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습격(4)
벽이 무너지며 날아오는 파편들에 의해 몇몇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피어나는 흙먼지 속에서 걸어 나온 건 한 명의 남자였다.
덩치가 매우 크긴 했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들고있던 무기도 없었고 마나가 느껴지지도 않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런데 분명 평범한 남자인데.....어떻게 대피소 벽을 부순거지? 마나를 포함하지 않고 순수한 신체 능력으로 벽을 부쉈다는 건 말이 될 수가 없다.
대피소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단단한 건물 중 하나니까. 아마 나도 귀기 안쓰면 못 부술걸?
"어쩐지 제물 수가 적는 것 같더니....여기에 모여있었군."
어째 광신도들은 하나같이 사람이라 안하고 제물이라 한다. 사람 취급도 안한다는거냐? 이래서 광신도가 싫다니까?
멀찌감치 서있던 한 남자가 당당하게 외쳤다.
"넌 누구냐! 여길 습격한 놈들이냐!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얌전히 꺼져라! 그럼 살려주겠다! 여기에는 미노 선수도 있다고!"
씨발. 싸워야 하는건 난데 왜 님이 나서고 지랄이세요? 대피소 벽 박살낸 거 보면 딱봐도 평범한 남자는 아닐텐데 대화를 유도하면서 시간끌기를 해도 모자랄 망정에 왜 도발하냐고.
"네가 여기에서 가장 강한 존재인가?"
"그럼 어쩔건데?"
"제물로 삼을 뿐이다. 강자의 영혼일수록 훌륭한 제물이 될테니."
그놈의 제물 제물 제물! 씨발! 그렇게 제물이 좋으면 지들이 제물이 되던가 왜 애먼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지랄이냐고.
"특별한 영혼을 바친다면 그 분께서도 내게 더욱 힘을 내려주시겠지."
슈슉
그는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뒤쪽이다!
나는 급하게 뒤로 돌아 팔을 들어 느껴지는 살기를 막아냈다. 살덩어리를 처치할 때 둘렀던 팔 부분 갑옷을 해제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캉!
유연하면서도 날카로운 공격이다. 채찍인가?
갑옷을 바로 부수진 못했지만 귀기 소모량이 상당하다. 이 한 방으로 알았다. 저 남자, 스피나보다 강하다.
저건.....촉수?
그의 등 뒤에는 여섯 가닥의 촉수가 꿈틀대며 날뛰고 있었다.
"놀랐나? 이 촉수야말로 선택받은 진정한 인류야말로 선사받을 수 있는 힘이지. 그분께서 친히 선사해주신 힘이다. 이 촉수를 가진 자는 우리 신도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 뿐이다. 나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자신의 촉수가 자랑스러운지 아무도 안물어봤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내용까지 나불나불 떠들어댔다.
그리고, 왜 광신도들은 하나같이 자기과찬이 심하냐? 듣기 좀 거북하다.
"혼자 나불대지 말고 덤빌거면 빨리 덤비라고!"
나는 즉시 전신에 갑옷을 두르고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 돌진에도 남자는 그저 태연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녀석은 촉수 두 가닥으로 바닥을 내리찍어 지면을 뒤흔들었다. 지면이 흔들리자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해 속도를 잃었다.
나머지 촉수 공격이 온다! 돌진을 실패했다면.....방어 태세로 바꾼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서 하체에 힘을 주고는 눈앞의 촉수에 집중했다.
예상대로 녀석은 나머지 네 가닥의 촉수를 내게 뻗어왔다.
스피나 때처럼 간단하게 튕겨낼 수는 없다. 공격에 실린 무게가 다르니까.
촉수는 무서운 속도로 나를 덮쳤다.
캉! 캉! 캉! 캉!
나는 팔을 휘두르며 촉수를 막아보려 했지만 두 팔로는 네 가닥의 촉수를 전부 튕겨낼 수 없었다.
결국 촉수에게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고 한번 빈틈을 보이자 그 빈틈을 무섭게 파고들어왔다.
"마나 갑옷의 문제점이 무엇인 줄 아나? 첫 번째, 효율이 극심하게 떨어진다. 두 번째, 유지, 보수에 또 엄청난 양의 마나를 쓴다."
