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첫 의뢰(1)
게시판에는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아 말을 정정하겠다. A등급이나 B등급같이 고등급 의뢰 게시판에는 의뢰가 많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F급 의뢰 게시판에는 의뢰가 없었다.
왜 없는거지...? 아니다. 생각해보면 간단하구나. 모험가를 동경하는 사람은 많다. 길드 내부에 있는 사람 중 어려 보이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람 비율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야 당연하겠지. 모험가는 이전 세계로 치면 래퍼나 아이돌같은 느낌일 거다. 화려한 면면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지만 그 잔혹하고 고된 이면을 맛보고 대부분이 나가떨어지는 직업.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의뢰인 E등급이나 F등급 의뢰의 경우 풋내기들이 하기 쉬울테니 의뢰의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너무 많아 의뢰가 잘 남아있지 않은거겠지. 또 쉬운 의뢰일테니 그만큼 의뢰 하나당 요구하는 인원 수도 최소한일테고.
게다가 모험가는 주 직업이 아니다. 직업은 직업이지만 겸직이 허용되는 직업이다. 고등급 모험가야 의뢰 비용이 어마무시하니까 그것만으로 호화로운 생활이 가능해서 모험가 일에 전념하는 거겠지만 다른 주 직업을 가지면서 부업으로 모험가 직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도 또한 대개 E나 F등급이고.
설명이 되게 길어졌는데 일단 문제는 내가 의뢰를 못 맡는다는 것이다. 이런 시발
D등급 의뢰부터는 의뢰가 나름 붙어있다. E랑 F만 의뢰 찾기 힘들지 아주.
반즈음 원망의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휘파람을 불며 내 눈을 피한다. 본인도 예상 못했나보다. 분명 엄마도 F급에서 시작했을텐데 의뢰가 수요에 비해 부족하다는걸 몰랐나? 십수년 전에는 모험가가 기피직업이었나보다.
"미노...우리때는 F급도 전투 의뢰 같은게 많았어..."
아무래도 그당시 F급과 지금의 F급은 다른가보다. 그 시절에는 종족별로 배타적이었다고 했으니 당연히 분쟁도 많았을거고 그에 따라 어중이떠중이들은 자연스레 모험가로의 관심을 끊었었나보다.
할 수 있는게 없던 우린 일단 호텔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여관 아니냐고? 그정도 시설이랑 그정도 비용이면 호텔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문을 막 나서려는 그 순간, 길드 직원이 나타나서는 외쳤다. 새로운 F급 의뢰들이 들어왔다고.
이건 기회야. 의뢰를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의뢰 게시판과의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운도 더럽게 없지. 주변의 뉴비들이 눈을 빛내고 있는 것만 봐도 의뢰 가져가기는 그른 것 같다. 다음을 노려야하는건가...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찰나
엄마가 의뢰서를 쥐고 있었다.
엥???? 언제 가져오셨어요? 1초도 안됐는데?
아 이사람 S급 모험가였지. 신체능력이 평범한 저 사람들과 궤를 달리한다. 전력으로 움직이면 순간속도가 마하를 넘지 않을까?
다행히 모험가 길드 입성 첫날에 의뢰를 바로 할 수 있겠다. 이로서 이세계 생활 플랜 1단계를 완료했다. 2단계는 이종족 직접 만나기랑 동료 만들기다.
분명 이종족이랑 융화되었다고 했는데 건물 안에는 인간밖에 없다. 엘프라던가 수인이라던가 용인이라던가 그런거 기대했단 말입니다.
조만간 다시 올때는 이종족과 꼭 만나보고 싶다. 비단 길드 안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라도.
일단은 의뢰서나 읽어보자.
[F급 의뢰서]
약초 구해오기
비아그라 50송이 구해오기
보상 : 50만원
음....따져야 할게 한두가지가 아닌데?
