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습격(5)
눈을 감은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느낄 새도 없이 즉사해버린건가?
"눈 떠요. 안죽었으니까."
살며시 눈을 뜨자 내 눈앞에는 세희가 서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반으로 갈라져 고릴라에서 고/릴라가 되어버린 괴수가 있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둘만 있었다면 반말했겠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보는 눈을 의식해서 존댓말을 썼다. 지금의 우리 관계는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선후배 관계니까.
"뭘 이정도로요. 미노 님이야말로 여기 사람들을 지켜주셨던 거죠?"
"그렇....뒤! 뒤! 뒤에 괴수!"
그녀의 등 뒤에서는 어떻게 재생했는지 다시 고릴라로 돌아온 괴수가 주먹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채였다.
"용케 재생했네. 반으로 자른 정도로는 부활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럼...수백 조각이 되어도 다시 재생할 수 있을가?"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창을 한 번 휘둘렀고 그와 동시에 고릴라는 수백 조각으로 나뉘어져 버렸다.
분명 한 번 휘두른 것 같은데 수백 조각이라니....내 동체시력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라는 건가?
거기에 조각들은 금새 돌로 변해버렸다.
그녀에게 깝치면 안되는 이유가 늘었다. 내 쥬지가 돌이 될 수는 없잖아.
나는 그녀의 무력을 보고 입을 벌리고는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이걸로 일단 안심인가."
"......아! 원숭이 괴수! 저 고릴라의 몸에서 나왔던 원숭이 괴수들! 걔네까지 잡아야......!"
워낙 목숨이 위험했던 상황이었기에 순간 잊어버리고 있었다. 큰일났다! 지금쯤이면 사람들이.....!
"괜찮습니다. 이미 다 잡았으니까."
"예?"
"끼에에에에에에.........!"
그 때, 원숭이 한 마리가 내 볼을 스치며 저 멀리 날아갔다.
뒤를 돌아보자 무수한 화살에 꿰뚫려 벌집이 되어버린 원숭이 괴수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미노~우리를 잊으면 안되지~"
"원숭이들은 저희가 처리했어요."
원숭이들을 물리친 건 쌍둥이 궁수 자매였다.
"스피나! 세르피나! 몸은 좀 괜찮아진거야?"
"아직 만전의 상태라고 할 정도는 아닌데 가만히 의료실에만 있는 것도 찌뿌듯해서~"
"마침 회장님이 오셔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길래 저희도 데려가달라고 부탁한 거에요."
"그나저나 이번에 아카데미를 습격한 간 큰 사람들은 대체 누구야? 무슨 배짱으로 이런 일을 벌인거지?"
"광신도들. 그들은 사람들을 의식의 제물로 삼으려는 걸거야. 수 만 명의 사람들을 제물로 바쳐서 예전처럼 신을 다시 한 번 강림시킬 계획이겠지."
""미친놈들이네(요).""
"미노, 마나 다 떨어졌지? 얼굴도 완전 기운없어 보여."
그렇게 티나나?
"조금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어요. 괜히 무리하다가 다치면 안되니까요."
"그게 좋겠군. 너희들은 쉬고 있도록. 나는 먼저 떠나 보겠다. 아직 가야 할 건물이 많으니."
세희는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내가 달리는 것보다 속도가 빠르네....
그나저나 나한테는 존댓말 해주면서 얘들한테는 반말하네. 비밀 관계일 때가 아니더라도 나를 특별취급 해주는건가?
"미노, 조금 쉬어. 혹시 적들이 오더라도 우리가 처리할 수 있으니까. 우리 믿지?"
"그래요. 만전의 상태에서 싸우는 게 중요하다고요."
"그럼.....조금만.....쉴게...."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 · ·
스피나와 세르피나는 쓰러지듯 잠든 미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르피나, 아르테미스님과 연락 돼?"
"아니, 나도 안되는 것 같아. 이런 가정은 별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 저들이 막고 있는 거 아닐까?"
"신과 사도 사이의 연락을 끊을 수 있는 마법이 있어? 저들 중에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신과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는 딱 두가지 뿐이야. 연락이 막히거나, 신께 이상이 생기거나. 후자의 확률은 전자보다 더 말이 안되는 상황이니 확률상 전자가 유력하다고 봐야지."
"괜찮아. 그분들이라면 분명 대책을 세워주시겠지. 우리는 그때까지 버티면 되는거야. 우리에겐 그분들이 내려주신 힘이 있으니까."
· · ·
눈을 뜨자 또 그 아저씨다. 전달자 아저씨. 언제쯤 그만 나타나는 걸까.
아저씨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있었다.
"해냈구나! 해냈어! 드디어 새로운 여자를 안았구나!"
시발. 어떻게 안거지? 설마 다 보고 있던 건가?
"자네가 여자를 안을수록 나에게도 영향이 오니까 알 수 있다네. 그리고 자네 갑옷의 위력이 상승했다는 게 느껴지지 않았나?"
생각해 보니 그렇다. 촉수남과 싸울 때 갑옷이 깨지지 않고 오래 버텨주었다. 그랬기에 당하지 않고 역습을 가할 수 있었던 거고.
"내가 전에 말했었는데 기억하나? 여자를 안을수록 강해진다고. 신체 능력의 강화와 더불어 여자를 안으면 귀기의 수준이 높아지지. 총량은 많이 쓰면 쓸수록 늘어나고."
여자를 안으라는 이유가 있었구나. 역시 좀 꼴받긴 해도 날 위해주는 아저씨다.
"그런데 복종 서약은 안맺었나?"
복종 서약? 가장 빠르게 주인님과 노예 관계를 맺은 게 그녀일텐데?
"말로 하는 관계가 아닌 진심으로 이루어진 관계를 말하는 거라네. 기존 여자들과 그녀의 차이를 떠올렸을 때 차이를 알지 못하겠나?"