촉수는 계속해서 내 갑옷을 공격했다. 촉수에 맞을 때마다 귀기가 뭉텅이로 줄어든다. 안그래도 회복할 틈도 없이 계속 소모해대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세 번째, 한 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 마나를 순식간에 고갈시킬 수 있다."
어느덧 촉수는 복부 부근만을 집중적으로 노리기 시작했다.
어딜 노릴지 알면 대응하기 쉽지 않냐고? 세계적 격투기 선수가 얼굴을 집중적으로 노린다고 말을 하면 그 부위를 막을 수 있냐? 절대 못막는다.
게다가 촉수는 쓸데없이 얇아서 방어 자세를 취하려고 해도 사이의 틈으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즉 저걸 막는 방법은 수동적으로 웅크리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쳐내야 하는 건데.....그렇게 되면 이전의 반복이다.
이거.....답없는데?
"네 녀석은 내 촉수를 막을 수 없다. 상성이 나빴군. 내가 너와 같은 권사였다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텐데."
어느덧 전신 갑옷을 유지할 정도도 남아있지 않게 되어 갑옷의 일부 부위를 해제하여 중요 부위만 둘렀다.
갑옷이 완전히 벗겨지고 난 후 촉수에 직격당하면 끝일 것 같은데....
....진짜 외통수인거 같다. 내 인생은 여기까지인건가?
안돼! 씨발! 아직 섹스도 한참이나 모자라다고! 미아랑도 한참 해야하고 루다, 실비아는 얼마 해주지도 못했고 세희도 더 따먹어야 된다고! 거기에 아프로디테! 박아준다고 해놓고 이대로 죽는 건 남자의 수치다!
하렘을 만들어서 아방궁 짓고 산다는 내 꿈을 이루기 전에는 뒤질 수 없어!
귀기는 고갈 직전, 더 이상 갑옷의 능력에 의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유일한 희망은 혈통 해방 능력이 아닌 내 순수한 기술, 격투술이다. 딜찍누가 안된다면 컨트롤로.
격투술에서 배운 걸 생각하자. 회피하는 기술. 흘리는 기술. 막아내는 기술. 튕겨내는 기술. 전부 종합해 최적의 기술을 떠올려!
충분한 전투 경험은 이미 머릿속에, 그리고 몸에 각인되어 있다. 미아와 계속해서 싸우면서 거의 모든 방식의 적과 싸워봤으니까.
격투술의 기본부터 응용, 그리고 실전 경험. 그 전부를 엮어내라! 이 상황을 극복할 하나의 해답을 찾아내는 거다!
지금껏 위기다운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피어나지 못했던 그의 천부적인 전투 재능은 지금 개화하고 있었다.
· · ·
촉수 남자, 게이우스는 상대가 권사임을 확인한 순간 승리를 직감했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주먹을 사용하는 권사는 다수의 촉수를 활용하는 자신과는 상성이 나쁘니까.
상대의 갑옷의 방어력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만 자신의 촉수 공격이라면 언젠가 뚫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상대의 움직임은 물론 준수했으나, 게이우스 입장에서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곧 끝나겠어. 우리 편이 아닌 게 아쉬운 인재지만.....이만큼 강자의 영혼이라면 훌륭한 제물이 되어주겠지.'
그러나....그의 예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노의 움직임이 조금씩 변화하고, 촉수에 대응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캉! 캉! 캉! 캉! 캉! 캉!
여섯 가닥의 촉수는 분명히 미노를 덮쳤다. 그러나 촉수의 움직임을 흘려내어 촉수끼리 충돌시키거나 일부를 붙잡은 상태에서 나머지 촉수를 회피하는 등 절묘하게 공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게이우스의 촉수 공격은 여섯 가닥의 연계를 전제로 하는 공격이었기 때문에 일부의 움직임이 막힌다면 그만큼 빈틈이 생겨났고 미노는 그 빈틈을 영리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촉수를 어느 방향에서 쏘아도, 어느 강도로 쏘아도 닿지 않는다. 그 사실이 게이우스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말도 안돼......계속 적응 중이라고? 내 촉수에?'
'이 녀석은 내버려두면 위험하다! 무조건 여기서 죽여야 한다!'
'공격을 계속해서 흘려낸다면.....흘려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으로 뚫어주마!'