약초 이름이 왜 비아그라야! 아니 뭐 비아그라면 약초 수준의 성능이긴 하지만! 정력제면 탈모 치료약 다음가는 수준의 사기 의약품이긴 하지...만
탈모 치료약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비아그라가 원탑인가? 아무튼 이 세계는 정력제가 귀한게 아닌가? 1송이당 만원이야?
그리고 화폐 단위는 왜 원화야? 참 편리한 이세계구만! 이세계 돈 하면 백금화 골드 실버 쿠퍼 이게 국룰 아니야?
아 내가 글은 또 어떻게 읽냐고? 산속에서 미노타우로스 아버지한테 자랐는데?
그걸로 따지는건 저번에 접수원 눈나 이름표 읽었을 때 딴지를 걸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답을 해주자면 엄마한테 배웠다! 엄마는 인간이니까!
"음...엄마 비아그라를 구해오라는 건가요?"
"의뢰서에 그렇게 적혀있잖니? 자 어서 가자!"
아니 정력제용 약초를 그렇게 구해달라는 의뢰를 대놓고 맡길 정도로 이 세계는 개방적인 건가! 아니면 그정도로 많이 필요하다는 건가? 남자들이 말이야 그런 의약품에 의존해가지고 으이! 남자는 원래 정력만으로 승부를 봐야하는거야!
"어....음....네.."
"미노, 대체 뭘 생각하는 거니? 비아그라는 흔히 구할 수 있는 약초 중 하나란다. 하급 포션 재료로 쓰이는 약초잖니."
"예?"
응? 비아그라가 그냥 포션 재료야? 내가 아는 비아그라랑 달라? 아.....뭔가 창피하다. 하긴 당연한가? 이세계인데 이름이 같다고 효능까지 같을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이전 세계의 비아그라는 약이고 이 세계의 비아그라는 약초인데.
"어릴 때 약초들에 대해 가르쳐줬었는데 그새 잊어버린거야? 우리 미노 머리는 별로 안 좋나 보네?"
그렇지만 모든걸 다 잘하는 완벽한 존재일 수는 없잖아. 인간미 몰라? 신은 내게 피지컬을 주었지만 뇌지컬은 안줬다고! 심지어 미노타우로스는 근육뇌 종족이라 미노타우로스 피가 섞인 나도 근육뇌 상태인거 같단 말이야!
"일단 가요!"
우리는 비아그라를 찾고자 탐험 물품을 구매하고 바스트 언덕으로 출발했다.
언덕 이름 참 독특하다. 슴가언덕이라니 언덕 이름 지은사람 누군진 몰라도 기가 막힌 작명이다.
"비아그라 좀 찾았어요?"
"아니...잘 안보이네.."
비아그라가 자주 자란다는 바스트 언덕으로 가봤지만 막상 비아그라는 별로 보이지도 않고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비아그라 채집은 자주 나오는 의뢰인지라 바스트 언덕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보니 씨가 말랐나보다.
내가 찾아도, 엄마가 찾아도 10송이가 전부였다. 앞으로 40송이나 남았는데 한숨이 나오는 수준이다.
"다른 곳으로도 가볼까요?"
내가 제안했다. 바스트 언덕에서는 아무리 뒤져도 더 이상 비아그라를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면 몬스터와 조우할수도 있지만 나랑 엄마의 힘이라면 마주치더라도 상관없다. 박살내면 그만이다!
엄마는 살짝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결국 찬성했다. 그렇게 우리는 더 깊은 숲을 향해 걸어갔다.
지도를 보니 이 숲의 이름은 푸쉬 숲이라는 것 같다. 푸쉬가...이 push겠지? pussy 이거 아니겠지? 그런데 하필 숲이라 pussy일 것 같기도 한다. 아니 진짜 작명한 사람 누구야?
걷다보니 느끼는건데 이 지도 거리 비율이 상당히 엉망이다. 네오 도시에서 바스트 언덕까지 거리의 비율을 고려했을 때 지금즈음 숲의 안쪽에 도달했어야 하는데 안쪽은 무슨 숲 코빼기도 안보인다.
