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가 짙게 깔리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밤하늘에 깜깜한 어둠이 번져간다.
[서희]는 혼자 주방쪽에서 분주히 저녁준비에 한창이다.
안방벽에 기대어앉아 tv를 켜둔채 [현주]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다.
[--아직도 화났냐?]
[아니??내가왜??]
[내일 올라가서 우리 현주 맛있는거 사줄께~ 화풀어]
[됐거든요??너나실컷사드시죵]
[됐으면 시집이나 가라고 했지?]
[니가아주매를버는구나???올라오기만해봐??]
"큭큭큭......"
어느덧 저녁준비가 끝났는지 주방쪽에서 [서희]가 조심스럽게 밥상을 들고 높은 문턱을
오르려 하자 벌떡 일어나 [서희]의 두손에 쥐어든 밥상을 받아주었다.
"어이쿠... 조심조심.. 선생님이 들께.."
"호호..괜찮은데..."
큰집의 안방에서 시골밥상앞에 [서희]와 나란히 마주앉았다.
김치찌게와 밥,김치와 김,계란후라이,고추장과 상추가 놓여진 조촐한 밥상이었다.
"이야~ 서희 다컷네에??... 진수성찬이야~..."
"호호.. 아니요.. 반찬이 별로 없어서요..쫌..민망한데여.."
"우와.. 김치찌게.. 니가 끓인거냐??.. 쩝~!!.. 와!!.. 맛있다.."
"........"
나의 오버칭찬에 [서희]가 무척이나 얼굴이 빨개진다.
뽀얀 얼굴에 그동안 묶어올렸던 머리가 길게 풀려진 [서희]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피며 밥을 먹고 있다.
[서희]의 얼굴에는 더이상 [민서]누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읽혀지지 않는다.
그저 약간의 피곤함과 학원선생과의 우연한 만남에 대한 호기심어린 눈빛이 느껴진다.
[서희]입장에서도 투병생활중인 [민서]누나를 삼년이 넘게 병간호를
하면서 그동안 나름대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는 그런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버린 슬픔과 그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라는것도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탐탁치않게 여기는 삼촌을 따라 목포로 전학을 가야한다는 현실에
[서희]는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음주부터.. 학원 공부도 열심히 다시 시작하는거 알지??...."
"...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학원은.. 다니지 않으려구??.."
"... 저.. 사실.."
"...사실.. 왜??.... 괜찮으니까.. 말해봐..."
"....흐음.. 그냥... 학교공부만 하려구여..."
[서희]는 목포로 전학을 가야한다는 얘길 하기가 싫은 모양이다.
조폭두목같은 [재준]이 녀석외에 돌볼 사람도 가족도 없는 [서희]의 앞날이
슬슬 걱정이 되었다.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런얘기해서.. 쫌.. 미안한데... 아버지.. 언제 출소하는지.. 아니?..."
".............."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쥐어든 쇠젓가락 한쌍이 밥알을 깨작깨작거리던 도톰하고
불그스름한 [서희]의 입술에 물린채 멈춰서자.. 온세상이 쥐죽은 듯 멈춰버렸다.
괜한걸 물어봤구나 라는 생각에 지금 이순간 돌이킬 수 없는 후회스러움이 밀려왔다.
"..하하... 미안.. 괜히.. 내가.. 쓸데없는 걸.. 또 물어봤네..."
"..그인간 우리아빠 아니에요.."
"....???...."
"그인간.. 엄마 때리고.. 나도 때리고.. 나랑 엄마가 이사가서 살면..
어떻게 알았는지 또 찾아와서 우리 괴롭히고.. 완전 짐승이었어요.."
순간.. [민서]누나의 얼굴이 확 스쳐지나면서 가슴이 미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린 딸을 혼자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이제는 제법 가라앉았던 [민서]누나의 바다가 다시 내 가슴속에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가 무기력한 폐인처럼 지냈던 그 긴~ 인생의 공백기 동안 [민서]누나는 [서희]를
이렇게나 곱게 키우면서 억척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그.. 그랬구나.."
