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본선-16강
어느덧 주말이 지나고 본선 첫 날이 밝았다.
주말 동안은 미아와 본능에 충실한 나날을 보냈기에 지금의 나는 욕망에서 초월한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고 현자타임이 온 건 아니다. 컨디션은 쌩쌩하다. 좋은 상태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이 상태라면 상대가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아!
"레아야 가자."
"네!"
나와 레아는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으로 가던 길에 보이는 학생들은 시험에 대한 긴장 때문인지 다들 어두운 얼굴이었다. 불쌍하네. 저 기분 알지. 시험의 부담감. 나는 만점처리인데 하하
경기장에 도착하니 직원이 개인 대기실로 데려다 주었다.
"미노님과 그 일행분이신가요? 대기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기실에는 음식과 음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먹고 싶은 만큼 배불리 먹으라는 건가? 나는 사양이다. 괜히 먹었다가는 배도 아프고 역류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경기 끝나고 나면 다 먹어야지!
레아는 배고팠는지 엄청난 기세로 먹고 있었다. 체구는 작달막한 녀석이 먹은 음식을 어디에 보관하는 건지 웬만한 성인들보다 더 많이 먹는다.
16강 상대가 누굴지 궁금해져 대진표를 보았다.
내 상대는....카리우스? 딱히 아는 이름은 아니다. 왠지 축구하면 골키퍼를 맡을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대회 결승에서 심각하게 말아먹을 것 같다.
상대가 스피나, 혹은 세르피나만 아니면 상관없다. 무난하게 8강에 진출 할 수 있겠네.
대진표를 보니 나, 스피나, 세르피나, 천세희는 모두 다른 상대와 붙는다. 16강에서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 기준 제일 강한 4명인데 한명이 16강에서 탈락해버리면 좀 불쌍하잖아.
어차피 이 네명끼리 붙는 거 아니면 떨어질 일도 없을테니 이대로 쭉 이어진다면.....
나와 세르피나가 4강, 스피나와 천세희가 4강에서 붙네. 이정도면 운영진 측에서도 우리 넷이 진출할 걸 알고 일부러 네 명을 최대한 늦게 만나게끔 배치한 것 같다.
개막전은 내가 나오네. 인기 많은 녀석으로 화려하게 스타트를 끊겠다는 건가.
"안녕하십니까! 오늘 경기의 해설은 예선과 마찬가지로 저 후버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경기 시작에 앞서 우승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은 주요 선수들부터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미노 선수! 미노 선수는 신체 점수 1000점을 획득한 유일한 1학년이죠. 편입생 중 압도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다른 학생들에게 인정받았지요. 현 8명의 1학년 편입생 중 유일하게 다른 재학생들에게 인정받은 학생입니다.
오.....다른 학생들이 날 인정했단 말이야? 역시 직접 보여주는 것만 한게 없다니까? 누구나 다 의심이 있다. 당해보기 전까지는.
"다음으로 스피나 선수! 본인이 밝혔던 대로 아폴론 여신의 가호를 받은 학생이죠! 현재 2학년으로 플레어 궁술 수석이라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대회는 의외로 이번이 첫 출전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세르피나 선수! 스피나 선수와 쌍둥이 자매로 그 중 동생입니다. 언니인 스피나 선수가 아폴론 여신의 가호를 받았다면 세르피나 선수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가호를 받은 학생입니다! 마찬가지로 2학년에 문라이트 궁술 수석이었습니다!
쌍둥이 언니인 스피나 선수에게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어 대회에 함께 출전했다고 하는군요! 누가 우승할지 기대가 됩니다."
쌍둥이자매답게 둘다 궁수에 자매 여신의 가호를 받은건가. 둘 다 클래스 수석이라니 갑자기 조금 긴장되는걸?
뭐 그래도 붙으면 무조건 내가 이기겠지만.
"마지막은 천세희 선수입니다! 이 선수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거라고 생각합니다! 입학 직후부터 단 한번도 우승을 놓친 적이 없던 선수!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용사의 칭호를 따낸 명실상부 아카데미 최강!"
저 사람이 싸우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솔직히 이길 확률은 낮다고 생각한다. 흔히 고수는 상대방을 보는 것 만으로도 어느 정도 실력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잖아? 그런데 그녀를 보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일반인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은 느껴져야 정상인데 그녀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바위를 보는 것처럼.
그만큼 나보다 우위라는 거겠지. 그래도 내 전력을 다하면 승률이 1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대기실에서 수정구를 통해 알아보니 본선 진출자 중 우승자를 두고 도박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배당은 낮은 순서대로 천세희, 나, 스피나, 세르피나, 그리고 나머지들 순이라고 한다.
이렇게 들으면 딱 하나 차이인 것 같지만 배당률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천세희가 1.005배, 내가 4.5배다. 스피나는 14.6배, 세르피나 14.7배이다.
1.005면 수수료 때문에 원금 회수는 될지도 의문이다. 배당금이 원금도 안되면 돌려주려나? 도박 규칙을 모르니 알 수가 없네.
순간 나한테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금새 그만뒀다. 내가 천세희를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박은 원래 불확실성 요소가 있으면 거는 게 아니랬어. 무조건 내가 이길 수 있을 때만 걸어야지.
레아와 해설을 감상하면서 시합을 기다리고 있자 해설자가 본선 개막을 알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제 138회 하이비스 종합 전투 대회 본선 16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경기에는 과연 누가 나올까요! 천세희 선수? 스피나 세르피나 자매 중 한 명?"
"이제 나오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에 나는 경기장을 향해 어깨를 펴고 걸어갔다. 우승 후보답게 여유를 부리면서 당당하게.
