카이산의 목소리에는 활화산같은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카이산은 두 주먹에 힘을 잔뜩 주고 이어서 말했다.
"당. 장. 비. 켜...!!!"
"피식..."
공기가 떨려올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추한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내 비웃음을 보고 얼굴이 터질 것 처럼 빨갛게 변한 카이산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속 안지키시겠다는 건가요?"
"..... 꾸드득...! 내 말... 안들리나? 난! 너에게 비키라 말했다!!"
스스로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추한지 알고 있는지 얼굴을 붉힌 카이산은 나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비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하아..."
슬슬 이런 촌극이 지겨웠던 나는 살며시 주위를 살펴봤다.
감정에 솔직하기 그지없는 야만인들은 대족장의 추태를 두눈에 담으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에 반면에... 전신의 근육을 꿈틀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대족장 카이산은 주위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단적으로 말해 추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흐으음... 아랫도리는 쓸만했단 말이야...'
그럼에도 아랫도리는 쓸만했기에 난 단 하룻밤 만에 기형적으로 부푼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을가장 중요시 여긴다 해도 그건 스스로의 다짐으로 의지로 애정을 가졌을 때에나 소중한거지 지금 초커를 통해 비대해진 애정은 나에게 있어 길가의 돌맹이 마냥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난 차분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귓구멍을 새끼 손가락으로 후비며 노골적인 비웃음을 얼굴 만면에 띄운채 대답했다.
"약속 지키지 않겠다는 거죠?"
목소리에 가득 스며들어있는 비웃음을 느낀걸까 그는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격분하며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나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재트기가 지나갈때 나는 소리와 같이 공기가 터져나가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전력을 다한 주먹은 내 머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 아 이거 꼭 말해보고 싶었는데.'
약간의 장난기와 조금이라도 빨리 남편과 함께 떠나고 싶었기에 나 또한 전력을 다해 그의 도전을 거부하지 않았다.
치이익...!
오른발을 뒤로 뺀다.
땅바닥의 흙이 마찰하는 소리를 내고 곧 예정된 곳에 도달한 발은 강하게 지면을 눌렀다.
오른손을 뒤로 당긴 나는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은 광폭한 마력의 흐름을느끼며 기분좋게 미소를 지었다.
압도적인 폭력의 현현, 난 이 세상에 와서 가장 기분이 좋을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이능을 활용하여 대지를 융기시키고 하늘을 가르며 사람을 부순다.
사람의 몸으로 행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폭력이 자연을 변형시킬 수 있다니... 다시 한번 더 나직히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행이야'
그리고 내 주먹에 가시화될 정도로 소용돌이 치는 주먹을... 그대로 카이산의 주먹을 향해 내질렀다.
.....!!!!!!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안개마냥 사방을 덮었다.
야만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격에 웅성거리다 천천히 내려앉은흙먼지 너머의 광경을 보고 침묵했다.
카이산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지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아 할머니들의 손주의 통통한 몸을 보고 반쪽이라고 걱정하시는 것과는 다르다.
말 그대로 그의 얼굴 반쪽은 어디로 간건지 사라져있었다.
또한 나와 주먹이 맞닿은 부분을 기점으로 소용돌이치듯 비틀려 찢어진 몸통 반절에서는 빨갛고 신선한 내장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 흉악하기 짝이 없는 파괴력에 야만인들은 경악했다.
'.... 어째 더 쌔진 것 같냐...'
물론 나 또한 지금까지단 한번도 모든 힘을 담아 주먹을 날린적이 없었기에 놀랐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은 공터 난 약간 아릿한 손을 털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다음은 누구?"
"......."
고요함이 야만인들을 감쌌다.
아마 야만인들도 저런 자연재해같은 일격을 보고 덤빌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강한 전사와 싸우는 건 좋지만 마그마에 몸을 던지고 싶지는 않다는 느낌?
아무튼 그러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우리를 대족장에게 인도한 야만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
내가 그를 부르자 약간은 씁쓸하고 약간은 슬픈 듯 카이산을 바라보던 야만인은 고개를 돌려 채념섞인 듯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당신"
".... 왜 날 부르는 거지"
"이제 어떻게 할거야"
"....... 대족장이 죽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다른 녀석들은"
"........ 글쎄 난 모르겠군"
"당신들 중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사람... 있어?"
나의 물음에 왜 그런걸 물어보는지 의아해하는 야만인들 그들은 아까전의 열기를 잃어버렸는지 의욕없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저들의 차갑게 식은 눈동자를 보고 난 대족장이 그들을 각성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야만인들의 마음이 향할 곳을 가르켜주는 나침반은 그 기능을 잃고 빙글빙글 돌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난 이어서 말했다.
"만약 여기에 정착하고 싶은 놈들이 있으면 이곳에 남아 아닌 놈들은 떠나고 아 만약 덤비고 싶은 녀석이 있으면 말해 상대해줄테니깐."
나의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이들, 난 그런 말을 끝으로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안내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썍.... 쌕.... 쌕...."
