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하이비스 아카데미(2)
"여보는 뭐 드실 거에요?"
자장면, 짬뽕, 볶음밥, 제육볶음, 돈가스, 스파게티 등등등 다양한 메뉴가 있었다.
그런데 메뉴 이름들이 너무 익숙한데? 지구 식당 보는 줄 알았어!
"음.....무난하게 볶음밥 먹을래."
"그럼 저는 스파게티로 할게요."
아, 레아가 먹을 것도 포장해가야지. 분명 좋아할 거야.
"레아가 먹을 건 뭐가 좋을까? 점심시간과 오후 강의 사이에 시간이 꽤 있으니까 점심이나 사다 주려고. 방에도 식재료 정도는 있지만 내가 요리를 잘하는 편도 아니고 여기서 사서 가져다 주는게 훨씬 맛있지 않겠어?"
"음......어린애한테는 돈가스가 좋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니까요."
"그럼 그걸로 하자."
메뉴들은 일괄 1만원이었다. 저렴하네.
"밥은 제가 살테니 여보는 맛있게 먹기만 해요."
우리는 메뉴를 주문하고 빈 자리에 앉았다.
"여보, 오늘 강의는 어땠어요?"
나는 제노스 격투술을 신청한 것부터 강의 첫날 펀칭머신을 때린 것, 어쩌다보니 최고점을 얻어 학생장이 되었다는 것 등 전부 이야기해주었다.
"아하하하하하! 학생장이라니! 멋저요~우리 학생장님!"
내 이야기를 들은 미아는 걸신들린 듯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웃지마!
"하아.....말이 학생장이지. 그냥 교관의 노예잖아. 성적을 빌미로 개고생하는 노예."
"그걸 알면서 한거에요?"
"아니! 내가 되고 싶어서 된거냐고! 그냥 진심으로 한대 치니까 천점이 나온 거잖아! 아카데미 학생들 수준이면 당연히 나름 난다긴다 하는 학생들이겠지?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대부분 500점도 못 넘기는거라면 당연히 엄청 빡세겠지? 그런데 이렇게 쉽게 천점이 뜰 줄은 몰랐지!"
내 말에 미아는 한숨을 팍 쉬고는 말했다.
"여보는 자신의 강력함을 좀 알아야 해요. 여보의 근력은 마나로 신체강화 버프를 건 저보다 강하다구요? 아카데미 학생이 아무리 강해봐야 저에 비하면 풋내기들인데 그런 저보다 강한 여보라면 당연히 천점이 떴겠죠."
그.....그런가?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힘 존나 쎄단거지?
단순한 칭찬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노였다.
'에휴, 이 단순한 사람 같으니......'
"미아는 무슨 이야기 할만한 거 없어?"
"저요? 첫날은 평범하게 지나가서 딱히 없는데......"
"그럼 그 평범한 이야기라도 해줘!"
괜히 이야기가 끊기면 뻘쭘해진다. 나만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야기가 멈추고 정적이 찾아오면 괜히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야 할 것 같단 말이지. 이 강박관념 때문에 전생 때 넌씨눈 소리를 몇 번 듣기는 했지만.
빨리 식사가 나왔으면 좋겠다. 말이 없는 타이밍에는 밥이라도 먹게.
"주문하신 볶음밥과 스파게티 나왔습니다!"
드디어 왔네.
"실비아 양이 이 식당 밥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더라구요."
기대감을 한껏 안고 밥을 한숟갈 뜬다.
이.....이 맛은?! 미미(美味)!
그야말로 맛의 신세계다. 거의 미아와 데이트할때 먹었던 스테이크 급인데? 1만원으로 215만원의 음식과 동등한 수준의 맛을 즐길 수 있다고? 214만원 이득봤다! 식비가 복사가 된다고!
"후루룹......여보, 친해진 학우는 좀 있어요?"
"아니? 강의 듣는 사람이 남자밖에 없어서 친구 만들기는 포기했어. 남자랑은 친구 따위 절대 안할거라고! 이따가 역사학 강의 때 친구를 찾아볼 거야."
미아는 내 말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참......여보답다고 해야하나......남자들이랑은 친구를 안 하겠다니......솔직하네요.
그래도 친구는 많이 있으면 좋아요. 커서 다 인맥으로 작용하니까요. 굳이 진심으로 친구가 될 생각이 없더라도 어느 정도는, 하다못해 안면 정도라도 익히는 게 좋을 거에요."
