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신의 축복을 받는 남자
"그를 되찾았으니 이젠 우리도 돌아가야겠군."
"저....저기....아폴론 님...."
아폴론을 불러세운 건 스피나였다. 그녀는 자신의 신과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아폴론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피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언제나 너를 보고 있단다."
"......네...."
스피나는 그녀의 말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남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누구나 좋아하는 거니까. 게다가 그 상대가 자신의 우상이라면 더더욱.
"미노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피곤하시겠지만 저희와 같이 올림포스로 가주시겠습니까?"
아테나는 내게 동행을 부탁해왔다. 올림포스로 가는 데이트인가? 이 처녀신님이 혹시 나한테 반한건가? 하긴 내가 좀 미남이긴 하지! 내 얼굴이 곧 개연성이다 이 말이야.
"제우스 님이 부르셨습니다. 외부 차원에 있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취조하고 신체를 조사해 봐야 할 필요가 있으시다고 하십니다."
아테나가 내게 반했다는 건 그저 내 망상에 불과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거부권도 없을 테니까요."
"잠깐....! 일단은 좀 쉬게 해줘야.....!"
"저도 쉬게 해주고 싶습니다만......그를 데려오라는 것이 주신인 제우스 님의 명령이라서요. 그는 성미가 급하신 분이라 늦어지면 어떻게든 압박을 가하겠지요. 주신인 주제에 속도 좁으니까요. 그러면서 또 대범한 척 하기도 하고요."
아테나는 은근히 제우스를 비하했다. 맺힌 게 많은가봐.
"미노 님은 제가 잘 챙길게요. 걱정마세요."
나를 걱정하는 미아에게 아프로디테는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면 아프로디테가 제일 위험한 거 아닌가?
여신들과 나는 신전으로 돌아갔고 여신들이 강림했던 장소로 갔다. 이윽고 환한 빛이 나를 감쌌고 잠시 후 빛이 걷히자 눈앞에 보인 건 화려한......건 하나도 없고 평범한 통로였다.
뭐지. 이.....이딴게 신들의 세계? 웅장한 모습은? 신들이 있는 공간이잖아. 왜이리 초라한건데. 저예산이야? 건설비리 뭐 그런건가?
"여기는 신화별 공간이 나뉘는 갈림길이에요. 저희들이 속한 그리스 신화 외에도 여기 있는 프레이야 같이 다른 신화의 신들도 그들의 공간이 있으니까요."
그렇네. 프레이야만 해도 북유럽 신화의 여신이니까. 아스가르드 같이 다른 공간도 있겠지. 그래도 이 통로 덕에 다른 신화의 신들끼리도 서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거구나.
"그럼 저는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당신들도 용무가 있으니......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요. 아프로디테."
"저도 오랜만에 당신이랑 한번 진~하게 뒹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둘이 그렇고 그런 관계였던건가. 저 둘 사이에 내가 낄수만 있다면 참 환상적일 텐데......뷰빔 커플 사이에 쥬지난입......가능!
"일단 올림포스로 가시죠 미노 님."
아테나는 둘의 대화 따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이끌었지만 귀가 새빨갰다. 들리긴 했던 것 같다. 처녀신인 그녀가 듣기에는 좀 수위높은 대화긴 했지.
잠시 통로를 걷자 포탈이 보였다. 저기로 들어가면 올림포스가 나오는 거겠지?
통로 너머에 보인 것은 구름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광경이었다. 이곳이 올림포스구나. 그야말로 신들의 공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공간이네.
"둘러볼 여유가 없습니다. 바로 으로 가시죠."
나는 그녀의 안내대로 광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헐벗은 여성들이 보였다. 내 여자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미색이 출중한 여자들이었다. 저 여자들의 보일 듯 말듯 한 야한 분위기의 옷차림을 보자 슈브랑 교장한테 그렇게 착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기할 것만 같았다.
"저 아이들은 님프라고 해요. 미노 님, 저 아이들이 끌리는 건가요?"
"부정은 못하겠네요. 저도 남자인지라."
"일단은 조금 참아요."
그녀는 내 귀게 입을 대고는 작게 속삭이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제가 얼마든지 해드릴테니까요."
헤으응....아프로디테 눈나.....
"아르테미스, 우린 존재감이 없는데?"