그곳에는 철저할 정도로 온몸이 파괴된 이안이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몸에 손을 가져다대자 순식간에 본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이안,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겉에 묻은 핏물을 제외하고는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잠시 그의 잠든 얼굴을 쓰다듬던 나는 가슴속에서 부터 퍼지기 시작하는 온기를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순간 스스로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것에 놀란 나는 입가에 맺혀있는 미소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생각외로 이 초커라는 놈의 성능이 완벽한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피식 웃고는 정신을 잃은 그를 등에 짊어진 후 일어섰다.
야만인들은 나의 제안을 듣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남을지 아니면 고향으로 떠날지.
난 여유롭게 그들의 논쟁이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 와중에도 안내인은 나를 무덤덤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뭘 보냐는 듯 그를 노려봐주자 그는 나에게 다가왔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괜찮겠소?"
유창한 제국어를 들은 나는 이 녀석이 일부러 어색하게 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뭐야 말 잘하네 흐으음.... 뭐 이미 모두 끝났으니깐.'
"뭔가요?"
내가 되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정중히 숙이며 대답했다.
"카이산의 몸을 수습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오... 그는 명예를 더럽히고 비겁하게 행동한 사내지만... 그래도 나의 의형제이니 그의 몸이라도 수습해 고향 땅에서 잠들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소."
"..... 그런가요? 상관없어요."
"....! 고맙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나의 말에 두눈을 크게 뜬 그는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뒤돌아 당당한 발걸음으로 카이산에게 다가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툭 내던지듯 말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나요?"
나의 물음에 움찔 몸을 떨며 멈추는 안내인, 그는 주저하다 고개만 살짝 돌리며 대답했다.
"원망스럽소"
"그럼 왜 복수를 하지 않는거야?"
".... 나의 동생이 자초한 일이요. 사내라면 응당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하는 법, 그는 스스로의 욕심을 위해 약속의 중요성을 잃어버렸으니... 어찌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 아닐 수 있겠소.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 말한 순간부터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소."
".... 어째서?"
"...... 신을 걸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깨트렸으니 당연히 신에게 벌을 받지 않겠소?"
마지막 말을 남겨놓은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겠다는듯 자신의 동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정중하게 그리고 슬픔을 가득담아 자기 동생의 유해를 수습한 안내인은 동생과 함께 야만인들의 사이를 헤치고 들어갔고 곧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대족장의 유해가 옆에서 지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야만인들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논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바로 조금전만 해도 세상을 불태울 것 처럼 보이던 대족장의 최후로는 상당히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었다.
약간의 여운에 잠긴 나는 머리를 흔들어 가슴속에 남은 여운을 털어냈다.
그리고 야만인들 중 리더격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결론적으로 따지자면 남는 야만인은 천여명도 되지 않았다.
남은 야만인,총 만 이천여명은 고향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내가 엄포라도 놓을 생각으로 만약 떠나지 않고 주위를 약탈한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반드시 찾아내 죽인다고 말하자 그들은 크나큰 모욕이라도 들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와는 다르다! 그 이상 모욕하면 우리도 참지 않는다."
"전 대족장의 약속인데 지킨다는건가요?"
내가 의구심을 담아 말하자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리 약속 지키지 않는 대족장이어도 그가 대족장으로 있을 때 부족과 함께 약속했다. 그의 약속에 반대할 자는 약속할 당시 앞으로 나서서 의견을 냈어야 했다."
".... 하지만 그는 죽었죠. 그럼 부족의 합의를 받아낸게 아니지 않나요?"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대족장을 죽일 정도로나서지 않은 것만으로도 부족은 대족장의 의견에 따르게 되는거다. 대족장은 지키지 않아도 부족은 지켜야한다. 그게 신을 걸고한 약속의 의미다."
약속에대한 굳건한 성채와 같은 믿음과 의지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신적인 의지를 보이는 집단을 더 이상 의심하는 것도 못할 짓이라 생각한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럼 언제 떠나시는거죠?"
"지금 당장 떠난다. 이미 충분히 이득도 봤고 더 이상 약자들의 땅에 관심은 없다."
이득을 봤다는 말은 아마도 변경 도시들을 털며 얻은 전리품을 말하는거겠지.
전리품... 그러고보니... 노예도 있나?
혹시라도 있으면 그들을 구출할생각을 한 내가 그에게 물어봤다.
그는 뭘 당연한걸 물어보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난 그에게 제안했다.
"도시에서 적당한 가격으로 사들일겁니다. 가능하시면 이곳에서 팔고가시죠."
나의 제안에 고민하던 대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기다려라"
다시 야만인들의 무리에 돌아간 대표자가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기시작했고 꽤나 짧은 시간에 논쟁이 끝난 그가 나에게 되돌아와 말했다.
"팔겠다."
귀찮은 건 떨쳐버리고 빠르게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인지 생각 이상으로 빠른 결정이었다.
그들은 이후 남는 것을 선택한 이천명과 노예들을 남기고 다른 야만인들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그렇게 야만인들의 대침공은 변경을 불태울 정도로 거창한 시작과는 다르게 빠르게 잔불만 남기며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이안은 야만인들이 떠나고 이주 뒤에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