친구 없이 아싸로 살겠다고 선언한 아들에게 충고해주는 엄마의 모습이다. 오랜만에 아내에서 엄마로 돌아온 미아였다.
"아...알았어. 내일 강의 때 말 걸어볼게."
내 말을 듣더니 그제서야 미아는 웃었다.
"좋아요~ 다음에 친구 만들면 저한테도 소개해줘야 해요? 엄마로서 아들의 친구를 한번쯤은 봐둬야 하니까요!"
· · ·
"그럼 여보 공부 열심히 해요~!"
"미아도 오후 강의 힘내."
배부르다. 배도 부르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니 잠이 솔솔 오네. 최고의 날씨다.
레아야, 이 아빠가 맛있는 거 사들고 간다! 조금만 기다려!
· · ·
"레아야, 나 왔다~!"
"아빠!"
문을 열고 들어오자 레아는 순식간에 뛰어와 내게 안겼다. 귀여운 딸래미 같으니라고. 품에 안긴 상태로 얼굴을 비벼대는 것도 귀엽다. 우리 딸, 하고 싶은 거 다해!
그런데 레아야. 안기는 건 좋은데 냄새는 왜 맡는거니? 나 땀냄새 나지는 않겠지? 애한테는 좋은 향기만 맡게 해주고 싶다고.
"레아야, 밥 먹었어?"
"아직 안먹었어요. 아빠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어요."
앗, 난 이미 먹고 왔는데. 괜히 미안해진다.
"돈가스 사왔으니 이거 먹으렴.."
"우와! 아빠 고마워요! 사랑해!"
레아는 돈가스를 보자 기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내게 사랑한다 말해오는데 너무 귀엽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전부 귀여워. 심장에 해로운 딸래미다.
"얌냠냠......아빠도 먹어요!"
"어.....아빠는 이미 먹어서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그....그래요? 같이 먹고 싶었는데......"
내가 이미 먹고왔다는 말에 갑자기 침울해지는 레아다. 다음에는 꼭 레아랑 먹을게! 그러니 울지마!
"다음에는 꼭 저랑 먹어야돼요? 약속~!"
"약속."
다음 강의 전까지 잠이나 잘까 생각해봤지만 레아가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길래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레아야, 오전 강의 얘기라도 해줄까?"
"네!"
미아에 이어 레아에게도 오전 강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미아에게 말했던 것처럼 불평을 내뱉기보다는 천 점을 획득했던 활약을 부풀려 얘기해 주었다. 아이들은 주인공이 활약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한창 이야기하다보니 어느덧 오후 강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럼 레아야, 아빠 강의 갔다올게."
"다녀오세요~"
미노가 문을 나서자 레아는 순식간에 웃는 얼굴을 거두고 정색한 얼굴을 지었다.
"아빠가 재밌게 즐기는 건 좋지만......역시 아빠와의 시간을 뺏어가는 건 짜증나."
"완전 싫어."
레아는 미노의 침대로 파고들고는 그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늑대 수인인 그녀였기에 침대에 남아있는 미세한 체취도 선명하게 맡을 수 있었다.
"킁킁킁......헤헤.....아빠 냄새......"
레아는 그렇게 한참을 미노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다 느껴지는 포근함 속에 잠이 들었다.
· · ·
분명 오후 강의는 세계역사학 강의였지.
이과 과목이 이외에 다른 과목도 많은데 왜 하필 역사학을 골랐냐고? 그야 당연히......역사학을 배워서 다른 이종족과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함이지! 예쁜 이종족 여자를 꼬실때 기왕이면 인간에 우호적인 종족의 여자가 좀 더 친해지기 쉽지 않겠어?
지구에서도 한국과 일본만 봐도 역사적으로 앙숙이면 지금도 반일, 혐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많잖아. 역사적으로 적대적이었으면 지금도 적대적일 확률이 높다고.
그리고 이런 과목일 수록 남자쉑들은 잘 안듣는다고. 지구의 문이과 남녀 비율이라는 빅데이터를 통해 분석한 결과이니 여기서도 비슷할 거다.
강의실에는 남자 여자가 4:6 정도로 있었다. 역시! 믿고있었다고 빅데이터~~! 한창 강의실의 다른 학생들을 둘러보고 있다가 나는 한 학생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와.... 저 여자 진짜 개예쁘다. 긴 백발에 붉은 눈, 창백한 수준으로 하얀 피부가 그녀의 미모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가슴은 적당한 사이즈네. 신은 공평해. 저 외모에 몸매도 사기였으면 진짜 밸붕이지.