"그리고 엄마가 말했어요.. 그인간은 제 친아빠 아니라구요.."
[서희]의 짧고 단호한 어조에 순간 굵직한 무언가가 가슴속 웅덩이에 풍덩~빠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뭐???....."
"..............."
'....역시.. 서희 너였구나!!!!!.....'
".. 다시 한번.. 말해봐!!... 너 방금 뭐라 그랬니???..."
"..............."
[서희]가 잔뜩 격앙된 어조의 흥분한 나의 표정을 살피더니..
금방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혀지며 수저를 놓고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울먹거린다.
"너...!!.. 다시.. 말해봐..!!.. 니..니네 아빠..!! 어쨌다고???..."
".....흑!!..선생님 미워요.....이잉~잉~.."
[서희]는 방금 내가 며칠전 장례식장에서 나무란것 처럼 아버지헌담을 한다며 야단을
치고 있다라고 생각을 했나보다.
'어쩌면 진짜 내딸이 맞을 수도 있겠구나..!!!!...'
서둘러 밥상을 치워버리고 [서희]를 꽉~ 껴안아 버렸다.
[서희]가 순간 흠칫 놀란듯.. 울음을 멈춰버렸다.
내딸의 머릿결에서 샴푸향기가 묻어난다.
어느덧 커버린 내딸의 젖가슴이 꽤 묵직한 느낌으로 내 가슴위에 와닿는게 느껴진다.
두손으로 [서희]의 머릿결을 파고들며 흠칫 놀라 동그래진 [서희]의 두눈 위..
찐한 눈썹에 입술을 조심스레 들이댄다.
"...쪽..!..."
"....!!!...."
"...서희야.."
"..........."
"친아빠 보고 싶니??.."
"...네???..."
"곧 친아빠.. 만나게 될꺼야.. 내가 꼭.. 찾아줄꺼니까..."
"...네???..."
[서희]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떨리는 입술을 바라보며 다시한번 [서희]를 꽉~
껴안아 버렸다.
내딸 [서희]의 심장소리가 다 들려올 지경이다.
"저....!!... 서...선생님!!...이거...좀!!..."
"잠깐.. 우리 이러고 있자..서희야.. 제발.. 부탁이다..."
[서희]를 껴안고 있자.. 저 멀리.. 누군가의 향기가 내 머리속에 되살아 나고 있다.
[민서]누나와의 아름다웠던 추억에 가슴이 뛰었고..
[민서]누나의 힘겨웠던 삶에 가슴이 찢기듯 아파왔다.
내딸이 지금 나에게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이순간의 이 감격스런 분위기를 깨트리고 싶지가 않았다.
16년만에 만난 부녀지간의 상봉의 순간이었고 내딸 [서희]를 꽉 껴안은채
마음속으로 실컷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서희]가 강한 힘으로 나에게 벗어나더니.. 원망스럽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서둘러 나에게 떨어져 나가며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쳐나가 버린다.
그러더니 문지방밖에 선채로 얼굴만 들이댄채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그냥.. 서울로 올라가 주세요..!!..."
"....뭐???...."
"..경찰 부를꺼에요???..."
"뭐???.....푸하하하하하하하...."
"...선생님.. 이런 사람인줄 몰랐어요..!!!... 빨리 가주세요..!!.."
"...얘기좀 하자 서희야.. 니네 친아빠 얘기좀..."
내가 감격에 겨워 [서희]를 꽤 질펀하게 끌어안았던게 얘한테는 끔찍스러운 충격이었나보다.
실컷 호탕하게 한바탕 웃음이 나왔지만.. [서희]의 잔뜩 긴장한 태도로 봐서는
왠지 지금의 이 분위기는 웃고 얘기해서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 보인다.
"장난해요???... 지금 나가지고 놀아요???..."
"...얘기좀 하자.. 내가 니네 아빠.. 잘 알아.."
"....별로 듣고 싶지 않아요..!!... 빨리 가주세요.."
"....니네 아빠 어디계신지 내가 안다니까??.. 말해줄께.. 꼭.."