그는 촉수를 하나로 모아 미노를 조준했다. 그 모습은 마치 날카로운 송곳을 연상케 했다.
촉수 송곳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미노에게 돌진했고 미노 또한 피할 생각은 없었는지 주먹에 귀기를 담아 후려치려 했다.
'걸렸다!'
그 순간, 송곳이 다시 여섯 가닥의 촉수들로 갈라지며 동시에 미노를 덮쳤다. 한 방 싸움을 예상하고 있던 미노에게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이걸로 끝이다!'
"역시 그렇지~네가 일격 승부를 받아들일 리가 없지."
미노는 여유로운 말투였다.
그 후, 미노를 중심으로 귀기의 폭발이 일어났고 게이우스는 그대로 휩쓸렸다.
· · ·
저 녀석이 묵직한 일격을 날릴 때 맞받아치려 한다면 그 즉시 촉수들을 분리시킬 거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주먹에 모든 귀기를 싣기보다는 일부만 실어놓고 나머지 귀기는 전부 뿔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저 촉수남은 내 예상대로 움직여 줬고.....그 자리에서 응축된 귀기를 터뜨려버렸다.
남은 양이 워낙 극소량이었기에 죽일 수 있는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지만 촉수남의 움직임을 봉하고 무방비 상태로 만들 수는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 모를 일격 승부를 위해 주먹에 모아 놓은 내 남은 귀기 전부. 그 주먹을 무방비해진 녀석에게 꽂아넣었다.
푸화아악!
주먹은 두부를 부수듯 부드럽게 녀석을 관통하였다.
"끄어어억......어째서......나는 숭고한 사명을 완수해야만 하는데....."
"사이비 쉐끼가 숭고는 지랄. 남을 죽이려고 했으면 너도 죽을 각오 정도는 했어야지. 그냥 곱게 뒤져."
"신이시여! 지금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Finis autem animae(영혼의 최후)!"
촉수남은 갑자기 이상한 주문을 외쳤다. 그러고는 눈앞에서 폭발해버렸다. 방어할 귀기도 없는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맞아버리면.......
후우!
번쩍!
그 때 올빼미 소리가 들리더니 내 눈 앞에 마나 방패가 생겨났다. 뭐지? 뭐가 됐든 덕분에 살았다! 고마워요 올뺌맨!
방패에 감탄하고 있을 때 문뜩 앞에서 기척이 느껴져 앞을 보자 고릴라의 모습을 한 괴수가 보였다. 덩치는 나랑 비슷한 것 같았다.
저 피부 뭐야? 이 고약한 냄새는 뭐고? 촉수남이 최후에 발동한 마법으로 탄생한 건가?
본래 저주받은 존재를 탄생시키는 마법, 영혼의 최후는 육체를 구성하기 위한 다수의 시체와 영혼을 구현하기 위한 다수의 영혼이 있어야 하지만 게이우스의 영혼은 강한 힘을 가졌기에 하나의 영혼만으로 조건을 충족하였다. 대신 시체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에 나타난 괴수는 소형의 괴수였다.
나는 눈앞에 나타난 괴수에 절망하고 있었다.
기껏 영혼까지 끌어모은 귀기로 간신히 촉수남을 물리쳤더만 새로운 괴수가 짜잔 하고 등장해버리네? 2페이즈냐? 정신나갈것 같네.
고릴라 괴수는 자신의 몸에서 작은 원숭이 괴수들을 방출했다.
원숭이 괴수들은 저만치 떨어져있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나갔고...그들을 막으려 했으나 고릴라 괴수가 나를 덮쳐왔기에 내 코가 석자였다.
저 괴수들이 사람들을 죽이면 내가 고생하며 구한 의미가 사라지는데.....!
어떻게든 고릴라 괴수를 떨쳐내야 했지만 귀기도 바닥났고 체력도 많이 소진된 상태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휘청-
이런! 나는 순간적으로 찾아온 탈진 현상에 균형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쿠워어어어!"
고릴라 괴수는 내 무방비한 모습을 보고 양 주먹을 높게 들어 내리찍을 준비를 했다.
시발....내 인생은 여기까지네. 미안하다 내 여자들아. 나 없이도 행복하길. 다른 남자는 만나지 말고....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