저 정도 얼굴이면 아카데미 공식 여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진짜 개예뻐. 슈브나 아프로디테 급 아닐까? 진짜 신 말고 사람이 저런 외모가 가능하구나.
이름을 모르니까 일단 백발녀라고 하자.
백발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더니 할머니 한 분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저 사람이 교수겠지?
"반가워요! 이번 학기 세계역사학 강의를 맡은 지나 교수입니다. 다들 미남미녀네요~ 강의하면서 눈이 즐겁겠어요."
엄청난 하이텐션의 교수다. 할머니가 저런 텐션이라니......주책이야 주책!
학생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던 교수는 백발녀를 보자 놀란 기색이었다.
"어머? 학생회장 님도 이 강의를 듣는건가요? 이거 영광이네요~ 하이비스 아카데미 역대 최고의 천재 천세희 양이 이 강의를 듣다니요. 강의 열심히 해야겠는데요?"
뭐? 천세희? 한국인 이름인데? 한국인도 있는거야? 글로벌을 넘어 차원을 넘나드는 K-인재인거냐?
아, 이전에 미아가 스치듯 얘기한 적이 있다. 이세계인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저 천세희라는 여자가 이세계인의 역할인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학생분들이 두 분 정도 있네요. 세희 학생? 혹시 학생에 대해 이야기해도 될까요?"
두 명? 한명은 나일거고, 다른 한명은 누구지?
주위를 둘러보자 바로 알 수 있었다. 한 명은 나 외의 편입생이었다. 그것도 처음 소개했던 카인인가 코카인인가 하는 놈.
"괜찮습니다."
천세희란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교수의 말을 승낙했다. 진짜 표정 변화가 1mm도 없다. 감정이 있기는 한 겁니까?
"천세희 양은 아카데미에 오기 전, 모험가 등록 반 년 만에 S등급을 달성하고 그 후 용사의 칭호를 모두 획득한 학생이에요. 지금까지 모든 임무를 혼자 수행해왔죠.
대단하지 않나요? 대규모 토벌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의뢰들을 혼자서 완료해오다니요!
용사 칭호 획득 이후 고등교육을 받아보고 싶다는 본인의 희망 하에 이 하이비스 아카데미에 들어와있어요. 지금은 이번학기 후 졸업 예정이죠. 아카데미 3년간 단 한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는 학생이랍니다?"
이....이게 나랑 같은 인간이 맞습니까?......진짜 세계 님 밸런스 안지켜요? 뭐 저런 사기캐가 다 있는거야!
"아!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오늘은 강의 계획 정도만 미리 말하고 넘어가도록 할게요!"
"우선 4주차까지 인간 및 각종 이종족들의 고유 역사를 강의할 거고요.
5주차부터 7주차까지 인간과 이종족들의 관계를 강의하고
8주차에 중간고사를 보고
9주차부터 12주차까지 마족의 역사를,
13주차부터 15주차까지 마족과 다른 종족들의 관계를 강의한 후
16주차 때 전 범위를 대상으로 기말고사를 실시하겠습니다.
매주마다 해당 주차에 배웠던 내용에 대해 레포트를 작성하는 과제가 있으니 유의하시길 바래요~"
"걱정되시는 학생들은 강의 포기하시고 다른 강의 들으시면 됩니다. 아 저희 아카데미의 역사학은 여러 곳에서 인정받은 강의인만큼 우수한 성적을 받는다면 여러 이점이 있겠지만 점수를 못 받는건 안들으니만 못하니까요."
씨발. 잘못걸렸다. 과제 존나 빡세고 시험도 불지옥 난이도 확정이다. 이건 미친짓이야. 나는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강의를 변경하자.' 라는 생각에 도달하기 직전, 천세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근데 저 정도 외모의 여자랑 같은 강의를 듣는 거라면 헬 강의도 들을만 하지 않을까? 친해질 수만 있으면 불지옥강의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데.
내가 저 학생회장이라는 여자랑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오겠어. 심지어 저 여자는 이번 학기가 끝나면 졸업인데.
그래. 듣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여자의 얼굴에 정신팔려 돌아오지 못할 불지옥을 골라버린 미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