"거짓말말아요!!!... 친아빠는 제가 태어나기전 돌아가셨거든요????..."
".....!!!!....."
"선생님.. 진짜.. 나쁜사람이에요.. 그렇게 안봤는데요..."
".....누가 그래??.. 엄마가??.."
"그래요!!.. 엄마가 그랬어요... 빨리 나가요.. 안가시면 진짜 신고할꺼에요.."
"... 알았어.. 알았으니까.. 딱 오분간 얘기좀 하자....."
"싫다니까요???... 빨리 가주세요.."
"...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제가 어이가 없어요.. 네????...."
"핫... 뭐???...."
[민서]누나가 그동안 친아빠인 나를 [서희]에게 죽었다고 말했다는 사실에
왠지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친아빠가 죽었다니.. [민서]누나는 살아생전 나에 대한 그리움을 자기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죽여버리고 영원히 지우려 했었나 보다.
그리고 근친상간이 낳아버린 씁쓰름한 결과물인.. [민서]누나와 나의 [김서희]
[민서]누나는 끝까지 그 비밀을 지키고 싶었나 보다.
아니면.. 어떻게 살고 있을 지 모르는 내 인생에 있어서 [서희]의 출현이 행여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득 짧은 생각에 잠기다가 [서희]를 바라보자 요 깜찍한 딸년이 핸드폰으로 자기아빠를
강간범으로 신고라도 할 요량인듯..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해대고 있다.
"저.. 일일이죠??.."
"알았다!!!...갈께... 서희야..."
말을 내뱉고는 웃옷을 들고 일어났다.
[서희]가 내가 일어나자 핸드폰을 접고 멀찌감치 뒷걸음질치며 나를 경계하고 있다.
자기 엄마를 닮아서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는 듯.. 그래도 저멀리 내빼지 않고
있다는건 천만다행이다.
"가기전에 한가지만 물을께..."
"........."
"너.. 니네 친아빠.. 사진본적 있어???..."
"........."
"있어?? 없어??.. 그것만 말해...."
"........."
"싫어??... 그래.. 알았다.."
"........"
일단 지금은 이 찹찹한 심경과 황당한 시츄에이션에서 벗어나야 할 것만 같았다.
큰집앞을 나서려하자 등뒤에서 [서희]가 나를 불러세웠다.
"거기서 말해주세요..!!... 가시기 전에요...!!.."
"........."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서자 [서희]가 금방이라도 달아날듯한 자세로 나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참 웃기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춘기소녀에게 내가 그만 내 감정만 앞세워 실수를 하고야 말았고 [서희]가
충분히 오해하고 있는 상황이라는게 이해가 되었다.
"....너네 아빠.. 지금 서울에 있다..."
"........지....진짜....에요???......"
"....너네엄마 찾으려 무척이나 애쓰다가 결국 못찾고.. 폐인처럼 살았었다.."
"....거짓말말아요..깡패같은 새아빠랑 삼촌은 엄마랑 나를 얼마나 잘 찾았는데요...."
"....말못할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니네 엄마아빠 가족들이 심하게 반대를 했거든.."
"............"
"..그래서 그랬어.. 그친구가.. 니네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정말이요??.."
"..너가 태어난줄도 모르고 여태 폐인처럼 살았어.. 니네 엄마만 찾다가... 그렇게.."
".....!!!......."
어느덧 깜깜한 어둠속.. 두 눈빛만 반짝 거리는 [서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숙연하게 슷떳는 나의 모습에 [서희]가 한층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며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방에서 먹던 밥상위 반찬을 안주삼아 소주잔에 소주를 기울인다.
아빠의 대학동창이었다고 거짓말을 한뒤 그 친구에게 들었다며 [민서]누나의 과거얘기를
들려주자 [서희]는 신기하다는 표정과 친아빠에 대한 설레임이 동그란 두눈에
가득차버렸는지 한껏 들떠있는듯 한 모습이었다.
"그럼.. 아빠가 군대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다는건..."
"당연히.. 거짓말이지..!!..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데???.. 아니.. 서울에 잘.. 있으니까.."
