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토벌 작전 (1)
시간이 흘러 어느덧 집결 당일이 되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오딘의 신전으로 향했다. 판도라가 집결 날짜만 공지해주고 시간을 공지해주지 않아서 아침 일찍 가서 기다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판도라는 오지 않았다. 왜 안오지? 사실 다른 곳에서 모이던 거였나? 아닌데....내 기억력이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닐 텐데.....설마 우릴 버리고 자기들끼리 가려고? 공적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아니, 이건 아니지. 판도라가 그럴 여자는 아니잖아.
기다림이 길어져 조금씩 지쳐갈 무렵, 등 뒤에서 판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시길래 혹시나 하며 나와봤더니 여기에 계셨네요. 다들 신전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들어오세요."
이래서 아무도 안 나타나는 거였구나. 다들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신전 앞에서 대기타고 있으니 마주칠 리가 있나. 한 시간도 넘게 서있었는데 내다버린 한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신전 안쪽으로 들어가자 긴 테이블에 여러 명이 착석해있었다. 엘프, 개, 호랑이, 곰 등등 각종 수인, 드워프까지 다양한 종족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아있었다.
드워프에 수인들은 예상한 그대로인데......엘프는 내 상상 속 이미지와 상당히 달랐다.
내가 생각한 건 아름다움의 표본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미인들이었는데 왜 내 눈앞에 앉아있는 엘프 아니 깐프는......파오후냐? 손이 아니라 거의 족발인데? 활을 매고 있는 걸 보면 궁수같은데 저 몸으로 활 쏠 수 있으려나....? 차라리 탱커 역할 맡으시는게?
"겨우 인간 따위가 우리를 기다리게 한 건가?"
"한낱 인간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우리를 기다리게 하는건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너무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요?"
참 고압적인 사람들이다. 하긴 겉모습만 보면 호랑이 수인이나 곰 수인 아저씨는 3대 1000은 칠 것 같이 생겼으니 자신감이 넘치는 게 이해가 가기는 한다. 그런데 이 세계는 근육이 많다고 무조건 센 게 아니란 말이지?
저 사람들이 있는데도 토벌에 우리를 불렀다는 건 우리가 더 강하다는 반증 아니야? 저 사람들보다 더 믿음직한 존재라는 거니까.
이 세계에 와서 느낀 것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어중간한 개 범 무서운 줄 모른다.'가 더 옳은 표현일 것 같다. 하룻강아지가 아닌 어중간한 덩치의 개일수록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강한 줄만 알고 상대가 누구든 일단 깝치고 보거든. 지금은 딱 저렇게 깝치는 깐프랑 수인이 어중간한 개의 역할이고.
"여기 계신 분들은 제가 직접 초청하신 분들이에요. 인간 측 영역에서 광신도들을 토벌할 당시 누구보다 크게 활약하신 분들이니 의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분들의 실력은 제가 보증하지요."
"아니, 난 내가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안 믿는다. 불만 있으면 나와 싸워서 증명해보던지."
"하하하! 베어드 공, 농담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아무리 강해봤자 겨우 인간따위인데 베어드 공과 싸움이 되겠습니까?"
지들끼리 물고빨고 난리가 났다. 저 곰 수인 이름이 베어드야? 종족 따라 이름 지었나. 단순한 거 봐라.
"그 의견은 저희 엘프도 동의해요. 직접 제가 실력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저들의 합류를 인정할 수 없어요."
"다들 너무하는구만. 우리 드워프는 새로 온 손님을 환영하는 바이다! 특히 거기 청년! 여자 둘을 동시에 꼬시고 재주도 좋구만! 남자는 응당 그래야지!"
드워프를 제외하면 다들 우리를 반기지 않는 듯한 눈치다. 역시 드워프가 짱이야. 난 게임할때도 드워프들 좋아했다고. 역시 근본종족이야. 귀만 긴 활쟁이들이나 동물 귀 달린 땀내나는 아재들보다는 무기도 잘 만들고 싸움도 잘 하는 드워프지!
그들은 마초적인 성향이 강해 남자우월주의가 강했다. 나한테 계속 말을 걸면서 남자는 하늘이라고 강조하는데 너무 마초적인 성향인 것만 빼면 좋은 종족 같았다.