.......모르겠는데? 오히려 다른 여자보다 더 상하관계가 명확한데?
"눈치가 없는 후손이구만. 그녀의 몸에 문양이 떠오르던가?"
아. 그때는 흥분해서 그냥 넘어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문양이 없었다. 말로는 주인님 관계지만 실상은 아니었다는 건가?
뭐 그렇다고 배신감이 느껴지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단지 다음번에 할 때 진짜로 굴복시켜주겠다고 다짐했을 뿐.
아니 잠깐만......아저씨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뭘 말인가?"
복종 서약 여부! 시발 이 관음충 새끼! 녹화해서 여러 본 돌려보는 거 아냐?
"......복종 계약 여부는 느낄 수 있다네. 복종을 맺은 여성과는 강한 연결고리가 느껴지니까. 그리고 불쾌하다면 기록은 삭제하도록 하겠네."
진짜 기록해놨네. 변태새끼.
"그런데 혹시 자네 문신 좋아하나?"
말 돌리는거 보소. 물론 좋아하긴 합니다. 자궁문신이라던가. crotch tattoo라던가. 아주 좋아합니다.
"방금 전 연결고리 얘기 기억하나?"
10초 전에 말했는데 그새 까먹으면 그게 붕어지.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여자에게 자네의 흔적을 많이 남기면 남길수록 강해지네. 그만큼 자네의 것이 되어간다는 증거니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방법이 문신이라네. 간단하지?"
뭐 그럼 문신 기계라도 장만하라는 건가? 그리고 그런거 쓰기는 싫은데....문신은 꼴리지만 내 여자 몸에 문신기계 대는건 싫어.
"뭘 그런 쓸데없는 도구를 쓰려 하는건가? 자네가 원하면 자동으로 새겨질텐데."
정말 지나칠 정도로 편리한 종족이다. 날먹으로 전생시켜준 아저씨에게 오늘도 감사인사를.
"아 그리고 자네 귀기를 폭발시키는 기술을 쓰던데 그 폭발하며 퍼지는 귀기를 조종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게. 신체 내부의 기운 뿐 아니라 외부의 기운까지도 조종할 수 있다면 새로운 혈통 해방의 길이 보일지도 모르지."
전에 설명해 줄 수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말이 이렇게 쉽게 바뀌는거야?
"세상에 절대적 규칙은 없어. 상황 따라 흘러가는 거지."
진짜 뻔뻔한 아저씨다. 그야말로 전적전이다. 전달자의 적은 전달자라고.
"아무튼 이제 다시 가보게나! 다음에 만날 때는 여자 좀 늘리고!"
주책맞은 건 덤이고.
· · ·
"끄응......"
정신이 강제로 이동되는 듯한 감각. 몇번을 겪어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미노, 일어났어?"
"금방 일어났네요? 누적된 피로도 보통이 아니셨으니 더 주무셔도 되는데."
"빨리 일어나야 더 싸우지. 다른 사람들도 싸우고 있을텐데 그들만 무리시킬 수는 없잖아."
그런데 주변에 사람들의 기척이 없다. 납치....라고 하기에는 둘이 너무 평온하고.
"여기 있던 사람들은?"
"교관님들이 오셔서 대강당으로 데려갔어요. 사람들을 거기로 모으고 있대요. 한 군데에 모여있어야 지키기도 편하다면서."
"우리는 너 기다리느라 안갔어! 잘했지?"
"그래. 고맙다."
"미노 님도 일어났으니 이만 이동할까요? 수정구에 교관님들이 수색을 완료한 장소나 수색중인 장소가 표시되고 있으니 아직 조사되지 않은 곳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어디보자.....남은 건물이.....
"여기로 가자. 여기랑 여기 정도만 수색하면 끝날 것 같네."
"가자! 그 빌어먹을 광신도들한테 화살 세례를 내려주겠어!"
"반드시 그 자들에게 자신들의 업보를 돌려받게 해주겠어요. 반드시......."
· · ·
신비한 공간, 신계에서는 세 명의 여신이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폴론, 아직도 연락이 되질 않나요?"
금발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었다. 하도 세게 깨물어 피가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듯 노이즈가 낀 듯 지직거리는 수정구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사도로 임명한 자와는 바로 연결이 되어야 할텐데......이상하군."
"저도 연결이 안돼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사도에게 연락을 보내봤지만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침착해 보였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굉장히 초조한 상태였다.
"아르테미스......당신도요? 한 명도 아니고 둘 다 안되는거라면.....그들 측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네요."
"사도에게 보내는 연락 외에도 신전에 현신하거나 신언을 보내려 하는 것조차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딱 가능성은 딱 하나뿐이군. 누군가가 우리들의 간섭을 차단하는 결계를 쳤다."
"신계에? 아니면 하계에?"
"당연히 하계 중 일부 지역이다. 다른 지역에는 간단하게 신언을 내릴 수 있어."
"그럼 저희가 직접 현신해서 확인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뇌가 성욕으로 가득 찬 여신답게 무식한 대답이군. 잊은건가? 우리는 무턱대고 하계에 간섭할 수 없다."
"그건 그렇지만....그분이 너무 걱정된다고요...."
"아프로디테 네년이 하계인을 걱정하는 날이 오다니, 내일은 하계가 멸망할 예정인가?"
"그 말은 실례라구요! 저도 소중한 사람은 있다구요! 그 사람이 걱정되는 걸 어떡하나요!"
아폴론의 비아냥에 아프로디테는 발끈하며 외쳤다.
"우리끼리 백날 이러고 있어봤자 딱히 대책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얌전히 기다리도록 하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아르테미스의 냉정한 말에 다른 두 여신은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모두 무사하기를 기도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