하....F급 의뢰 하려고 야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걷다보니 밤이다. 그리고 여전히 숲은 안보인다.
내 감각이라면 몬스터의 접근도 바로 알아챌 수 있어서 불침번 같은건 굳이 필요없다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엄마가 자기가 서겠다고 우겨서 결국 나 혼자 먼저 자고있다.
너무 불속성 효자같지만 뭐 어째. 본인이 하시겠다는데. 그만큼 불침번을 서시겠다는 거지.
불침번이 늘 그렇듯 아무런 습격도 없었다.
다음날도 걷고 또 걸었다. 아무 일도 없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뭔가 생길 것 같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무리들은 분명 환각이 아니라 실제겠지.
달려오고 있는 건 허접하게나마 고블린 무리였다....만
'쾅!' '쾅!'
내 주먹질 한방에 고블린들 머리가 터져나간다. 전투 경험도 없고 기술도 없었지만 본능대로 몸을 움직였다. 고블린들은 죽기살기로 싸웠지만 분전해봐야 결국 피지컬 차이는 극복할 수는 없는 법이지.
내 근처의 고블린들을 얼추 정리한 후 엄마 쪽 상황을 보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걱! 서걱!
칼이 움직일때마다 고블린 여럿의 목이 몸과 분리된다. 이후 칼을 칼집에 집어넣더니 발도술의 자세를 취한다. 이후 나온건
촤차차차차창!
'벽력일섬 6연속?'
돌진하며 연속으로 고블린들의 목을 베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나는 칼을 휘두르는 엄마의 모습에 매료된듯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고블린들이 다 정리된 후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고블린들이 달려와서 상대하느라 힘들었네요~"
"그러게. 고블린은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에게는 절대 싸움을 걸지 않는데 특이하네."
"저랑 엄마는 겉모습만 보기에는 되게 약해보이니까요 ."
"어머 난 연약한 여성이라구?"
말도 안되는 소리를....방금전까지 무지막지하게 썰어놓고 연약한 척을 하는건 좀...
"아들? 뭔가 실례되는 생각을 하는거같은데?"
귀신이다 귀신.
아무튼 고블린들은 되게 몸을 사리는 종족이다. 몸이 약하지만 그만큼 영악해서 자신보다 강자에게는 어지간하면 싸움을 걸지 않는다. 감각 또한 예리해서 강자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한테 달려들면서 싸움을 걸던 건 아마도....
"....고블린들은 혹시 무언가에 쫓기던 거 아닐까요? 다급하게 도망가다 보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희를 그냥 방해물이라 생각해서 빨리 치우려 했을수도."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높겠구나."
"그래도 일단은 가보도록 하죠. 저희 정도의 무력이라면 어지간한 상대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거고 못 이길 상대라고 해도 그 존재를 정찰한다는 느낌으로 가면 되니까."
내 말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숲을 향해 걸어갔다.
몇시간 후, 우리는 결국 숲의 초입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진로를 방해할 만큼 풀이나 덩굴이 자란 건 아니었지만 숲을 덮고있는 나무들의 높이가 어마어마했다.
나무 덕에 숲 전체에는 그늘이 져서 덥지는 않았다. 대신 벌레가 매우 많다는게 짜증날 정도? 우리 피부가 너무 튼튼한지라 모기들이 침을 꽂으려 해도 우리 피부를 뚫지 못 해서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그냥 주변에 날아다니는게 거슬린다.
숲 속에는 비아그라가 상당히 많이 자라 있었다. 가장 흔한 약초지만 비아그라가 잘 자라는 조건은 아직도 미스테리라고 한다.
"50송이, 금방 모으겠네요."
순식간에 40송이를 넘게 모았다. 조금만 더 모으면 되겠다. 시간이 좀 더 흘러 한송이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마지막 한 송이를 발견하였고 채집하러 비아그라가 있는 곳에 걸어간 순간, 내 눈앞의 바위들 틈새에는 지하동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