"듣자하니 짜리몽땅 종족의 역겨운 사상 따위는 들어줄 수 없겠네요. 남자 따위는 우월한 여성의 발밑을 기어야지요. 그동안 핍박받았던 여성들이니 여성들을 위해 남자들이 희생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돌연 깐프가 드워프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그런데 말의 내용이.......내가 가장 싫어하는 '그 사상'이 주장하는 말과 똑같다.
"듣자하니 가만히 참을 수 없군! 겨우 여자들 따위가 남자들이 하는 신성한 대화에 끼어들려 하다니! 주제를 모르는건 귀쟁이들 종특인가? 하여간 이래서 여자들은 주기적으로 패줘야 한다니까? 쳐맞아본 적이 없으니 저런 이상한 주장이나 하는거지! 그렇지 않나?"
"드남충 주제에 건방지네요! 여자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핍박받아왔고 지금도 핍박받는데 그걸 모르는 건가요? 이래서 드남충이 멍청하단 거네요. 지금 당장 가서 여자들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지 그래요? 우리들은 모든 여성을 수호하는 선구자라고요! 지금까지 여자들은 모든 방면에서 유리천장에 가로막혀왔어요. 그 천장을 부수기 위해 활동하는 게 뭐가 문제라는 거죠?"
와......꼴마초 드워프에 꼴페미 깐프? 진짜 세계관 최강자들의 대결이다. 내용만 들어도 PTSD올 것 같네. 지구에서 그렇게 좆같아했던 저 유사논리를 여기서도 봐야하다니. 정신이 나갈 것 같네.
"세희 양, 지금 저 둘이 무슨 얘기하는 건지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도 그래요. 주인님은 저런 얘기 엄청 싫어하실 텐데."
"당신들! 지금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하는거죠? 설마 우리들의 위대한 사명을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며 조롱하는 건가요? 이래서 흉자년들은 안된다니까요? 남자에게 아양떨며 코르셋이나 조이는 여성들의 적!"
지들끼리 싸우는 거야 그렇다 쳐도.....내 여자들한테까지 지랄하네? 이건 절대 못 참지. 넌 뒤졌다.
나는 그 깐프의 머리를 붙잡고는 그대로 테이블에 쳐박아버렸다. 연약한 테이블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수 조각들로 박살나버렸다. 멧돼지 깐프답게 머리 무게도 꽤나 묵직했다.
"끄...으으억....."
"야. 한번만 더 내 여자들한테 목소리 높였다가는 진짜 내 손에 죽는다. 내가 어지간한 건 아무리 좆같아도 참는데 내 여자들한테 시비거는 건 용납 못하겠거든? 앞으로 잘하자?
드워프 아저씨들도. 저한테 농담하는 건 웃음으로 넘길 수 있지만 둘한테 선 넘는 농담을 하지는 마세요."
"아....알았네."
"아, 거기 수인 분들. 아까 직접 실력 검증을 해보고 싶으시댔죠? 언제, 어디서 할까요? 판도라 님, 이 근처에 대련을 할 만한 장소가 있나요?"
"신전 내부에 성기사들의 훈련을 위한 대련장이 있긴 합니다만.....지금 가실 건가요?"
"아....아니 굳이 지금 확인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실전에서 확인해도 되고. 쭉정이라면 실전에서 걸러지겠지. 성녀가 직접 데려온 녀석인데 한번쯤은 믿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음."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아까는 직접 눈으로 봐야한다며. 쫄은 거냐? 하긴 깐프 팰 때의 내가 좀 위압이 넘치긴 했지!
"저 청년은 그렇다 치고 함께 온 두 여자는 직접 확인해 봐야겠네. 우리들의 협력을 요구하면서 우리들의 요청은 거절하지는 않겠지? 성녀가 그런 무례를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쯧쯧. 기껏 살 구멍이 나타났는데 자존심 좀 세우겠다고 알아서 불구덩이로 들어가는구나.
"하아.....알겠습니다. 절 따라오세요."