"이럴수가!! 첫 경기부터 우승 후보, 미노의 등장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관객석으로부터 엄청난 환호가 퍼져나온다. 그에 보답하듯 나도 팔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일반 학생들은 시험을 보러 가서 지금 경기를 보러 올 수 있는 건 소수일텐데 관객석은 예선 때와 마찬가지로 만석이다. 그만큼 많은 외부인들이 보고 싶어하는 거겠지.
"예선 15조에서는 혼자서 다른 참가자 연합을 무찌르고 가장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 학생이었죠. 천세희 양에 이어 유력한 우승 후보로 지목되고 있는 학생입니다."
"한편 반대 선수는 누굴까요!"
"네 카리우스 선수네요. 11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던 선수입니다. 현 아카데미 3학년으로 미노 선수와 마찬가지로 주먹을 쓰는 선수입니다."
그게 끝? 해설이 많이 빈약한데요? 거의 편파 해설 수준인데요? 너무하잖아! 쟤도 뭔가 좀 홍보해줘!
"후후후.....대부분은 네녀석의 우위를 점치는 모양이군. 너무 노골적으로 네놈을 띄워주는 해설을 한다고."
"뭐, 나는 그 정도로 당황하거나 말려들지 않는다. 심리전 따위 내게 영향을 주지 못해."
아니, 매우 잘 통하는 것 같은데? 얼굴도 빨개졌고 이도 악물었다. 주먹도 꽉 쥐고있고. 설마 자기 딴에는 진짜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네놈을 쓰러뜨리고 거품을 걷어내주지. 저번 우승자인 천세희를 꺾는 건 3학년의 엘리트, 이 카리우스 님이다!"
"그럼.....개시!"
퍼어어억!
카리우스는 내 주먹 한방에 날아가버렸다.
뭔가 멋들어지게 말하길래 비장의 한 수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역시 라이벌(자칭)은 믿을 게 못된다니까.
"시....시합 종료! 미노의 승리!"
첫 시합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관중들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벙쪄있었다.
3초의 정적 후
입장 때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미노!미노!미노!미노!미노!미노!미노!미노!미노!미노!미노!미노!미노!미노!
"아 대단합니다 미노 선수! 단 일격에 상대를 완벽하게 끝내버렸어요! 역시 우승후보라는 걸까요!! 3학년 중에서도 나름 알아주는 카리우스 선수를 일격에 쓰러뜨리다니요!"
"되게 허무하네. 레아한테나 가야지."
대기실로 돌아가자 레아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아빠 멋있었어요! 단 한방에 끝내버리고!"
역시 다른 관중들이 환호해도 우리 딸이 한번 칭찬해주는 게 더 기쁘다.
이어 다른 선수들의 16강도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스피나, 세르피나 자매는 당연히 상대를 압살하고는 8강에 진출했다.
어느덧 16강도 마지막 경기에 이르렀다.
"자, 이걸로 마지막 경기입니다! 천세희 선수와 기드온 선수의 마지막 대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천세희의 전투를 볼 수 있다. 전투가 짧게 끝난다 할지라도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움직임의 패턴은 어떤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겠지.
"경기 개시!"
그녀가 꺼내든 무기는 창이었다. 창술사였나?
앞날이 더 걱정된다. 검과 창이 싸우더라도 리치 차이 때문에 창이 유리한데 검보다 훨씬 사거리가 짧은 주먹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뚜벅이들은 사거리 차이를 극복하기 힘든 법인데.
"2년 동안 챔피언이었던 너를 꺾는 것으로 올해의 우승자는 내가 된다. 덤벼라!"
상대는 기세좋게 도발한 것 같지만....별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츄우웅!
그녀가 제자리에서 가볍게 창을 한번 찌르자 상대방은 그대로 몸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헐.
단순히 상대방의 몸에 구멍을 뚫은 것 뿐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방의 등 뒤에는 관중석까지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겨우 가볍게 내지른 찌르기 한 방에 상대방, 결계, 관중석을 한번에 뚫어버렸다고?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힘인거냐.
도너츠가 되어버린 상대방은 곧바로 의료실로 송환되었다.
"스....승자! 천세희 선수!"
심판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잠시 멍때리다가 이내 승자를 선언한다.
천세희, 그녀의 수준은 그야말로......격이 다르다. 이게 용사인가?
솔직히 이번 경기를 보기 전에는 혈통 해방 능력을 사용하면 어떻게든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동안의 수련으로 1단계를 넘어 2단계 해방까지 터득했으니까.
그런데.....지금은 그녀를 이기는 모습이 그려지지가 않는다.
레아도 내 고민을 눈치챘는지 내 손을 살포시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아빠라면 분명 우승할 수 있어요. 힘내요."
"고마워."
역시 우리 딸이 최고다.
추가로 오늘 경기 이후 천세희 우승 배당률은 1.001배까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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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속, 로브를 쓴 남자 세 명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카데미 침공은 언제 개시할 건가?"
"대회의 결승 날. 최대의 인파가 몰리는 날 실행한다."
"실수하지 말도록. 천세희 그년의 무력은 절대 무시하지 못한다."
"아~ 너는 이전에 천세희한테 개처럼 맞았었지? 나였으면 사뿐히 즈려밟고 존나 따먹어줬을텐데! 우리들 체면 다 구겼잖아 그때. 니가 좆밥처럼 발려가지고."
"말조심해라. 죽여버리기 전에."
"죽여보던가?"
"둘다 그만해라. 거사는 대회의 결승 날에 치르도록 하지. 그 전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뉘예 뉘예"
"알겠다."
"그럼 이만 해산하도록 하지."
"""모든 것은 슈브 니구라스 님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