느닷없는 [서희]의 물음에 그만 광분한 나머지..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 했다.
서둘러 말꼬리를 잡고 능청을 떨어댔다.
"하하..그래서 그녀석이 말이야..군대에서 니네엄마 보려고 몰래 광주가려다 고생도 했지.."
"그얘기 저도 들었어요..아빠 면회같더니.. 글쎄 아빠가 엄마 만난다며..
탈영했다가 영창갔다고.."
"뭐???..탈영에 영창???..에이~ 아냐..그냥 뭐..근무이탈과 군기교육대 간거지..보름동안.."
".........."
"에효.. 그녀석 참... 하여간 뭐.. 지금은 잘 살고 있기는 하니까... 나름대로.."
"저.... 혹시여..."
"응...."
"우리아빠..... 결혼은...."
[서희]가 내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자 능청스레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핫..하하하....당연히 했지.. 나이가 몇인데... 애도 있고.. 뭐.. 그렇지..."
"네에... 그렇구나..."
"에효~ 나도 올해안에 가긴 가야 하는데...."
"...................."
갑자기 [서희]의 표정에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어찌나 표정관리 못하는건 지엄마를 쏙 빼닮았는지..
새삼 오래전 목포의 미용실로 들이닥쳐 맞닥드린 [민서]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결혼을 앞둔 나역시도 [서희]의 존재감에 대해 여지껏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라..
둘의 찹찹한 심경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꽤 오랜동안 지속되었다.
결혼을 앞둔 내 여자에게 [서희]를 딸로 받아들이자고 어떻게 제안할 것이며..
결혼한 평온한 가정에 나타나 행여 그 행복을 파탄내지나 않을까.. 하는 문제들이
지금 이 자리에 마주앉은 나와 [서희]의 머리속에 맴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빠요...."
"응..."
"엄마 진짜 사랑했어요?...."
"...그럼... 미친듯.. 정말 미친듯.. 사랑했어.."
[서희]가 떨리는 눈빛으로 내 표정을 살피고 있다.
그날밤..
깜깜한 내 잠자리위로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의 길다란 생머릿결 바늘처럼 따가운 끝이 내 얼굴에 닿았다.
두눈을 뜨니.. 아름다운 [김민서]였다.
[민서]누나가 내 얼굴을 천천히 쓸어 넘긴다.
[서희... 잘 부탁해...]
[걱정마.. 그럴테니까..]
[마지막으로 희준이 꼬츄한번 만져봐도 돼..]
[뭘 새삼스레 물어봐.. 실컷 만져라..]
[실하기도 하다.. 우리 희준이 꼬츄..]
[그새 사투리 고쳤나봐??.. 서울말쓰네??]
[치이~그때가 그리워야??사투리 써줄께..누우가 을매나 니가 보고싶었는지나 알긴 아냐??..]
[나도 그리웠어..미치도록...]
[흐미~ 누야 간만에 니꼬츄 만져븐께 기분 디저블겄다~잉~]
[............]
순간 눈을 떴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그리고 순간 또다시 놀라운 충격에 억~!! 하고 낮은 소리를 질렀다.
옆방에 있을 [서희]가 언제왔는지 내옆에 움추린채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서희]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누우며 팔을 뻗어 팔배게를 해주었다.
[서희]가 내품안에 파고 들어 깊게 안겨든다.
조심스레..[서희]를 감싸 안은 내 팔에 힘이 가해진다.
'서희야.. 내가 니 아빠야.....'
"선생님..."
'...!!!!.....'
"흐음... 응????..."
"아까.. 정말 미안했어요..."
"아냐.. 괜찮아.."
"아니에요.. 정말 죄송했어요.."
"........"
잠들어있는 줄 알았던 [서희]가 내 품안에서 나즈막히 속삭였다.
"선생님옆에 누워 있으니.. 왠지 우리 아빠옆에 누워있는것 같아요.."
"..........."
"..........."
"....그럼.. 내가 니 아빠 되어줄께......"
"..........."
"..........."