· · ·
"이 창 든 여자는 내가 상대하겠다. 어중간한 창술 따위로 이 곳에 온 것이라면 각오해야 할 거다. 대련이라고 봐주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검사는 자동적으로 내 몫인가? 겉보기에도 약해 보이는데. 숨겨둔 한 수 쯤은 기대하지. 날 상대로 10초라도 버틴다면 인정해주겠네."
두 수인은 미아와 세희를 내려다보며 기세좋게 잘난 척을 했다. 10초같은 소리하네. 저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쟤들을 상대로 10초라도 버틴다면 인정해준다.
"그럼......시작!"
내 신호를 끝으로 수인들은 그녀들에게 달려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당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래봤자 내게는 한없이 느려 보였지만.
저들처럼 누구나 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콰아아아앙!
쳐맞기 전까지는.
예상대로 단 일격으로 승부가 났다. 누가 이겼는지는 굳이 말 안해도 알지? 폭발 속 연기가 걷히자 완파된 바닥과 기절한 두 수인이었다. 이래서 함부로 깝치면 안된다는 겁니다. 최고의 교훈은 역시 몸으로 배우는 교훈이지.
· · ·
"토벌 계획을 설명할게요. 우선 이 비스트 시를 기점으로 가장 가까운 곳은....."
쳐맞은 깐프, 수인 둘이 정신을 차리자 판도라는 지도를 펼쳐 벽에 붙이고는 토벌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이동 경로 및 적들의 예상 위치를 펜으로 그리며 설명하는 판도라의 모습은 유명한 인터넷 강사 같았다. 저 얼굴로 인강 찍었으면 분명 수십억은 벌었을 거다.
헤으응...판도라 선생님 제게 비밀스러운 수업을 해주세요.
한창 판도라로 망상을 하고 있자 그녀는 내가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건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미노 님, 듣고 계신가요?"
"아. 네. 물론이죠."
"그럼 저희가 동시에 몇 곳을 습격하는지 말해보세요."
"인원을 분산시켜 세 곳을 공격하는 거였죠? 세 곳 중 가장 큰 규모의 거점으로 파악되는 곳을 습격하는 게 제 일행과 판도라 님이시고."
"그....그래요. 잘 알고 있네요."
그녀는 내가 대답할 줄 몰랐다는 듯 살짝 말을 더듬었다. 대답 못했으면 잔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을텐데 다행이다. 망상 중이라도 무슨 설명 하는지 못 듣는 건 아니라고. 애초에 다른 일에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망상에 집중하는 사람이 어딨어.
"......이상이 토벌 계획안이에요. 이번 작전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신 분이 있으신가요?"
"가장 큰 규모의 거점을 겨우 저들에게 맡겨도 되겠나? 차라리 대규모 본대를 그쪽으로 보내는 게 맞지 않나?"
"전 어디까지나 제일 강한 부대를 대형 거점에 보내는 거에요. 게다가 제가 동행할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네요."
"으음......일단 알겠다."
질문을 한 수인은 아까 대련을 보지 않은 수인이었다. 하긴 보질 않았으니까 우리 수준에 대해 의문을 삼는 거지. 대련을 본 사람들은 판도라의 말에 다들 납득하고 있잖아.
"또 다른 질문은요?"
"만약 한 곳이라도 토벌에 실패하게 되면 어떻게 할 예정이죠? 모든 계획은 현재 첫 분산 토벌이 성공할 것을 전제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실패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되지만.....만에 하나 실패하실 경우 혹은 실패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즉시 후퇴하여 거점을 이탈하는 녀석들만 붙잡아주세요. 그 후 나머지 부대가 토벌을 완료하고 난 후 합류해 한 번에 돌격합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경우는 외부에서 지원 병력이 오는 것이니까요."
"일반적인 연락은 수정구로 하지 않나요? 그건 어떻게 막으실 건지......"
"수정구 간의 연락을 차단하는 도구를 사용하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직접 전령을 보내 전하는 것만 차단한다면 녀석들은 소식을 알 길이 없죠."
이윽고 몇 가지의 질문이 더 오갔고 모두 답변을 받은 뒤 판도라는 출정을 선언했다.
"신들의 이름 아래, 저 판도라는 광신도들의 완전 토벌을 선언합니다!"
그렇게 이종족 영역 광신도들의 토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