"저런 대화에는 딱히 끼고싶지 않아요."
뒤에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만담이 들려왔다. 하긴 그녀들도 처녀신이었지. 처녀신들에게는 조금 불쾌하게 느껴질 만한 대사일지도 모르겠네.
잠시 걷자 12개의 의자가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여기가 올림포스 12신이 모이는 장소인 것 같다. 의자의 옆에는 화로도 하나 있었다. 저기가 헤스티아가 앉는 장소인가보다.
헤스티아의 자리가 따로 있다는 건 12신의 자리를 디오니소스에게 양보했다는 거고.
"아직은 아무도 안 온 모양이네요. 조금 기다리시면 다들 올 겁니다."
아테나와 아프로디테, 아폴론, 아르테미스 모두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원래도 위엄이 넘치는 여신들이었지만 그녀들의 자리에 앉자 더더욱 신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는 것 같았다.
"흐응~네가 외부 차원에 갔다왔다는 녀석이구나. 생각보다는 별 것 없어보이는데?"
등 뒤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리길래 뒤를 돌아보자 지팡이를 든 여자가 공중에 떠 있었다. 고양이 상의 귀여운 여자였다. 한쌍의 날개와 두 마리의 뱀이 휘감긴 지팡이를 들고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신이라면.....헤르메스인가?
"헤르메스님이신가요?"
"어? 나 알아? 어떻게 알아? 완전 똑똑하네! 너 맘에 든다! 미노타우로스들은 완전 멍청했던데 너는 좀 똑똑한 거 같아! 반은 인간이라 그런가?"
"감사합니다."
올림포스 최고의 정보꾼답게 내 종족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헤르메스는 남신 아니야? 헤르메스도 아폴론처럼 TS당한거야?
뒤이어 여러 신들이 등장했다. 일면식도 없는 신들이었지만 각자의 특징이 너무 명확했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몸 주위에서 지속적으로 전기가 튀는 신, 제우스.
그 제우스를 갈구면서 함께 걸어오던 헤라.
삼지창을 든 푸른 머리칼의 느끼한 인상의 신 포세이돈.
태닝 피부 여신 데메테르.
매우 화나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나운 눈매의 아레스.
망치를 든 신 헤파이스토스.
머리에 포도 장식을 단 보라빛 머리의 여신 디오니소스.
화로에 살포시 앉는 헤스티아까지.
12신+헤스티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디오니소스는 원래 남신 아닌가? 아폴론, 헤르메스에 이어 세번째 성별이 바뀐 신이네.
TS여도 남자>여자만 있고 여자>남자는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여신이 남신으로 바뀌었다면 참 슬펐을 거다.
"네가 미노라는 소년인가?"
"그렇습니다. 제우스 님."
근엄한 분위기 속 제우스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근데 난 소년 아닌데....나름 성인인데 말이지.....그래도 소년으로 취급이라도 해주는게 어디야. 영겁의 세월을 산 신들이라면 나 따위는 아기로 보일테니까.
"외부 차원에 갔을 당시 무엇을 보았지?"
"괴물들과 크툴루라는 여신, 그리고 슈브 니구라스라는 여신을 보았습니다."
"붙잡힌 이후 무엇을 당했지?"
"딱히 당한 일은 없습니다. 그녀들도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기에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무한착정당하기는 했지만 그건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진실을 얘기하라! 저들이 상당한 각오를 하고 벌인 게 네 녀석 하나의 납치인데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을 리가 없다!"
갑자기 아레스가 끼어들더니 내게 성질을 부렸다. 아니 진짜 별 것 안당했는데.
역시 그의 얼굴대로 아레스는 성격이 더러웠다. 관상 오늘도 1승 낭낭하게 챙겨갑니다.
"아니 정말 없습니다만....."
"내가 그에게 도달했을 때 그는 붙잡혀있는 상태긴 했지만 딱히 무엇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네 녀석의 추측을 마음대로 사실로 왜곡하려 들지 마라."
아테나는 아레스를 향해 신랄한 비판을 날렸다. 그나저나 우리한테는 존댓말로 정중하게 대우해주던 여신님이 반말이라니. 아레스가 어지간히 싫은가보다. 원래 아테나와 아레스 사이가 별로 안 좋기는 했지.
"아폴론, 그의 몸은 조사해 봤나?"
"여기까지 오면서 이미 알아봤어. 딱히 이상은 없더라고. 녀석들이 심어놓은 기생체 같은 것도 없었고."
걷기만 했던 것 같은데 의술 도구도 없이 조사를 끝냈다고? 의술의 신이라는 칭호가 괜히 있는게 아니구나.
"그럼 이걸로 끝인가요? 저는 저 아이와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는데."
"하계의 존재 따위와 무슨 대화를 한다는거지? 신의 품위를 생각해라 아프로디테."
"올림포스 최고의 망나니인 당신이 할 말인가요 아레스?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다니.....혹시 질투해요? 질투하는 남자는 꼴불견이랍니다."
"뭐.....뭐라고! 이 년이 건방지게.....!"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의 비아냥에 분노하면서도 정곡을 찔렸는지 뭐라 하지는 못하고 홀로 분노를 삭힐 뿐이었다.
"기다려라. 아직 마지막 이야기가 남았다.
거기 미노 소년. 슈브 니구라스와 그 권속들은 계속해서 너를 노려올 거다. 대책은 있느냐?"
"저를 노려오는 건 당연한 거겠죠. 대책이라 해봐야 한가지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들의 계략에 당하지 않도록 그저 힘을 기를 뿐이지요."
"그렇다. 그것이 정석적인 방법이지. 허나 너무 느리다. 우리가 도움을 주마."
"나 제우스는 번개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나 헤라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나 포세이돈은 바다의 축복을."
"나 아테나는 철벽의 방어를."
"나 아레스는 무엇보다 날카로운 공격을."
"나 아폴론은 태양 아래에서 강해지는 능력을."
"나 아르테미스는 달 아래에서 강해지는 능력을."
"나 헤르메스는 누구보다 빠른 두 다리를."
"나 데메테르는 기아를 느끼지 않는 몸을."
"나 아프로디테는 모든 생명에게 사랑받는 능력을."
"나 디오니소스는 그대를 마주하는 적들에게 혼란을."
"나 헤스티아는 불꽃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신들은 자신들의 권능을 내려주었다. 즉시 내 몸에는 엄청난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똑같은데?
그러나 몸을 내려다보자 내 몸 주변에 번개가 튀고 있었다. 그냥 내가 눈치를 채지 못했던 거구나.
번개의 이미지를 상상하자 그대로 번개가, 불을 떠올리자 불이, 물을 떠올리자 물이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마치 내 몸인듯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었다. 그야말로 내가 정령이 된 것 같았다.
헤라가 내려주었던 변신 능력도 사용할 수 있을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가능했다. 전달자 아저씨처럼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을 떠올리자 시야가 높아지더니 그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한창 새로운 힘에 빠져 여러 가지를 시험해보다가 신들의 앞이라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살며시 올려다보자 신들은 흐뭇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장난감을 선물받은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님 같았다. 아레스같이 못마땅해 하는 신도 있는 것 같았지만.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영광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부는 됐다. 앞으로 그 힘을 사용하며 적들을 물리치도록. 올림포스의 이름을 더욱 드높일 수 있도록 정진하도록 해라."
생각해보니 이 힘의 원천은 올림포스의 신들이니까 내가 이 힘을 활용해 이름을 떨칠수록 저들의 위상도 높아지겠구나. 힘을 준 것도 명분 외에 실리가 껴있는 계산이었네. 어차피 나도 손해볼 건 없으니 윈윈 전략이긴 하지.
"그럼 오늘의 모임은 이걸로 폐하겠다. 아테나. 그를 데려다주도록."
"잠깐. 저 아이랑 긴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는데 제가 잠시 데려가도 되죠?"
"상관없다. 다만 너무 오래 붙잡지는 말도록."
아프로디테는 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내려와 내게 안겨오더니 팔짱을 껴왔다. 내 팔에 그녀의 가슴이 맞닿았고 팔에서는 최고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자! 가요 미노 님! 극진하게 대접해 드릴게요! 그 다음에는....우후후...."
나를 바라보는 아프로디테의 눈에서는 무한한 애정이 엿보였다. 예전에 뿌려놓았던 씨앗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건가! 드디어! 여신과의 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